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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우륵은 변절의 길을 택하였다. 그것이 심한 자의식의 손상을 준 듯 하다. 뜬금없이 흰소리를 중언부언 늘어놓는 구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스스로도 당당하지 못함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대의를 저버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듯, 남들의 폄훼를 희석하기 위해서인 듯 주저리주저리 엮어내는 울림 없는 공허한 말들은 일견 노추(老醜)의 넋두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륵의 선택에는 절개, 순결, 정통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지배 이데올로기로만으로 판별하기 어려운 차원의 정서와 의지가 개입되어 있다. 순결 이데올로기는 한 인간과 그의 시대를 읽기에 너무 거칠고 편협한 잣대이다. 그런 일차원적 척도로는 인류나 문화와 역사 같은 거시적이고 심층적인 것들의 양과 질을 가늠하기에 역부족이다.
우륵의 선택을 변별하는 가늠자의 한쪽은 소리의 절대 경지를 지향하는 예술혼이어야 할 것이다. 여러 고을의 경계를 넘나들며 금(琴)을 수집하여 자신의 마음(心琴)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 내려던 모습이나 악기 울림통에 비치는 미세한 변화에도 촉각을 곤두세우며 최상의 소리에 집착하던 그를 읽어 내려면 말이다. 가늠자의 다른 한편은 자신과 타자를 아우르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연민의 깊이여야 한다. "소리는 미루지 못하고 머뭇거리지 못한다. 목숨 또한 그러하다." 고 하며 가야왕의 장례에서 순장을 모면한 아라를 붙들고 악머구리 같은 울음을 우는 우륵이기에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는 유미적 예술지상주의자이자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을 터득한 인본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리는 결국 좁디좁은 고을을 넘고 얕디얕은 인간의 분별력을 넘어 온 세상을 아우르는 소리가 되었다. 사마귀도 움직이고 나라들마저도 울리는 살아있는 소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륵은 순결한 칼을 지켰던 이사부나 수준 높은 철기 문명을 선도했던 야로보다 더 광범하고 심층적인 내면을 지녔고 또 그것이 자연스레 우러나와 예술적 완성과 인간 사랑을 지향했고 실천했던 거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목숨과 이익을 위해 구차하게 변절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훈은 이렇듯 간곡한 정서와 문체로 저급한 인간들의 단선적인 폄훼에서 그를 복권시켰다. 이 작품을 통해 김훈은 우리에게 한 인간과 그의 시대와 문화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