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사 연구의 핵심은 역사 속의 행위자가 남긴 발화와 주장을 진지하게 탐구함으로써 과거를 조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P6

지성사 연구를 통해 언제나 우리는 과거의 행위를, 왜 누군가가 특정한 기획 또는 실천을 옹호했는가를, 왜 누군가가 어떠한 입장을 취했는지를,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어떤 선택들이 가능했는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7

지성사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숨겨져 있는 것, 즉 후대인들이 폐기하거나 거부해 역사에서 잊힌 과거의 관념과 사상을 찾아 읽어낸다. 지성사가는 사라진 세계를 복원하고 과거의 폐허로부터 여러 관점과 관념을 다시 찾아내며 과거의 베일을 걷어내 어떻게 그런 관념들이 당시에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옹호자들을 설득할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관념과 그것이 만들어낸 문화와 실천은 과거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꼭 필요한 토대가 된다. 뛰어난 철학자들, 예컨대 자유, 정의, 평등 같은 개념을 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명료하게 풀어내 이해해야 하는 탁월한 이들이 철학적 행위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관념이다. 어떤 사회에서든 문화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그리고 형식을 불문하고 대중문화를 해설하는 이들의 작업이 어떤 행위인지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로 관념이다. - P30

비록 경기 순환이나 인구 변천 단계, 수확고 등등을 연구하는 경우에서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관념의 역할을 생략하는 게 가능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실제로 인간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관념의 존재와 역할은 결코 도외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각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특정한 관념을 이야기할 때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념이 자신을 빚어낸 더 넓은 이데올로기적 문화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해하려면 역사적 상황을 섬세하게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관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는 과제는 오직 역사적 해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 P34

지성사가에게 관념은 그 자체로 사회현상에 대한 일차적인 정보이며, 관념을 통하지 않고는 기술될 수 없는 우리의 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관념은 그 자체로 사회를 구성하는 하나의 힘이다. 다른 요인에 의해 관념이 형성되는 예도 있으나, 반대로 그런 관념이 우리의 세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사항을 제외하고는 지성사가들 사이에 별다른 방법론적 합의점이 있지는 않다. - P38

지성사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먼저 현재 스스로를 지성사가로 부르거나 지성사에 관심을 표명하는 학자들이 어떤 주제를 연구하고 있는지 훑어보자. 정치이론과 국제관계학처럼 전통적으로 지성사와 연결되어 있던 분야 외에도, 정체성, 시간과 공간, 제국과 인종, 성 sex과 젠더, 학술적·대중적 과학, 몸과 몸의 기능, 식문화, 동물, 환경과 자연세계, 민중운동과 관념의 전파 등에 대한 역사적 탐구와 함께, 출판의 역사, 사물objects의 역사, 예술사, 서책사history of the book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 지성사 연구가 수행되는 중이다. 이처럼 엄청난 다양성을 고려하면 지성사가 무엇인지 규정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P45

그중에는 거의 모든 역사학은 대체로 과거에 작성된 문헌을 연구하면서 과거의 관념을 다루니 만큼 독립된 학문영역으로서의 지성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도 있다. 물론 이는 오해다. 역사 연구에 관념을 다루는 과정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관념의 내용, 전파, 번역, 확산, 수용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는 점에서 지성사는 하나의 고유한 분과 영역이 된다. - P48

루소의 정치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그가 《사회계약론》 전후에 썼던 저술들을 읽을 필요가 있다. 루소는 특히 서신을 통해 끝없이 밀려오는 조언 요청뿐 아니라 많은 비판자들에게도 답변했다. 만약 《사회계약론》만을 읽고 정작 루소가 쓴 다른 저술들 혹은 그가 논쟁을 벌였던 다른 (이들의) 문헌들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과는 전혀 다른 루소를 만들어내게 된다. 더 나쁜 사실은 우리가 그의 주장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 P54

또 다른 사례로는 애덤 스미스를 꼽을 수 있다. 그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1776)은 종종 근대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스미스는 자신의 저작 전체에 걸쳐 상업사회에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영국의 중상주의적 체제가 탄생시킨 세력, 즉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있는 무역귀족trading aristocracy으로부터 당시 유럽의 부패한 상업이 비롯된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시대적 변화를 거부하지도,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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