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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 사회 귀족의 나라에서 아웃사이더로 살기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로부터 이번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에 이르기까지 홍세화의 글은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읽을 때에 마음이 지피는 것은 물론이고 읽고 난 다음에도 잔잔한 여운에 휩싸여 한동안 그 자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그의 글에 흠뻑 빠질 때마다 도대체 그 흡인력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늘 의문을 품어보곤 했다. 우선 글의 주된 소재가 프랑스 사회에 관한 것이 많아서 이국적인 것에 대한 생경함이랄까 새로운 차원의 것에 대한 호기심의 발동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요소이긴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이 지닌 극적인 서사성이 흥미를 유발한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이 역시 만족할 만한 결론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녹록치 않은 글 솜씨가 독자들을 흡인한 것일까 하고도 생각할 수 있겠는데 그런 형식적인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오랜 숙고 끝에 겨우 그의 글에 녹아있는 맑고 향기로운 영혼이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정서적으로 공감케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그의 정신 세계는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리고 있었던 인간 본연의, 우리 겨레 고유의 소중한 원형을 아직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복하고 지배하는 동물적 권력욕에, 또 세상의 잡스런 이해관계에 오염되지 않은 식물적인 심성 그대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글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내면의 향기에 우리가 이끌렸던 것이다. 그의 글은 영혼을 바탕으로 가슴으로 씌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홍세화의 내면에 비쳐진 조국의 현실은 그가 맑은 향기만 뿜어내게 버려 두지 않고 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게끔 터무니없이 일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홍세화가 밝혔듯이 그에게는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과 프랑스 사회라는 두 개의 거울이 있는데 거기에 투영된 우리 사회의 실상은 너무나도 기괴하고 참혹하여 그를 불가피하게 악역을 맡게끔 몰고 간다는 것이다. 몰상식과 불의로 가득 찬 그리하여 이성적으로는 비관할 수밖에 없는 지경인 우리 사회의 질곡이 이 눈 푸르고 가슴 맑은 홍세화를 단호한 논리와 자극적인 발언으로 무장한 투사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악역을 수행하고 있지만, 그리하여 준엄하고 냉혹하게 사회 귀족과 프로피퇴르들을 질타하고는 있지만 그의 글에는, 아니 바로 한 꺼풀 아래 그의 내면에는 축축한 물기 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이 가혹한 땅의 힘겨운 현실이 남의 것이 아닌 바로 우리의 일이기에 보다 못해 엄혹한 비판을 가하더라도, 비판받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애정 어린, 더 나아가 연민이 일어나는 것이 그의 심성인 것이다. 더불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자탄 내지는 비애의 마음도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상대방을 준열하다 못해 극단적으로 비판하여 인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서도 뻔뻔하게 한 점 부끄럼도 없이 태연자약한데 말이다. 홍세화는 비판 대상이 된 개인이나 집단에 대해서도 안쓰럽고 측은하게 생각하며 또 그들을 몰아붙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슬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애에 잠기는 가운데에서도 홍세화는 낙관적인 전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성적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는 말처럼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교육을 통해 의식을 개조하고, 억압받고 학대당하고 있는 아이들을 살려내야 할 교사들과 그러한 교사들에 의해 길러져 자아를 실현해 나갈 청소년들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 땅에서 슬플 수밖에 없는 홍세화의 마음을 위로해 줄 이들이 바로 우리의 희망인 청소년들과 그들을 올곧게 길러 낼 이 땅의 교사들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