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 서강번역총서 3
사미르 아민 지음, 최일성.조현수 옮김 / 서강대학교출판부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31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에서 활동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 사미르 아민(سمير أمين)은 1988년의 저작 『유럽중심주의』에서 유럽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해당 개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이 『유럽중심주의』는 2000년 국내에 번역되었다.


한편, 이 글에서 다루는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근대성, 종교와 민주주의: 유럽중심주의 및 문화주의 비판』(Modernité, religion et démocratie : Critique de l'eurocentrisme et critique des culturalismes, Parangon, 2008)을 번역한 것으로 역자들이 역자 서문에서 밝히길 옮기는 과정에서 『유럽중심주의』로 의역하였으며 그 이유는 저자 아민이 1988년 『유럽중심주의』의 2부와 3부를 『유럽중심주의』(2023)에 그대로 싣고 있고 이 책은 『유럽중심주의』(1988)의 완결판이라 볼 수 있기에 그리 하였다고 들고 있다. 2010년에 옥스퍼드 출판사에서 출간된 영문 번역판도 국내 번역판처럼 『유럽중심주의』라는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유럽중심주의』(2023)은 1부 근대성과 종교적 해석들, 2부 공납제 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 3부 자본주의 문화, 4부 역사의 비유럽중심적 전망을 위하여, 이렇게 총 4부로 구성된다. 


1부에서 아민은 근대성의 개념을 밝히고 이러한 근대성이 과연 기독교 유럽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로인지 의심하며, 나아가 근본주의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 이슬람 문화권에서 이슬람 근본주의(혹은 원리주의)가 발흥할 수 있었던 이유와 그 한계를 분석한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전역에 존재한 다양한 문화권들의 정치, 경제, 사회가 지닌 공통점을 한데 묶은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민에 따르면 현재의 동아시아, 인도, 중근동은 유럽보다 앞선 선진적인 공납제 사회였으며 공납제 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이슬람교나 유교가 이에 해당한다)를 발전시켰다고 본다. 반면 봉건제가 대표적인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는 주변부 사회에 속한 사회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봉건제 유럽은 공납제라는 측면에서 다른 유라시아 지역들보다 뒤처졌기 때문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3부에서 아민은 자본주의를 유럽만의 전유물로 여기고 다른 문화권 혹은 대륙들에게 유럽 대륙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만 현재의 빈곤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주장들이 얼마나 현실을 왜곡시키며 문제가 되는지를 폭로한다. 


마지막으로 4부에서는 아민이 앞서 제시한 논지들에 맞추어 유럽중심주의가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으며, 그 대안으로서 자신의 가설들이 어떻게 유럽중심주의가 왜곡한 현실을 설명하고 보다 정확히 바라볼 수 있는 지점들이 무엇인가를 검토해본다.


이 책에서 저자 아민의 주장을 몇 가지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머리말에서 제시되듯이 문화주의 비판이다. 아민이 이 책에서 규정하는 문화주의는 문화를 초역사적 요소로 환원시키는 관점으로, 현실의 여러 사회들은 각각의 특유한 초역사적 문화적 요소를 지닌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현실의 여러 사회들에 대한 역사적인 분석으로부터 보편적인 일반법칙을 추론하는 것이 방해하게 만든다. 이 책에서 아민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 문화주의 비판을 기본 전제로 깔고 진행된다.


이어서 이 책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2, 3부에서 아민은 이러한 문화주의에 맞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다양한 문명권들로부터 공통점을 추출하여 보편성이라할 법칙을 추론하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라는 가설로 이어진다. 앞서 2부를 요약할 때 설명했듯이,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나타나 전 세계적으로 팽창하여 병합시키기 이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나아가 아메리카까지도 공납제 생산양식이 존재했으며 각각의 사회에는 공납제라는 해당 지배구조를 정당화하는 여러 이데올로기가 존재했다. 공납제 생산양식이 가장 완성에 다다른 지역은 중국, 인도, 중동권이었고 봉건제 유럽은 이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볼 때 오히려 그 완성도가 떨어지는, 후진적인 지역이었다. 


이러한 아민의 주장은 흔히 마르크스주의(실제로는 레닌과 스탈린을 거치며 변형되어 전파된) 5단계 역사발전단계론, 원시 공산제-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부르주아 자본주의-미래에 도래할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라는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발전 단계론을 벗어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은 유럽, 그중에서도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겪은 영국의 사례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소련의 레닌과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공산주의로 이행한 소련과 중국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법칙'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역사발전 5단계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아시아 사회들을 이른바 정체된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이와 비교했을 때, 아민이 제기하는 역사 단계론은 원시 공산제 혹은 공동체적 단계-공납제-자본주의-향후 도래할 사회주의로 볼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아민의 시도는 유럽의 사례를 벗어나 다양한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들을 역사발전의 법칙에 포함시키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민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가장 통렬한 비판 지점은 유럽중심주의가 자본주의를 내세워 다른 국가들에게 유럽의 발전 경로를 따르라는 거짓된 신화를 주입시킨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이 거친 진보의 단계를 비유럽권이 따라갈 때에만 유럽처럼 선진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민은 이를 '따라잡기'라고 간결히 표현한다. 그러면서 각 사회의 생산양식을 분석하여 유럽이 아닌 보편적인 사회 발전 단계를 제기할 수도 있었을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앞서 역사발전 5단계론이 보여주듯이 유럽중심주의적라는 덫에 빠지고 말았고, 제3세계의 발전이 지체된 이유도 유럽중심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대안으로 삼았기 때문이라 지적한다. 그러나 아민에 따르면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의 모델은 허상이다. 


아민은 유럽중심주의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어 주변부(대체로 비유럽권)로부터 이익을 이전받아 자본을 축적하는 중심부(유럽권, 미국, 일본)의 착취적인 현재의 세계체제를 은폐해왔음을 폭로한다. 중심부와 주변부의 부르주아들은 국경을 넘어선 계급동맹을 통해 국가를 지배하고 주변부의 민중을 억압해왔으며, 중심부의 노동자계급조차도 주변부로 부터 이전받은 이익 덕분에 높은 소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유럽중심주의는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출현하여 발전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비유럽권의 각 국가들의 내부적 요인(예컨대 민족성이나 지리 등등)을 저발전의 탓으로 돌리며 이런 세계체제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아민은 현재 상황에서 '따라잡기' 모델을 제시하여 비유럽권 국가들을 현혹하는 유럽중심주의적 모델이 아예 불가능한 기획이라 말한다. 전 세계인구가 서구인들의 생활 혹은 소비수준을 누린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렇기에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를 넘어설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 대안은 사회주의이며 그렇기에 실패로 돌아간 사회주의 기획들은 유럽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아민은 과거 공납제 생산양식에서는 그 어느 사회보다 뒤처졌던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하였던 것처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측면에서 세계경제체제에서 뒤처진 주변부에서 오히려 새로운 체제가 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진단한다. 요컨대 주변부에서 현 세계경제체제와 '절연'함으로써 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민은 유럽중심주의에 가려진 역사 발전의 보편성을 강구한다. 저자는 그 유명한 막스 베버의 주장처럼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만이 자본주의의 등장을 낳은 토대가 될 수 있었는지 묻는다. 그 답은 당연히 아니오다. 한때 중국의 퇴보를 설명한 유교가 오히려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 따라 해당 국가들의 성장을 견인한 요인으로 설명된 것처럼, 다른 문화권들의 이데올로기들(이슬람교, 힌두교, 애니미즘 등등)도 언제든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견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유럽에서 나타난 부르주아 자본주의 문화는 그 이전의 그리스-로마와도, 기독교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중심주의적 기획은 자신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 로마와 기독교와 결부지었다. 그 과정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가 역사적으로 거치는 보편적인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둔갑했고 그리스는 동방과의 연결 없이 순수하게 독자적으로 발달한 문화가 되었으며 동방에서 등장한 기독교는 서구만의 종교적 토대가 되었다.  


이 책에서 아민의 비판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이슬람교의 특징을 먼저 설명한다. 비잔티움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기독교를 수용할 수 없었던(그랬다간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므로) 아랍 부족들은 유대교를 변용하여 수용하였다. 아민은 이슬람교가 태생부터 '종교기획'이었지 사회를 개혁시키는 '사회기획'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언자는 아랍 부족 사회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쩌면 '아랍 민족의 유대교'가 될 수도 있었던 이슬람교는 아랍 부족 사회보다 월등히 발달한 동방 기독교 사회를 정복하면서 손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꿔말해, 현재의 이슬람 근본주의는 바로 이 헤지라가 시작된 시기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에는 사회를 바꾸는 '사회기획'이라는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아민이 지적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2세기 이후 이집트를 비롯한 이슬람권 지역에 전사 계급(예컨대 맘루크)가 정치 권력을 쥐고 신학자들에게 샤리아를 주재할 권한을 용인하는 이른바 '맘루크' 모델이 출현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민이 보기에 현재(2008년 당시겠지만) 이슬람권의 맘루크 체제는 군인, 신학자, 그리고 현지의 매판 부르주아들이 결탁하여 세계경제체제를 지배하는 현실자본주의와 동맹을 맺어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은 단순히 일상생활의 의례적 측면(예컨대 여성에게 각종 의복을 강제하는)을 규제하는 데 그칠뿐이지, 세계체제로부터의 절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넘어설 새로운 사회를 기획하려는 역량도, 의도도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 서적에 가까운데, 저자가 '세계체제'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점에서 이메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를 연상시키는 점이 있기에, 그리고 '공납제 생산양식'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분석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주목할만한 지점들이 있다. 


첫째는 공납제 생산양식이다. 유라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해 전(前)자본주의 시대 각 문화권으로부터 '공납제 생산양식'과 이를 정당화하는 '공납제 이데올로기'를 추출하려는 아민의 기획은 어떻게 보면 대담한 역사학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아민의 주장에 화답하는 길은 역사학자들이 정말 그게 가능한지 따져보는 것일 것이다. 이 같은 아민의 주장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각지의 문화권들을 직접 비교하면서 과연 이론적 틀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를 따지며 검증되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아민이 제시한 중심부/주변부를 바탕으로 삼는 현실자본주의와 세계경제체제를 다른 세계체제론자들이 내세운 세계체제, 예컨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세계체제론과 비교하면서 이론에 대한 비교를 진행해보는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른지 보다는, 이러한 비교를 통해 보다 정합성있고 현실을 보다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수립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세 번째는 기존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아민은 근대에 들어 사회생활 전반을 경제로 환원하는 점을 지적한다. 아민의 비판점은 특히 경제학을 향한다. 속류 경제학은 균형 잡힌 허구의 자본주의만을 상정하나 현실적으로 그 결말은 마르크스와 케인즈가 이미 내린 결론, 즉 시장에는 불균형만이 존재한다에 이른다는 것이다. 세계체제를 아우르는 현실자본주의는 속류 경제학이 간과하고 다루지 못한 지점이며,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조차도 유럽중심주의를 포용하는 과정에서 제3세계나 주변부를 위한 대안적 의미를 상실하였다는 것이 아민의 요지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학을 포함한 사회과학은 현실을 달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네번 째로 세계사와 관련해서 조금 길게 짚고 넘어갈 지점들이 있다. 아민은 서양사, 나아가 세계사의 시대발전 도식으로 익숙한 고대-중세-근대의 시대구분을 조금 다르게 본다. 아민은 중세를 헬레니즘 시대로 앞당긴다. 적어도 중근동 지역에서 고대는 고대 그리스로 끝나고, 그리스의 각 폴리스들이 마케도니아에 굴복한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이 세워진 시점부터 중세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아민이 내세우는 바는 고대 그리스 말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부터 출현해 헬레니즘 시대에 개화한 형이상학이다. 이성의 연역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형이상학은 이집트의 플라티노스에 이르러 신플라톤주의로 완성되면서 지배계급을 만족시켰다면, 토착 종교(그리스, 로마의 다신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들)에 불만을 품은 일반 민중들을 만족시킨 것은 동방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이며, 두 종교는 이성을 내세우는 헬레니즘 철학을 신앙과 화해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방)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헬레니즘의 유산을 이어받은 쌍둥이이다. 나아가 이슬람교의 철학은 고스란히 서구 기독교권에 전해져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신학자들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중세를 앞당긴 것은 (얼마나 사실에 적합한지를 떠나) 서양사의 고대-중세-근대의 도식을 달리 볼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신선한 관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 대한 지적도 눈여겨볼 점이다. 아민은 유럽 국가들이 노동자계급이 형성되면서 시민사회로 가는 길이 열린 반면, 미국은 근본주의적인 개신교도들이 정착한 이래 끊임없는 이주의 물결 속에서 공동체주의가 주도권을 쥐었다고 본다. 기존의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자리를 잡을만 하면 새로운 이주민들이 미국에 몰려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민자 집단 끼리 뭉쳐 세력을 형성하여 이민자 끼리 다투고 지배계급은 그러한 상황을 이용했다는 점을 꼬집는다. 아울러 미국의 독립전쟁이 혁명으로 많이 연구되긴 하나 미국의 이데올로기에는 프랑스처럼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최우선시하는 의미에서의 자유와 소유만이 있을 뿐이며, 정치의 시장에 대한 개입을 중단시켜 미국에서 노동자 정당 대신 '자본주의 정당'을 출현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러한 미국화가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로 한정지어 말하자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2023)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주지했듯이 아민은 중심부/주변부로 나뉘는 현실자본주의의 구조 내에서 주변부가 중심부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한데 유럽중심주의는 이런 불가능한 기획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포장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아민은 '공납제 생산양식'에서 중심부였던 중국에 비해 주변부에 해당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한 점에 주목하고, 중국이 '따라잡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을 품는 반면, 한국 근현대사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이 책을 통틀어 한국은 두 어차례 언급되는데 그친다. 여기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은 아민의 주장을 약화시킬 수도, 강화시킬 수도 있는 헐거운 연결고리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한국은 19세기 말 일찍이 중심부로 도약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음에도 20세기 중반 해방 이후 우여곡절 끝에 21세기 현재에 이르러 중심부 국가이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지점에서 한국의 근현대사, 특히 20세기 후반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유럽중심주의의 '따라잡기' 모델을 정당화하여 아민의 논증을 무너뜨리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따라잡기' 모델의 허구를 입증하여 아민의 주장을 강화하는 사례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중국의 근현대사와 유사성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시작은 일본보다 늦었지만, 중국보다 먼저 '따라잡기'에 성공했거나 그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는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제3세계 국가들에게 희망찬 모델이 될수도, 아니면 발전의 기회를 혼자 독차지하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사다리를 걷어찬 선두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보다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리고 현재 우리가 직면한 인간과 자연이 동시에 처한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를 세계사 속에서 재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이 연구범위를 한국의 경제 발전을 한국 사회 내부의 내적 요인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 동아시아 및 태평앙의 주변국가들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이러한 주변국가들과 세계를 한데 묶는 세계체제라는 분석단위로 넓힐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 더해 유럽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세계사를 보편적이고 대안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위치시켜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한국 사회의 경제 발전은 유럽중심주의에 충실히 따라간 결과인지, 아니면 유럽중심적인 발전경로를 벗어나면서도 근대와 근대 너머의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지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유럽중심주의』(2023)는 단순히 유럽중심주의 비판을 떠나 인문사회과학이라는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있다. 지금 보기에 아민의 가설들은 어떤 것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완전히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민의 가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독자들에게(유럽권이든 비유럽권이든) 현실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현실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동안 알지 못한 현실에 눈뜨게 만드는 것, 혹은 그러한 통찰력을 길러주는 것, 그것이 아마 현실 사회를 엄청난 속도로 변화시키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맡아야할 여러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유럽중심주의』(2023)는 2008년, 좀 더 거슬러가자면 1988년의 진단임에도 과거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지배한 구조 속에서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이상, 항상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으로서 앞으로도 시의성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