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동 블루스
서주홍 지음 / 메이킹북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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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좋은 시 들이 많다.


'내 집에 숨어사는 이'같은 작품은

무언가 설명하려 들지 않고, 상황만 툭 던져놓는다.

내 집에 들어와 사는 이라는 설정도 굳이 해석을 붙일 필요 없이 바로 받아들여진다.


이런 시에는 문장이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지나갔다는 쪽에 가깝다.

이해가 빨라서라기보다, 붙잡히지 않아서..


반대로 '돌탑'이나 '내 문서', 그리고 '장미동 블루스'는 확실히 다르게 읽힌다. 여기서는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든다.


돌탑


돌이 쌓인다는 단순한 이미지인데, 읽다 보면 방향이 헷갈린다.

쌓이는 게 쌓이는 건지, 눌리는 건지 애매하다.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올려놓는다는 문장에서 특히

올려놓는 건지, 갇히는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내 문서


이 시는 기억을 다루는 방식이 조금 낯설다.

보통 기억은 떠오르는 건데, 여기서는 파일처럼 저장되고 꺼내진다.

내 문서라는 말 자체가 이미 기억을 어떤 구조 안에 넣어버린다.


왜 이렇게까지 정리해서 보관하는지,

왜 버리지 못하는지.


속도가 느려지는 건 내용 때문이라기보다,

이 시가 기억을 다루는 방식 때문이다.



장미동 블루스


여기서는 장소가 그냥 배경으로 머물지 않는다.


군산 장미동, 미두장, 조선은행 같은 말들이 나오면서

읽는 순간 풍경이 아니라 시간 쪽으로 넘어간다.


길이나 건물이 아니라

그 위에 쌓인 시간들이 먼저 보인다.


'장미동 블루스'는 내용보다 읽는 방식이 더 기억에 남는 시집이다.


어디는 금방 지나갔고,

어디는 계속 되돌아봤다.


결국 남는 건 시 몇 편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멈췄는지에 대한 감각이다.


그게 이 책의 중심에 가까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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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법의학자 청소년들의 진로와 직업 탐색을 위한 잡프러포즈 시리즈 87
하홍일 지음 / 토크쇼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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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 진로와 직업 탐색 시리즈의 한 권이다.

그러나 막상 읽기 시작하면, 단순히 어떤 직업인가를 알려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직업을 매개로 삼아, 판단과 증거 그리고 윤리라는 문제를 끌어올린다.


청소년을 전제로 한 책답게, 법의학자의 역할과 진로 경로는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의과대학 법의학교실, 민간 검안의라는 구조는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법의학자가 하는 일


어떤 사건을 다루는지 (폭행, 교통사고, 약물 등)

어떤 능력이 필요한지 (분석력, 객관성, 의사소통 능력)


이 모든 것이 진로 안내서의 문법으로 배열되어 있다.

청소년이라면 이 직업이 나에게 맞는가를 빠르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순한 진로 안내서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중간중간 등장하는 문장들 때문이다.


“법의학자는 마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증거로 판단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은 직업 정보를 주는 동시에,

그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사고 방식과 태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또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언급되는 부분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례들은 단순한 직업 설명을 넘어,

법의학이 사회적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 직업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면서도,

동시에

이 직업을 감당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많은 진로 책이 직업을 정보로 환원한다면,

이 책은 직업을 하나의 태도와 책임의 문제로 확장한다.


법의학자는 단순히 시신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증거를 통해 진실을 구성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과 거리, 판단의 기준을 끊임없이 조절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청소년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나는 판단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나는 감정과 거리를 둘 수 있는가


이 질문들 때문에, 결코 가볍게 읽히지는 않는다.


'죽음의 진실을 밝혀내는 법의학자'는 분명 친절한 진로 탐색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친절함 속에 묵직한 질문을 숨겨둔 책이다.


빠르게 읽히는 부분은 길을 보여주고,

느리게 읽히는 부분은 그 길 위에서의 태도를 묻는다.


그래서 이 책은 법의학자가 되고 싶은가를 넘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청소년에게 필요한 진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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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이 이기는 인생 법칙 - 다정함은 오래 남는다
우자더 지음, 이지수 옮김 / 지니의서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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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5분 전 식당” 이야기. 식당이 곧 문을 닫으려는 순간 손님이 들어왔을 때,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이미 마감했다고 돌려보낸다. 둘째, 포장만 가능하다고 선을 긋는다. 셋째, 그냥 받아서 천천히 먹게 한다. 너무 흔한 상황이라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장면이다. 근데 그걸 전혀 사소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 순간의 선택을 통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다. 약간 과장된 질문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 피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순간이 실제로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그 대목에서 한동안 책을 덮었다. 그날 하루가 그대로 떠올랐다.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대화, 친구의 말을 끊고 결론부터 말해버린 순간, 시간 없다는 이유로 최소한만 대응했던 장면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문제는 그게 반복된다는 데 있다. 이 책이 계속 건드리는 건 바로 그 반복성이다. 어떤 거창한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매번 비슷한 상황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선택되는 방식. 말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장점은 그런 미세한 부분을 놓치지 않는 데 있다. 보통 자기계발서가 큰 목표나 극적인 변화에 집중한다면, 이 책은 거의 반대로 간다. 인사 한 번, 마지막 응대, 타인의 시간을 대하는 태도, 부탁을 받았을 때의 반응 같은 것들. 너무 작아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지점들을 반복한다. 그래서 읽다 보면 약간 불편해진다. 이건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밀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생활 밀착형이고, 나쁘게 말하면 도망칠 구석이 없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 책이 이타성을 다루는 방식이다. 보통 이타성은 두 가지로 소비된다. 하나는 순수한 도덕, 그냥 착하게 살라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전략, 결국 이게 더 이익이 된다는 식의 계산. 이 책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노골적으로 계산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조건적인 희생을 말하지도 않는다. 반복되는 태도가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다시 기회를 만든다는 식이다. 크게 보면 단순한 구조인데, 사례들이 구체적이라서 덜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나오기 전에, 이미 몇 개의 장면이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


읽으면서 계속 들었던 생각은.. 나는 어떤 선택을 의식해서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익숙해서 반복하는 사람인가. 대부분의 경우 후자에 가깝다. 생각보다 많은 행동이 자동으로 나온다. 친절도, 무심함도, 배려도, 무시도 다 어느 정도는 습관이다. 이 책은 그 자동성을 끊어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잠깐 멈추고, 다른 선택을 해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들라고.


나는 한동안 식당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문 닫기 직전의 짧은 시간, 누군가를 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그런 문 앞에 서 있다. 다만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솔직히 확신은 없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예전처럼 그냥 넘길지, 아니면 한 번쯤 멈춰서 다르게 행동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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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다정한 이웃들 걷는사람 소설집 19
임성용 지음 / 걷는사람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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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 공동체를 배경으로, 서로 알고 지내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는 사람들의 삶을 따라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이웃들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과거와 상처, 그리고 말해지지 않은 사연들이 쌓여 있다. 이야기는 어떤 큰 사건을 향해 달려가기보다, 인물들의 일상과 대화를 통해 서서히 보여준다. 누군가는 과거에 붙잡혀 있고, 누군가는 그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며, 또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과 감정이 같은 공간 안에서 엇갈리며 흐른다.


읽는 동안 가장 먼저 들었던 감정은 묘한 현실감이었다. 특별히 극적인 장면이 아니라, 오히려 별것 아닌 말 한마디나 어색한 침묵 같은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사람 사이에서 흔히 생기는 오해, 말하지 못하는 마음,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태도 같은 것들. 그런 장면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건 너무 익숙한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와 가까이 지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제대로 아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간극이 때로는 관계를 지탱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이야기가 갑자기 현실에서 살짝 벗어나는 듯한 순간들도 있었다. 감정이 충분히 따라가고 있다고 느끼던 흐름 속에서, 문장이 갑자기 더 추상적인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느낌. 그럴 때는 잠깐 멈춰서 다시 읽게 됐다. 이해하려 애쓰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이야기와의 거리가 조금 벌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그 낯섦이 거슬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세계 자체가 그렇게 단순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어디까지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공감이나 이해를 관계의 목표처럼 말하지만, 이 소설은 그게 생각보다 훨씬 불완전한 일이라는 걸 보여준다.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그 옆에 머무르는 것. 어쩌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과거가 끝난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떤 경험들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사람의 말투나 선택, 혹은 침묵 속에 남아 계속 영향을 준다. 그래서 현재를 이해하려면 보이지 않는 과거까지 함께 짐작해야 한다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사실들을 다시 마주하게 된 느낌이다. 관계는 늘 명확하지 않고, 사람은 언제나 조금씩 어긋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말을 걸고, 듣고, 같이 살아간다. 그 반복이 쌓여서 겨우 이웃이라는 상태가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오래 남는 건 어떤 장면의 온도나 말투, 그리고 사람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공기다. 그런 것들이 조용히 머릿속에 남아 있다가, 문득 현실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게 이 책의 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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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게 웃으며 말 거는 법 - 냉소와 허무를 뚫고 나가는 유머라는 해독제
크리스 더피 지음, 박재용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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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흔히 기대하는 유머 잘하는 법과는 다르다. 읽다 보면 농담의 구조를 배우는 느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을 다시 조율하는 과정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웃음은 타고나는 재능이라기보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라는 점을 설득해 나간다.


책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건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다. 익숙한 길, 늘 보던 사람들, 별 의미 없이 흘려보내던 장면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것. 이를테면 소리의 퍼짐, 사람들의 몸짓, 사소한 대화의 어조 같은 것들에 시선을 두라는 제안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문장을 넘어선다. 오히려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일종의 감각 훈련같다.


유머를 철저히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로 본다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웃음은 서로가 공유하는 맥락과 기억 위에서 비로소 살아난다. 그래서 재치 있는 사람이 되는 법보다, 타인과 연결되는 방식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실제로 우리가 오래 기억하는 웃음이 대부분 어떤 관계 안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설득력 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책이 얘기하는 통찰이 흥미로운 만큼, 그것이 개인의 일상적 실천을 넘어 더 넓은 맥락으로 확장되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있다. 유머가 사회적 긴장이나 권력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때로는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공격하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문제까지 다루었다면 논의의 깊이가 더 살아났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고 나면 묘하게 남는 것이 있다. 당장 더 웃겨져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유심히 보고,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그 미묘한 변화가 결국 웃음을 만들어내는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일상을 다시 감각하게 만드는 작은 장치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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