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암울한 세계관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를 읽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에 형성되었다. 열일곱 살에 부모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 세상은 선한 존재의 작품일 수 없다. 세상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려고 생명체를 창조한 악마의 작품일 것이다." 몇 년 후 철학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한 쇼펜하우어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쓴다. "삶은 끔찍한 사건이야. 나는 이러한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네." - P150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감사와 연민의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경험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동양의 신비주의자들처럼 이러한 인식이 환상이라고 믿었다. 세계는 하나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손가락의 통증을 느끼듯 타인의 고통을 느낀다. 낯선 것이 아닌, 자신의 일부로서. - P152

듣기는 연민의 행위, 사랑의 행위다. 귀를 빌려주는 것은 곧 마음을 빌려주는 것이다. 잘 듣는 것은 잘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이며, 다른 기술과 마찬가지로 습득 가능하다. - P153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처럼 정신에서 구성된, 즉 인지적 세계를 경험한다. 이 세계는 실재한다. 호수의 표면이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이 호수의 전부가 아니듯이, 인지적 세계 역시 실재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호수의 깊이를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 P155

쇼펜하우어가 매우 즐겁게 플루트를 연주했다는 사실은 그의 팬이었다가 비판자로 변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염세주의에 의문을 품게 했다. 매일 그렇게 즐거워하며, 그렇게 사랑을 담아 플루트를 연주한 사람이 어떻게 염세주의자일 수 있을까?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아무 모순도 느끼지 못했다. 이 세계는 실제로 고통이자 엄청난 오류이지만, 그 고통이 일시적으로 유예될 때가 있다. 짧은 즐거움의 순간들. - P163

예술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예술, 좋은 예술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예술가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식을 전달한다. 실재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창문, 예술은 "한낱 개념"을 넘어서는 지식이며, 그러므로 말의 표현 범위를 넘어선다.
또한 좋은 예술은 정념을 초월한다. 욕망을 키우는 모든 것은 고통을 키운다. 욕망을, 쇼펜하우어의 표현에 따르면, 의지를 줄이는 모든 것은 고통을 완화한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포르노가 예술이 아닌 것이다. 포르노는 예술의 정반대 지점에 있다. 포르노의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지 못하면 그 포르노는 실패작으로 여겨진다. 예술에는 더 고귀한 목표가 있다. - P164

쇼펜하우어는 음악 외의 다른 예술은 그림자를 이야기할 뿐이라고 말한다. 음악은 본질을, 물자체를 이야기하고, 그러므로 "모든 삶과 존재의 가장 내밀한 본성을 표현"한다. - P164

진정한 듣기를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처럼 아무런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 P169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 P175

쇼펜하우어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함께 머무르지 않고 너무 자주 책 앞으로 달려간다고 말했다. "책은 자기생각이 고갈되었을 때만 읽어야 한다." - P179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 P179

인터넷은 디지털 시대에 나타난 쇼펜하우어의 의지다. 끝없이 분투하고, 절대 만족하는 법이 없다. 나의 가장 귀중한 자원인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행복이라는 환상을 제시하지만 오로지 고통만을 가져온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 P180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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