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나 19세기 이래 국민국가를 기본적인 구분선으로 하는 국가 단위의 정체성이 강화되면서 영국사, 한국사, 중국사 등과 같은 일국사적 서술 경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있다. 일국사적인 접근은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고 현재적 정체성의 기원을 재확인한다는 측면에서 많은 가치와 장점들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일국사적 서술은 대상이 되는 공간을 미리 구분하는 탓에, 국민국가가 등장하기 이전의 유동성이나 국가보다 작은 단위 내지 초국가적 단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국가라는, 정착을 염두에 둔 일정한 공간은 안정성 내지 고정성이라는 관점을 전제하는탓에, 특히 국가 간 체제가 등장하는 17세기 중반 이전의 혼돈된 유럽을 특징짓는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파악하는 데 한계를 지닌다. 불안정성은 공간적으로 피난, 반란, 전쟁, 강제 이주 등의 인구 이동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며, 인구 이동이 영향을 미치는 경계는 국경과 무관한 미시적인 지역일 수도, 아니면 국경을 넘어서는 광범위한 영역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또한 국민의 범주에 들지 못한 노예, 포로 등의 강제적 이동이나 유대인, 집시등 소수자들의 존재도 오랫동안 외면되었다.
최근 들어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일국적 단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게 된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실 앞에서 초국적인 접근이 주목받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교통과 통신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국경을 넘나드는 빈번한 인구 이동이일상화되면서, 이주가 인류사에서 예외적이 아닌 정상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문제의식도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인류사를 ‘정주=지속안정‘이라는 측면 외에 이제껏 소홀히 해온 ‘이주=변화/불안정‘이라는 시각에서 역사적으로 추적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기존의 역사 서술에 비교해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아직은 초보 단계에 머물고 있지만, 이동하는 인간들에 주목할수록 역사 해석의 폭과 깊이는 훨씬 더 확장될 것이다. - P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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