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학과 유럽 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책들 2
강철구.안병직 지음 / 용의숲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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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양 문화를 모르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수백 년이 지나서 이젠 우리 전통의 일부가 됐으니까" - 살만 루슈디,『악마의 시』상, P355.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은 이집트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사미르 아민(Samir Amin)이 1980년대에 제기한 개념으로, 유럽인의 관점을 중심으로 현실을 파악하는 거대한 담론 체계에 붙은 이름이라 요약할 수 있다. 아민의 저작『유럽중심주의』(2000)는 아쉽게도 지금은 구할 수 없다. 작년에 같은 제목으로 서강대학교 번역출판부에서 번역하여 출판한 『유럽중심주의』(2023)는 역자들이 의역한 제목이긴 하나 2, 3부는 『유럽중심주의』(2000)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다. 따라서 34,000원이라는 가격에 대한 심리적 저항만 어떻게 한다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미르 아민,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으로 널리 알려진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각각의 저작들을 통해 으레 보편적이라 당연히 여긴 지식 체계가 사실은 유럽중심적 시각을 보편성으로 위장시켰다는 점을 들춰냈고, 21세기 초 한국의 서양사학계도 그 같은 지적 파동에 휩쓸리게 되었다. 『서양사학과 유럽중심주의』는 바로 그런 지적 흐름이 한국에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2009년 작고한 한국의 서양사 원로 연구자 이민호 교수의 2주기를 기리는 차원에서 고인의 논문 4편, 그리고 그와 친분을 맺은 뉴욕 주립대의 조지 이거스 교수, 고인의 가르침을 받은 서울대 출신 제자들의 논문을 모은 단행본이다. 


이 책은 총 12개의 논문으로 구성되나 읽는 기준에 따라 임의로 2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부는 이민호 교수의 논문 4부로, 2부는 조지 이거스 교수 및 제자들의 논문으로 구성된 총 8장의 논문으로. 책은 2011년에 발간되었고,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은 2000년대에 저술되었다. 2024년 시점에서는 이미 상식 수준에 다다른 내용을 장황하게 설명한다거나, 서구중심주의, 혹은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비판이 이루어졌다거나, 현재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지점들이 거슬리더라도 시기상의 한계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총 12장의 논문이 수록되어있고 각각의 논문들이 다루는 주제가 상이하기 때문에 내용을 완전히 요약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각된다. 그보다는 이 책의 저자들이 생각하는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요컨대, 그동안 유럽인들이 고대-중세-(르네상스)-근대로 이어지는 유럽의 역사적 발전 과정과 진보, 특히 근대를 거치면서 유럽인들이 내세운 가치관에 '보편성'을 부여하였으며, 나아가 비유럽권은 '역사가 없다'거나 '정체되었'으므로 유럽의 발전 과정을 따라야만 한다는 거대한 지식 체계를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이 여태 서구만을 추종하여 여태 이 같은 유럽중심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흔히 '보편적 가치'나 유럽의 특성으로 간주된 개념들, 예컨대 국민국가, 민주주의, 자본주의부터 시작해 시민혁명, 산업혁명, 인권, 자유, 평등을 비롯한 다방면에 걸친 개념과 사실의 재검토가 요구된다. 나아가 종국에는 유럽중심주의와 그에 의거한 세계사 서술을 대체할 새로운 대안적 역사 서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라는 논쟁적 주제를 다루는 책이니 만큼, 유럽중심주의와 연계된 개념들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다룬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민호 교수의 논문들은 식민지 타자에 비추어 유럽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식한 과정, 오리엔탈리즘, 유럽과 이슬람의 관계(1장, 세계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유럽에서 국민국가의 형성과 위기(3장, 유럽과 국민국가), 동아시아에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수용하고 적용한 과정(4장, 동아시아의 민족국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동아시아의 서양 수용과 민족국가의 지평)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5장, 조지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서발턴 연구에서 시작된 인도 학자들의 연구를 해설하고 있다. 크게 3명의 인도인 학자가 언급된다. 각각 아시스 낸디, 디페시 차크라바티, 슈미트 사카다. 그 중에서 차크라바티는 미국의 시카고 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유럽을 지방화하기』이다.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되었으나 읽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한 책인데, 이거스 교수의 논문은 이 책을 읽기 전 참고용으로 읽으면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민호, 이거스 교수 이외의 논문 저자들도 각각의 개별적인 주제를 다룬다. 한국 서양사학의 발전 과정을 돌이켜보며 한계점을 반성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제기하거나(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 유럽과 이슬람권의 근대사 인식에 관해 다루거나(8장, 유럽중심주의 극복을 위한 일모색--유럽과 이슬람 세계 근대사 인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계몽사상이 유럽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어떻게 창조해냈으며, 보편사를 추구하던 유럽의 지식인들이 계몽사상을 기점으로 비유럽 세계에 대한 우월의식을 지니게 되었는지(9장, 계몽사상과 유럽의 이념), 자본주의 개념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의 논리적 한계점을 지적하고(10장, 서구중심주의 역사학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페르낭 브로델을 중심으로, 11장, 유럽중심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 마지막으로 유럽 연합과 유럽 민족에 관해 다루는 12장 "유럽 연합은 유럽 민족이 될 것인가"로 요약될 수 있다.


6장의 경우, 한국 서양사학계의 역사를 다루는 점에서 한국 서양사학계가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 알아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9장의 경우, 서구의 계몽주의에 숨겨진 우월의식이 등장한 양상이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데 유용할 것이다. 10, 11장은 유럽이 아시아를 경제적으로 추월하게 만든 근대의 등장을 두고, 유럽이 중국을 넘어선 것은 불과 19세기의 일이며 서구의 우위는 200년에 불과하다는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는 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2024년 시점에서 13년 전의 책이긴 하나, 여전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먼저 한국의 서양사 연구자들이 서양의 연구성과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서양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것은 아닌지, 한국에서 서양사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서양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너무 비판에 몰두하다가 자가당착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일깨워준다.


이런 측면에서 먼저 떠오르는 곳은 인도다. 오랜 기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인도는 한편으로는 서구문물을 장기간 수용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서구문물과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 이르렀다는 점에서 복잡한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앞서 이 책의 5장과 관련해 언급된 학자들을 비롯해 인도의 학자들이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할 것이다. 살만 루슈디의 작품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양을 그만큼 잘 알기 때문에, 차크라바티 식으로 말하면 오랫동안 '유럽을 지방화'했기 때문에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인도의 학자들은 인도라는 특수한 문화적 환경을 바탕으로 그러한 성과를 냈다. 한국의 서양사학자들도 연구성과가 충분히 누적되고 훌륭한 연구자들이 연구에 매진하다보면 분명 세계의 역사학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편 6장 "유럽중심주의의 극복과 대안적 역사상의 모색"은 한국의 역사 교육 체계를 고민하게 만든다. 한국의 전문 역사학계는 크게 한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마치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연상케하는 구조다. 이 3가지 상위 분류 휘하에서 전문 연구자들은 세부적인 시대/지역사를 주제로 삼는 학회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개별 학회들은 연구자들이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장인 동시에 연구 경력을 인정받는 장이기도 하다. 전국역사학대회처럼 한국의 역사학계가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학회가 열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세부적인 행사는 앞서 말한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는 대학의 역사학 학부 교육과도 관련이 있다. 대부분의 대학은 '사학과'나 '역사학과'를 마련해두고 있지만 일부 대학들은 한국사/동양사/서양사를 나누거나, 한국사/동양사와 서양사를 나누거나 하는 식으로 학과를 나누어두는 경우도 있다. 다만 최근들어 사정이 악화되어 역사학과가 '역사문화콘텐츠학과'와 같은 식으로 다른 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제도적 구성 속에서 한국의 서양사학자들은 전문분야인 서양사에만 매진하기도 바쁘다 보니 한국사나 동양사 연구자들과 협업하기 힘들게 된다. 여기에는 전문주의라는 벽도 있다. 같은 서양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사료 해석을 위해 각기 다른 언어가 요구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언어의 장벽이 낮은 미국사나 영국사의 비중이 큰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사학자가 동양사나 한국사를 다루고자 큰맘 먹고 '월권'을 행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서양사 전문분야와 접점이 있는 동양 근현대사 정도에만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이루어지는 역사학 삼위일체의 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긴 하나 전망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학과가 사라지거나 통폐합되는 것처럼, 학령 인구 감소로 인해 역사학자들의 주무대라 할 대학의 축소가 이미 예정된 상황이다. 여기에 이미 오래전부터, 적어도 20세기 말부터 역사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일자리를, 나아가 계급상승을 전혀 담보해주지 못해 입시 결과가 나날이 추락한 탓에, 수능과 내신 점수에 맞춰 입학하여 졸업할 때는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진로를 택하는 학생들이 많다. 물론 과도한 비관주의로 치닫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는 것과 대책없이 절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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