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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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 1899년, 미국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미국의 상류계층을 '유한계급'으로 지칭하며 그네들의 과시적인 낭비 행태를 풍자하는 책, 『유한계급론』을 출간하였다. 이 책을 두고 한 서평가는 이 책이 영국의 유한계급을 모방하고 영국 귀족과 결혼하려 드는 미국 상류층의 행태를 묘사한 점에서 미국 문학의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 평가하였다. 공교롭게도 20세기 초 미국 '유한계급'의 행태는 1944년 영국의 작가 서머싯 몸의 『면도날』로 비슷하게 재연되었다.


총 7장으로 이루어진『면도날』은 작가인 서머싯 몸이 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대공황 시기까지, 두 부류의 인물상을 관찰한 이야기다. 한편에는 미국인 속물들이라 할만한 엘리엣 템플턴과 조카딸 이사벨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1차 세계대전에 공군으로 참전하였으나 눈 앞에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한 로랜스 대릴, 줄여서 래리가 있다. 래리는 삶의 의미를 찾아 한동안 세상을 등졌다가 다시 속세로 돌아온다.


몸은 이 책을 시작하면서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없는 이런 글이 소설이라 부를 수 있는 가 우려한다. 

지금껏 이렇게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소설을 시작해 본 적이없다. 내가 이 글을 소설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단지 마땅히 붙일 다른 이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줄거리다운 줄거리도 별로 없고 결말이 죽음이나 결혼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p. 9


확실히 이 책에서 등장인물들이 일으키는 사건은 이 책에서 잠깐 언급되는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일으키는 사건과는 거리가 있다. 스트릭랜드가 사고뭉치라면, 이 소설은 후반부의 한 사건만 빼고 끊임없이 화자인 몸이 엘리엇, 이사벨, 래리, 그외 소피, 수잔 루비에와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헤어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중심에는 래리가 있다.


이 책은 내가 이따금 만나서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한 남자를 회상한 내용이다. 나는 그가 나와 만나지 않았던 기간에는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나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 기간에 있었을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꾸며 내 좀 더 조리 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다. 단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를 쓰고 싶다. - P10


인물 간의 갈등(주로 이사벨과 래리 사이)이 빚어지긴 하지만, 주요 인물들 중 찰스 스트릭랜드에 비견될 만한 초대형사고를 치는 인물은 없다. 


이 책에서 긍정적으로 비춰지는 인물은 역시 주인공이라 할 인물은 래리이다. 래리는 끊임없이 공부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한다. 래리는 1차 세계대전에서 공군으로 참전한 후 동료가 한순간에 '핏덩이'가 되는 꼴을 보고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래리의 등장은 상당히 늦다.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엘리엇 템플턴이다. 이 소설의 비중만 놓고보면 엘리엇 템플턴이 진짜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엘리엇은 풍족한 재산을 지니고, 유럽의 사교계에 온 신경을 쏟아부으며, 사람을 대할 때 사회적 신분을 따지며 대하는 속물의 전형이다. 그가 머무는 방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그가 몸과 친해진 계기도 몸이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나중 가면 자신의 이니셜을 새긴 속옷을 몸에게 보여준다거나, 죽음을 앞두고서도 사교 파티 초대장에 답하려 하는, 나름 진지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예술품을 알아보는 교양과 안목이 있으며, 프랑스어와 영국식 영어에도 능통한 인물이다. 술집에서 다같이 대화를 나눌 때, 술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한껏 늘어놓는다. 


이 같은 엘리엇 템플턴의 면모는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묘사한 유한계급의 모습과 많은 점에서 들어맞는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쓸모없는 지식과 예의범절을 학습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는 과시적 여가, 역시 쓸모없이 소비하며 재산을 과시하는 과시적 소비, 이른바 과시적 낭비를 일삼는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시간과 재산을 낭비하는 과정에서, 유한계급은 쓸데없는 예의범절과 오로지 낭비로만 귀결되는 각종 지식을 남들 앞에서 보여준다는게 그의 요지다.


어느새 우리는 미술관에 도착했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도 그림으로 옮겨 갔다. 나는 엘리엇의 박학다식함과 예술적 안목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관광객이라도 안내하듯 나를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데리고 다녔다. 그 어떤 미술교수라도 엘리엇만큼 훌륭하게 그림을 설명해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 P41
그때부터 엘리엇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최고급 요리사를 불러왔고, 얼마 후 그의 집에 가면 리비에라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요리를 맛볼 수 있다는 평판이 자자해졌다. 집사와 하인에게는 어깨에 금줄 장식이 달린 흰색 제복을 입혔다. 그는 최대한 후하고 성대하게 손님들을 대접하되, 고상한 품위를 지키기 위한 한계선은 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 P207
내가 엘리엇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감탄한 점은, 그가 신분 높은 인사들을 대할 때 우아함과 예의를 한껏 갖추면서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독립적이고 당당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208

이러한 엘리엇의 모습에서, 그가 남들이 알아채지 못한 사생활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예의범절과 '교양'을 갈고 닦았는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래리는 책의 첫 페이지에 인용되는 카타 우파니샤드의 구절, 넘어서기 어려운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건너 구원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래리는 엘리엇과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 이후에나 등장한다. 3장과 6장에서 몸이 래리에게 이야기를 듣고 독자들에게 전달해주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래리는 대체로 몸, 엘리엇, 이사벨과 동떨어진 삶을 산다. 엘리엇과 이사벨이 소설 내내 파리에 머무는 동안, 래리는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인도에 가 요가수행자를 만나 수행까지 하고 돌아온다.


엘리엇, 이사벨의 가치관과 래리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은 래리가 이사벨과 파혼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사벨은 부유하고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 싶어하나 래리는 정신적으로 의미있는 삶을 찾고자 한다.


이사벨과 래리의 관계에서도 주목할 측면이 있다. 이사벨은 그레이 매튜린과 결혼한 이후에도 래리를 향한 욕정을 내보이는가 하면, 래리가 소피 맥도널드와 결혼하려하자 이를 훼방놓는다. 이사벨은 어떻게든 래리를 소유하려하지만 이사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오히려 소피와의 결혼이 무산된 래리는 이사벨을 영영 떠나버리고 말았다.


래리라는 인물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6장에서 독자는 몸과 래리의 대화를 통해 인도철학을 일부 나마 접하게 된다. 이때 래리가 말하는 인도 철학은 래리의 관점으로 정제된 인도철학, 즉 '서양인의 관점에서 본 인도 철학'이다. 이 지점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으로 해부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소설이 쓰여진 당시에는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 같은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을 테니 그러려니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소설의 배경은 20세기 초, 정확히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사이에 해당한다. 1944년에 발표되었으나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의 시점을 다룬 책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물질주의적인 속물들, 엘리엇과 이사벨 그리고 그와 대비되는 래리를 통해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의문을 떠올리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풍족한 삶,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삶이 의미있는 삶, 행복한 삶인가? 아니면 소설 후반부에서 래리가 선택한 것처럼 물질적으로는 평범한 삶, 어쩌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고단할 수도 있는 삶을 살더라도, 선과 악이 혼재하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 갈구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인가? 결국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동시에 삶의 의미를 성찰 하는 것과도 같다.


래리와 몸의 대화 중 래리의 흥미로운 한 마디를 언급하면서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연히였죠.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몇 년간의 유럽 생활 끝에 치러야만 했던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 같아요. 그동안 저한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은 거의 모두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었죠. 하지만 돌이켜 보면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마치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 P409

가끔 우연과 필연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우리 삶이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결과인 줄 알았더니 사실 처음부터 그 결과가 래리 말마따나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번번이 그에 대해 나 스스로 답을 내리지는 못하지만, 항상 재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 카타 우파니샤드 - P7

그러곤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내 의도와는 달리, 이 글이 일종의 성공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내가 등장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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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15: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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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8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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