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베냐민은 그 유명한 논문에서 복제기술로 인해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인 것에서 기능적인 것으로 변하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즉 과거에는 저자와 독자의 구별이 신분적이어서 저자는 쓰기만 하고 독자는 읽기만 했다. 하지만 복제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제 글을 복제·배포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독자도 저자가 될 가능성이 열린다. 물론 이들의 과거 저자들이 읽을 수도 있다. 이로써 저자와 독자 사이를 갈라놓았던 신분제가 무너진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저자가 되느냐 독자가 되느냐는 이제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기능의 문제가 된 것이다.
베냐민은 바로 여기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본다. 과거에 ‘예술가‘는 특정한 이들만 가질 수 있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복제기술에 힘입어 누구나 원하면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세기의 작가들은 작품만이 아니라 작가의 아우라마저 파괴함으로써 복제기술이 열어준 이 평등주의를 작업 속에 구현하려 했다. - P213

예술 창작에 공장제 대량생산을 도입함으로써 워홀은 대량생산의 시대에는 누구도 더 이상 (전통적 유형의) 예술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던진다. 그 말에는 동시에 다른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즉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로운 유형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냐민은 사진이 전통적 예술(회화)이기를 포기하고 저 자신(기술)으로 머물 때 비로소 미학성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 역설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머리에 아우라를 뒤집어쓴 과거의 예술가는 시대착오가 되었다. 스스로 아우라를 치우고 대중과 같아질 때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예술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 P215

복제기술이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면서 삶과 예술의 경계를 없애려는 아방가르드의 기획은 대중의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독자는 웹툰을 통해 만화가가 되고, 오마이뉴스를 통해 기자가 되고, 허핑턴포스트를 통해 칼럼니스트가 된다. 나아가 유튜브를 통해 소형영화 감독이 되고, 팟캐스트를 통해 아예 방송국이 된다. 90년 전 베냐민의 비전이 실현된 것이다. - P215

현대미술의 규칙을 왜 대한민국에서는 검찰이 제정하려 드는가? - P221

내가 보기에 검찰이 현대미술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에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예를 들어 검찰에서 축구 경기장에 들어와 태클로 상대 팀 선수를 다치게 한 선수를 ‘과실치상‘으로, 혹은 고의성이 있다고 ‘폭행치상‘으로 기소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지금 검찰이 하는 일은 그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에도 법이 건드릴 수 없는 규칙이 있듯이 예술에도 법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검찰이 그 경계선을 침범했는데, 다들 이 심각한 문제를 아예 문제로 인식조차 못하니 나로서는 황당할 뿐이다. - P232

보수 언론의 기자는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는 없다"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소름이 끼친다. 내가 우려하는 사태가 실은 이것이다. 모든 사안에 무차별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 검찰이 엉뚱한 데에 사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를 저질렀다. 그런데 그걸 바로잡아야 할 기자가 그것도 법이니 따르라고 강요를 한다. 기가 막힌 일이다. - P234

어느 신문사에서 설문을 돌렸다. 조영남의 작업이 ‘사기‘라는 데에 국민의 74퍼센트가 동의했단다. 이 나라는 워낙 민주적이라 예술의 규칙도 다수결로 정하는 모양이다. - P253

카멜레온이 제 몸에 환경의 색을 입히듯이 위대한 작가들은 제 작업속에 사회의 구조적 변동을 미메시스(모방)한다. 한 작가의 ‘독창성‘이란 천상의 추상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구체적 사회 상황과의 지시연관reference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 P352

전전戰前의 유럽 모더니즘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수공업이 공장제 대량생산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미적으로 전유했다. 마찬가지로 전후戰後의 팝아트는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자본주의를 거쳐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하는 과정을 미적으로 전유하려 했다. 예술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를 미메시스(닮기) 한다. 그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는 없어도) 그 존재 자체로서 이미 사회적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마크 테일러에 따르면 이전유의 과정은 크게 상품화商品化, commodification, 상사화商社化, corporatization,
금융화金融化, financialization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 P357

오늘날 미술은 산업자본주의의 생산방식, 소비자본주의의 판매방식, 금융자본주의의 투자방식을 모방한다. 그로써 제 안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사회의 상태에 관한 메시지를 품는다. - P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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