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불길은 어린 시절의 아버지 숭배를 남김없이 태워버리고 그를 세속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때부터 그는 어떠한 종류의 신도 섬기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아버지와 다르고 또한 아버지가 결코 될 수 없는 존재, 즉 철두철미철저한 영국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어쩌면 그 분노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 P70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아침을 먹으려고 내려와 보니 접시 위에 훈제 청어 한 마리가 놓여 있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 한동안 멍하니 들여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 조각 먹어보니 입 속에 작은 가시가 가득했다. 그것들을 모두 끄집어내고 다시 한 입, 다시 가시들. 다른 학생들은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 그를 말없이 구경할 뿐이었다. 자, 내가 가르쳐줄게, 이건 이렇게 먹는 거야, 하고 말해주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생선을 먹어치우는 데는 장장 90분이 걸렸고,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식탁에서 일어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때쯤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는데, 만약 울 수만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문득, 방금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국은 색다른 맛이 있으며 뼈와 가시가 가득한 훈제 생선이었고, 그것을 먹는 방법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호전적인 일면을 발견했다. 그는 다짐했다. "너희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마. 어디 두고보자." 청어를 먹어치운 일은 그의 첫 승리였고 영국 정복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 P71
"당신 아들한테, 외국에 가서 기껏 제 민족을 경멸하는 것만 배워온 놈은 제 민족에게서도 경멸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줘. 도대체 저놈은 뭐야? 소공자야, 고관 나으리야? 이게 내 운명인가, 아들을 잃고 괴물을 얻는 게?" 그러자 살라딘이 아버지에게 대꾸했다. "아버지, 지금의 제 모습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겁니다." - P73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내려 하는 자는 어떻게 보면 조물주의 역할에 도전하는 셈이며, 따라서 자연에 거역하는 자, 신성 모독자, 괴물 중에서도 으뜸가는 괴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에게서 비애감을 느끼고 또한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와 분투 노력에서 영웅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돌연변이가 살아남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이민자는 위장술을 익혀 변신하게 마련이다. 주변에 즐비한 거짓에 대항하는 자위 수단으로 우리도 거짓 허울을 뒤집어쓰고 진정한 제 모습을 감추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발명하는 자는 자신을 믿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성공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또 신을 흉내낸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혹은 몇 단계 내려와서 팅커벨을 떠올려보아도 좋다. 아이들이 손뼉을 쳐주지 않으면 요정들은 존재하지 못한다. 혹은 간단히 이렇게 말해도 좋다. 그것은 인간의 속성일 뿐이라고. 남이 자신을 믿어줄 뿐 아니라 자신도 남을 믿어야 하는 것. 바로 맞췄다. 사랑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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