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너의 논변은 텍스트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방법과 관련한 기존의 두 가지 접근 방식을 공격하면서 시작한다. 첫 번째 공격 대상은 대상 텍스트의 논변을 그것이 집필되었을 때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맥락에 결부시키고 그런 요소들에 의존해 텍스트의 사상을 설명하려는 접근법이다. 그런 접근법의 옹호자로 지목된 이는 학술지 《비평론집Esays in Criticism》의 편집자였던 문학연구자 F. W. 베이트슨이었다. 스키너는 그런 접근법이 역사 속의 관념들이 지닌 의미를 설명하는 데 무용하다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요점은 텍스트의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그 자체로는 연구자로 하여금 해당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즉 맥락은 어디까지나 이차적으로만 도움이 될 수 있다. - P109

두 번째 오류는 텍스트 자체가 그 의미를 풀어내는 열쇠가 된다는 관점에 입각한 접근법으로, 이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저 언제든 텍스트를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스키너는 이런 접근법 때문에 ‘불후의 지혜‘로 이루어진 보편적 관념들을 찾아내려는 잘못된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 P109

스키너는 이들이 공유하는 방법, 즉 텍스트에만 초점을 맞추는 방식을 따르다보면 필연적으로 텍스트의 저자들이 했을 리 없는 주장들을 그 저자들에게 부여한다는 점에서 ‘다양한 형태의 역사학적 부조리들’과 ‘신화들‘을 낳게 된다고 서술했다. 이런 저자들은 엄밀한 학적 토대에 기초해 도달할 수 있는 검증 가능한 사실들이 아닌 신화들을 유포할 뿐이었다. - P110

과거의 패러다임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문제는 스키너가 ‘가르침의 신화mythology of doctrines‘ 라 부른 것이다. 〔이런 신화에 빠진〕 역사가들과 철학자들은 과거의 다양한 텍스트에서 현재에 통용되는 관념을 발굴하고 이와 연관된 교의들을 찾아내는 일로까지 나아갔다. - P112

스키너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방금 언급된 저자들이 자신들이 옹호했다고들 하는 가르침을 실제로 옹호한다고 썼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해당 교의를 구성하는 관념들은 그 시대 이후의 지적 발전에 따른 산물이며, 따라서 저자들이 해당 관념들을 활용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시기에서도 비슷비슷한 주장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은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서로 다른 시공간에 속한〕 위대한 저자들이 서로 연결된 논쟁을 주고받는다는 주장이다. - P113

이 주장은 다시금 과거의 텍스트에서 후대에나 중요해지는 논변들을 예견하는 맹아를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 그리고 과거의 저자가 현대의 관점에서 중요한 특정한 관념들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낳는다. 이제 아직 열등한 과거의 맹아적 형태에서부터 우월한 현재의 완성된 형태에 이르는사상의 점진적인 발전 과정을 측정하는 일이 가능한 것처럼 전제된다. 동시에 과거의 저자들은 (후대의 계승자들이 좀 더 명확히 개진하게 될) 사상을 충분히 명료화하지 못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비판받게 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공공 여론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 문제이며, 로크는 보통선거권에 관해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아서, 홉스의 경우 기독교에 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인 게 잘못이다. - P113

텍스트만을 따로 연구하고 서로 다른 텍스트를 시대를 뛰어넘어 연결하는 연구 방법이 초래하는 또 다른 결과로는 스키너가 ‘정합성의 신화mythology of coherence‘라 부르는 것이 있다. 이런 전제에 따르면 위대한 저자들의 저작을 평가할 때, 저자가 다른 뛰어난 사상가들과 공유했을 중요한 개념적 쟁점들을 다룰 때 해당 저작들이 어떤 정합성과 깊이를 보여주는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는 어느 저자의 사유를 항상 전체적으로, 즉 오랜 시간에 걸쳐 각기 다른 환경에서 출판된 작업을 서로 이어진 문제의식에 기초하고 있는 하나의 정합적인 전체와 같은 것으로 전제하여 읽으려는 충동이 존재한다. - P114

그처럼 잘못된 방법론에서 ‘예기의 신화mythology of prolepsis‘가 비롯되는데, 이는 어떤 행위가 획득한 사후적인 의미와 해당 행위의 원래 의미를 혼동하는 것을 뜻한다. - P115

스키너에 따르면 이런 논리는 마찬가지로 허황하다. 플라톤이든 루소든 자신들의 사상이 이후의 역사에서 어떻게 사용될지 알 리 없었을뿐더러, 자신들의 사상이 본인들이 상상조차 하지 않았을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쓰인다 해도 그것이 전혀 그들의 책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 P115

스키너가 ‘편협함의 신화mythology of parochialism‘라 명명한 또 다른 난관이 있다. 이는 텍스트가 시대를 넘나들며 다른 텍스트와 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서로 영향을 준다고 전제한다. - P116

이와 같은 신화들을 나열하며 스키너가 말하고자 했던 요점은, 텍스트의 저자들이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 속한 특정한 용어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오직 텍스트에만 기초해 사상을 연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언어는 행위이며 언어의 의미는 현실의 용법에 따라 좌우되었다. 따라서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사용될 때마다 바뀌었다.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만을 보아서는 저자가, 가령 홉스나 피에르 벨이 모호하게 혹은 아이러니하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를 입증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텍스트 자체만 놓고는 어떤 주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동일한 방식으로 검토되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일반적인 의미든 구체적인 의미든 관념의 의미는 불변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전통적인 사상사는 잘못되었다. 언어를 통해 표현된 관념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서로 다른 것들을 의미했다. - P117

스키너의 방법은 텍스트 내의 발화가 의미하는 바와 해당 발화의 발화수반적 힘illocutionary force을 구별 지어 이해하는 데 기초하고 있었다. 스키너의 주장에 따르면, 저자의 진술 배후에 있는 의도를 이해할 때는 후자를 고려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 P118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논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논변이 어떤 의미로 발화된 것이었는지, 그리하여 (설령 넓은 의미 - P119

에서 같은 맥락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다양하고 상이한 형태의 진술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했다. 달리 말해, 어떤 발화가 가진 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다른) 텍스트들(혹은 이후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당 발화의 이데올로기적 맥락)을 반드시 참고해야만 했다. - P120

스키너는 텍스트를 이해하는 작업의 핵심이 저자가 텍스트를 쓰면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데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한 발화의 배경에 있는 언어가 어디까지 의미할 수 있는지"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 사회적 맥락이 ‘의미가 가진 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겠으나, 절대로 그것이 의미 자체를 결정할 수는 없다. - P120

사유의 역사가 "시대를 초월한 진리 또는 절대적 기준들을 향해 진화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알게 될 때, 연구자는 ‘스스로에 대한 앎‘을 획득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깨달음은 현재의 사상들이 반드시 과거의 사상들보다 우월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역사적 행위자들이 표명한 모든 견해는 필연적으로 지역적·우발적이며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 P120

스키너의 방법에는 저자들의 의도와 그 배후에 있는 이데올로기에 관해 생각하는 일 또한 포함된다. 이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내에서 특정한 논리가 형성되고, 그런 논리가 다른 대안적인 이데올로기들을 논박하는 줄거리를 구성하는 작업까지 수반한다. 해당 이데올로기가 저자의 논변 위에서 이후에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추적하고, 그것이 동시대의 논쟁적 지형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읽어내는 일은 필수적이다. - P122

스키너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의 중요한 저자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더 상세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작업은 인간 사회가 어느 때에 어떤 문제들을 마주해왔는지, 그리고 당대의 철학적 언어들이 어떻게 그 문제들의 해법을 특정한 범위 내에서만 사고하도록 제약했는지 등에 관한 지식을 생성해낼 수 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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