리처드 도킨스의 『신, 만들어진 위험』의 리뷰를 작성하다가 너무 곁가지로 뻗어나가는 듯한 내용은 따로 정리해서 쓰기로 했다.




스티븐 그린블랫의 저작 『1417년, 근대의 탄생』은 르네상스 시대 초입 당시, 포초 브라촐리니라는 휴머니스트이자 책사냥꾼이 우연히 한 수도원에서 고대 로마의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 후 일어난 일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 이면에 존재한, 헬레니즘 철학 사조 중 하나인 에피쿠로스 학파의 유물론이, 중세 동안 잊혀졌다가 포초의 손을 통해 부활하여 마침내 우리가 아는 근대가 탄생하는 길을 열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린블랫이 묘사하는 이 과정은 웬만한 소설 이상의 흡입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의 글이 인용된다. 그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유피테르의 명에 따라서 오늘 정오에 프란치노 신부의 멜론 밭에서 멜론 2개가 완벽하게 익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도 따지 않아서 결국 땄을 때는 이미 먹기 좋은 상태가 지났을 것이다. 동시에 유피테르는 몬테 치칼라 산기슭에 있는 조반니 브루노의 집의 대추나무에서 30개의 잘 익은 대추를 따게 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몇몇은 채익지도 않은 푸른 상태로 땅에 떨어지게 하고 그중에 15개는 벌레가 먹게 하라고 하셨다. 한편, 알벤치오 사볼리노의 아내 바스타는 관자놀이 부분의 머리카락을 고불고불하게 말려다가 사용하던 철판이 너무 달궈져서 47가닥의 머리카락을 태우게 될 것이다. 그래도 두피를 데지는 않을 것이고 탄내를 맡고도 욕설을 내뱉지 않고 가만히 참을 것이다. 또한 바스타가 키우는 황소가 눈 똥에서 252마리의 쇠똥구리가 태어날 것인데, 그중에서 14마리는 알벤치오의 발에 밟혀서 죽게 될 것이고, 26마리는 뒤집혀서 죽게 될 것이다. 또 8마리는 뒷마당 근처를 순례자처럼 뱅뱅 돌 것이며, 22마리는 한쪽 구멍에, 42마리는 문 옆 돌 밑에 자리를 잡고 모여살게 될 것이다. 16마리는 쇠똥뭉치를 내키는 대로 끌고 다닐 것이고 나머지는 아무 데나 종종걸음으로 배회할 것이다. 


라우렌차가 머리를 빗을 때 13가닥의 머리카락이 끊어지고 17가닥은 빠질 것이다. 빠진 자리 중에서 10개는 사흘 안에 다시 머리카락이 나겠지만 7개는 더는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안토니오 사볼리노의 암캐는 5마리의 강아지를 밸 것인데 그중에 셋은 평균 수명만큼 살 것이나 둘은 태어나자마자 죽을 것이다. 살아남은 셋 중에서 첫째는 어미를 닮을 것이고, 둘째는 잡종일 것이며, 셋째는 그 아비를 부분적으로 닮되 폴리도로의 개도 약간 닮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뻐꾸기가 라스타르차로부터 12번 울 것이니 그보다 더 많이도 더 적게도 울지 않으리라. 12번 울고 나면, 그곳을 떠나 치칼라 성의 폐허를 향해 11분간 날아갔다가 또 스카르바이타로 날아갈 것이다. 그 후에 생길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자꾸나.


마스트로 다나세가 천을 판에 대고 자를 것인데 제대로 재단이 되지 않아 옷단이 비뚤어질 것이다. 코스탄티노의 침대에서는 12마리의 빈대가 침대 널을 떠나서 베개를 향해 행진할 것인데 그중 7마리는 몸집이 크고 4마리는 작을 것이며 1마리는 중간 크기이다. 그리고 오늘밤 촛불이 켜질 때까지 살아남은 한 놈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살펴볼 것이다. 그로부터 15분 후에 피우룰로 댁 노부인이 혀를 입천장에 네 번 스치는 동안 아래 턱에 있는 오른쪽 세 번째 어금니를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벌써 17개월 전부터 흔들리던 이빨인지라 피도 나지 않고 빠질 것이며 통증도 없을 것이다. 암브로조는 112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아내와의 잠자리에 성공했으나 그녀를 임신시키지는 않는다. 그래도 방금 먹은 포도주 소스로 조리한 수수와 파는 정자로 변했을 것이고, 그 정자를 사용하긴 했다. 마르티넬로의 아들은 가슴팍에 털이 나고 목소리도 갈라지기 시작할 것이며, 파울리노는 부러진 바늘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다가 속옷을 졸라매는 빨간 끈이 툭 끊어지게 될 것이다…….


조르다노 브루노, 『승리한 괴물의 축출』


위에서 길게 인용한 글은 유피테르(제우스)가 메르쿠리우스(헤르메스)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면이다. 읽으면 알겠지만, 유피테르는 세상 만물이 어떻게 될지에 관해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따라야할 대상들은 위대한 영웅이나 뭔가 웅장하고 장엄한 대자연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쇠똥구리, 빈대다. 그래서 시답잖다 못해 하찮다(물론 최근 역사나 과학에서는 유피테르가 구구절절 나열하는 이런 '하찮은' 행위들과 행위의 주체들이 중요한 연구 대상이다). 


유피테르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진지하게 믿던 사람 입장에서, 브루노의 이 발칙한 상상은 대단히 불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피테르(제우스)는 신들의 왕 아닌가? 그런 신이 이런 시시콜콜한 일이나 한다고? 그런데 그렇게 반응할 사람은 브루노가 살던 16세기로부터 천 년도 더 이전인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오스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사라졌다. 따라서 브루노 당시 이 글을 읽고 “유피테르 신을 모독했다”고 분노할 사람이 당시 유럽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을 믿는 신자들, 당시 유럽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여기 나온 “유피테르”가 어떻게 다가올까?


이 글을 쓴 조르다노 브루노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다. 로마 가톨릭의 도미니크회 수사였던 그는 가톨릭 교리에 의심을 품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 밖에도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영국, 프랑스 등지를 전전하다가 베네치아에서 들렀을 때 붙잡혀 로마에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 당했다.

 


국내에 번역된 브루노의 저작은 한 권 뿐이며 아쉽게도 품절이다.


21세기 기준 지구인에게 브루노의 이런 주장은 별다른 감흥 없이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지옥에서 사탄이 세상을 벌하러 뛰쳐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벤저스처럼 외계에서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이야기, 아니면 듄이나 아바타처럼 인류가 우주를 정복하거나 정복한 후의 이야기가 더 인기를 끄는 시대다. 


브루노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기는 지금과 달랐다. 알프스 이북의 유럽 국가들은 종교개혁 과정을 거쳐 로마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던 시기였고, 반대로 프랑스, 스페인 등 가톨릭권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탄압(예컨대 성 바톨로뮤 축일의 학살이나 스페인의 그 유명한 이단 재판)이 행해지던 시기였다. 


과학사의 측면에서 브루노가 활동하던 시기는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시기이자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같은 시대이다. 이 시대하면 흔히 교황청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재판하고 갈릴레오는 재판 받은 후에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발언을 했다고 잘 알려진 시대다(그가 이런 발언을 정말 했는지는 차차하고). 그런 시대에 브루노는 우주는 무한하며 지구 같은 곳이 더 있을 것이고 그곳에는 생명체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내뱉은 것이다. 


16세기 유럽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에서, 지구 외의 다른 장소에 신이 또 다른 생명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단순히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 그렇다면 그 사실을 수록하지 않은 성경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이고, 신이 창조했다는 인간과 역시 신이 창조했다는 그 외계 생명체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인간의 상상력은 가끔 아주 발칙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상상력도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16세기에 거대한 모래벌래가 사막을 헤집고다니는, 행성 전체가 사막인 아라키스나 인간보다 한참 큰 푸른 외계인들이 머무는 판도라 같은 위성을 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물론 이는 상상력이 뻗어나가는 방향의 차이이지, 상상력의 질적 수준이 다르다는 의미는 아니다). 



브루노 당시 브루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례로는 카를로 진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에서 다루는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메노키오는 태초에 우주는 구더기들이 기어다니는 치즈였다고 주장했다. 메노키오도 당연히 브루노처럼 재판 끝에 화형당했다. 진즈부르그는 메노키오가 어떤 텍스트를 접했기에 기독교 교회의 우주론과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독창적인 우주론을 도출하였는지를 추적한다. 덧붙여 『치즈와 구더기』는 역사학의 한 분야인 미시사를 대표하는 연구서이기도 하다.



이보다 앞선 중세 유럽에서 펼쳐진 인간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고 싶으면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 소설 『바우돌리노』를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중세 유럽인들이 상상한 별의별 기괴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아울러 에코의 소설치고는 읽기 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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