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의 역사 - 각주는 어떻게 역사의 증인이 되었는가
앤서니 그래프턴 지음, 김지혜 옮김 / 테오리아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각주의 역사』(Les Origines Tragiques de L'érudition)는 미국의 역사가 앤서니 그래프턴의 저작으로, 전문서적을 읽다보면 본문 아래 깨알같이 놓인(어떤 때는 본문 절반 가까이 잡아먹기도 하는) 각주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저자인 앤서니 그래프턴에 관해 간략히 알아보자. 역자 후기에 따르면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린스턴 대학 역사학과에 현재까지도 재직중이다. 프린스턴 역사학과는 "신문화사"를 주도한 주역들, 로렌스 스톤, 내털리 데이비스, 로버트 단턴이 머물던 곳이었다. 역자에 따르면 이 같은 신문화사의 주된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라고 간략히 소개한다. 앤서니 그래프턴은 이런 흐름에서 다소간 거리가 있었으나, 역사서를 밑에서 받쳐주는 각주의 역사를 다루면서 '밑'을 포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문을 설명하기에 앞서 본서의 독특한 이력을 잠깐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원래 "독일 각주의 비극적 기원"으로 독일에서 먼저 출간된 후 영어판, 프랑스어판으로 번역되었다. 


이제 이 책의 본문을 살펴보자면, 크게 7장의 본문과 1장의 에필로그로 이루어진다. 1장에서는 역사학자가 과학자만큼 연구를 충분히 했다는 근거로서의 각주에 관해 다양한 측면에서 다루어지며 저자는 각주를 기점으로 고대/근대의 역사가 구분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고대의 산문은 기억에 의거해 자료를 언급하지 않은 반면 근대 역사학에서 각주는 권위와 진실성을 주장하는 수단이다. 2장부터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서 랑케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랑케는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고 새로운 연구 관행을 창조하며 1차 사료의 수색과 이용을 연구지침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의외의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 랑케가 근대 역사학의 기초라고 할 각주에 관해서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저자는 거꾸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랑케 이전에 각주를 활용한 지적 시조들을 하나하나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랑케의 지적 시조라 할만한 이들은 적지 않다. 여기에는 계몽사상가, 교회사가, 호고가가 있으며, 특히 17세기에는 역사학과 인문학을 폄하한 데카르트에 맞선 피에르 벨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같이 거꾸로 거슬러가는 역사적 여정 속에서 저자는 랑케 이전 기나긴 근대적인 비판적 역사적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과정에서 랑케는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신화가 벗겨지고 각주와 비판적 부록을 도입한 인물로 새롭게 재조명된다.


이 책은 말하자면 '역사학'에서 각주의 역할과 의미를 추적하여, 랑케가 근대 역사학의 효시라는 신화를 깨뜨리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아포리즘을 하나 빌려오자면 할아버지(랑케 이전 각주를 다양하게 활용한 역사가들)에 기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랑케)를 살해하는 아들(앤서니 그래프턴)이라는 구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랑케를 폄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랑케에게서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신화를 벗겨내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제목이 혼동을 줄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각주의 역사』라는 제목은 첫눈에 보기에 마치 이 책이 모든 분과학문에서 사용되는 각주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으며, 책을 펼쳐 목차를 살펴보면 랑케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가는 '역사학'에서의 각주만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좋은 제목을 고민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지점이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된, "독일 각주의 비극적 기원"은 오해를 피하기에는 좋겠지만, 이 책을 집어들게 할 만큼 매력적인 제목처럼은 느껴지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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