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 비판과 주변의 재인식 고전번역 비교문화학 연구단 총서 1
부산대학교 인문한국(HK) 고전번역+비교문화학연구단 엮음 / 미다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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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유럽중심주의 비판과 주변의 재인식』은 문화연구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유럽중심주의에 맞선 주변의 대응 및 동서양의 비판적 조우의 가능성을 따지는 책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서양사학계에서 행해진 유럽중심주의 비판서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우선 집필에 참가한 저자들의 이력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역사학 전공자 뿐 아니라 문학, 철학, 언어학, 한문학 전공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서양사학에서의 유럽중심주의 비판과 중첩되는 지점들이 없지는 않다.


목차를 보면 이런 점이 잘 알 수 있다. 제1부는 유럽중심주의의 양상들을 해부하고 비판하는 장이다. 제2부 주변의 대응과 주변의 재인식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도전을 다루는데 근현대 한국이라는 공간이 중심이다. 3부 동서양의 비판적 조우는 인도의 불교철학자 용수를 유럽의 철학자 레비나스, 또는 바이닝어와 대비시켜 비교하고 있다.  


먼저 역사학과 중첩되는 지점의 예를 들어보자. 1장 「헬레니즘, 유럽중심주의, 영국성-19세기 영국사회와 고대 그리스의 전유」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일종의 신화로서 고대 그리스가 발명된 과정과 해당 신화를 이용해 19세기 영국 사회가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는 마틴 버널의 『블랙 아테나』에서 제기된 주장을 바탕으로, 국내 서양사학자들이 19세기 낭만주의 독일 학자들이 주도하여 발명한 고대 그리스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려 한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3장 「유럽중심주의와 근대화-미국적 세계지배비전으로 근대화이론의 형성과 독일사적 전유」, 4장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오리엔탈리즘 연루에 대해」을 들 수 있다. 3장은 독일사 전공자가 집필한 만큼 한국 서양사학계의 유럽중심주의 비판과 이어지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미국화된 유럽중심주의로서 냉전 초기 미국이 내세운 근대화이론을 독일 역사가들이 어떻게 수용하였는가를 다룬 점에서 또 조금 맥락이 달라진다. 4장 「『페르시아인의 편지』의 오리엔탈리즘 연루에 대해」는 몽테스키외가 페르시아인을 내세워 당대 유럽 사회를 비판한 『페르시아인의 편지』에서 비유럽권 화자들의 목소리를 해부하는 시도다. 문학 텍스트를 해체하고 분석한다는 점에서 역사학의 하위 분과 중 하나인 지성사와도 겹치지만, 그보다 문학연구, 문화연구와 겹치는 지점도 지대하다. 몽테스키외가 유럽의 정치사상사에서 거론 안하기가 더 힘든 정치사상가라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긴 하나 나머지 장들은 역사학과 중첩되는 지점이 없지는 않으나 다소간 옅어지는 편이다. 특히 제2부에 속하는 논문들은 한국 근대지식인들이 서구에서 내세운 근대성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7「한국 근대지식인의 '근대성' 인식-문명·인종·민족담론을 중심으로」)와, 한국어 문법의 형성과정에 스며든 서구중심적 관점에 대한 추적(9장 「한국어 문법 형성기에 반영된 서구중심적 관점」)은 근현대 한국사와 한국문화가 서구의 영향을 알게 모르게 상당히 받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들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7「한국 근대지식인의 '근대성' 인식-문명·인종·민족담론을 중심으로」는 박은식, 신채호를 비롯한 20세기 초 한국의 지식인들이 근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서구의 근대와 그를 뒷받침하는 논리를 그대로 추종해야할지, 그로부터 벗어나야할지, 벗어난다면 어떻게 벗어나야할지 치열하게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2부의 논문들은 근현대,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사 및 한국 문화의 변형이 주된 주제이긴 하나 8장 「응구기의 『십자가의 악마』-주변의 언어와 새로운 고전의 가능성」은 케냐의 소설가이자 영어가 아닌 키쿠유어로 소설을 쓴 응구기의 작품 중 『십자가의 악마』를 분석하는 장인데, 이 장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응구기의 작품처럼 유럽중심주의의 멍에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식민주의적 시도 조차도 미국과 유럽에서 해당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잘 팔리느냐'라는 자본의 논리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시도하는 학자들, 특히 인도 출신의 학자들이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 같은 '서구의 고등 교육기관'에서 '영어'로 유럽과 서구를 비판하는 모습을 지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유럽을 지방화하기』로 잘 알려진 디페시 차크라바티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교수다. 어쩌면 과거 유럽의 열강들이 주조한 이 세계에서 식민지들은 해방되었을지 몰라도, 뭐든지 소비자를 위한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구조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진지한 비판도 하나의 상품으로,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제기하는 식민지 출신의 지식인도 서구의 지식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지적 상품을 판매하는 소매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마치 1960년대 68운동을 필두로 전개된 저항문화, 반문화운동이 소비상품으로 포섭된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의 구성에서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은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굳이 유럽중심주의라는 주제에 천착하지 않는 독자라도 이 책에서 유용한 지식과 관점을 얻어갈 수 있다. 일인 단독 저자가 연속적인 논의를 이어나가듯이 쓴 책이 아니라, 여러 저자들이 집필한 별개의 주제에 관한 논문들을 엮은 단행본 연구서이기에 완독에 대한 부담도 덜하다. 목차를 보고 관심사에 따라 원하는 장, 필요한 장을 골라 읽는 것으로 충분하여서다. 


예컨대 2장 「프란츠 파농의 탈식민주의적 실천-유럽중심주의와 인종주의 비판」은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같은 저작으로 잘 알려진 프란츠 파농이 어떤 지점에서 비판받고 있는지,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장이다. 5장 「포스트식민주의를 통해, 모더니티를 넘어, 트랜스모더니티로」는 근대성의 대안으로서 근대 이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서 앞으로 더 나아가야할 방향으로서 '트랜스모더니티'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제시하는 장이기도 하다. 9장 「한국어 문법 형성기에 반영된 서구중심적 관점」은 한국어 문법이나 근현대 한국어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서구의 언어학적 측면에서 받은 영향을 알아갈 수 있다.


그렇긴 하나 구성 상의 치우침은 아쉬운 점이다. 첫째로는 제2부 주변의 대응과 주변의 재인식은 제목에 '주변'이 들어감에도 4개의 장 중 3개의 장을 한국으로만 국한시켰고 단 하나의 장만 아프리카, 그 중 케냐에 할애한 점을 들 수 있다. 비유럽권 관련 장이 한 두개 정도 더 있었으면 '주변'을 내세우는 제목에 보다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3부 동서양의 비판적 조우는 단 2개의 장만 할애한 점에서 다른 논의는 없었는지, 아울러 제3부에서 동양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두 논문 모두 고대 인도의 불교철학자 용수를 공통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용수 외에 다른 동양의 철학자는 없었나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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