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2010년 새해 독서계획을 알려주세요. 적립금 100만원을 쏩니다!

워낙 두서없는 사람이라 책 읽는 것도 맘 닿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당기면 읽고 식상해지면 밀쳐두고 한답니다. 그러니 결정적인 타이밍을 놓치고 뒤늦게 후회막급이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지요. 하여 늘 이래서는 안 된다. 좀 더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꼼꼼하게 읽어야지 하고 마음먹어 보지만 언제나 실천이 문제랍니다. 올 2010년에도 나름의 계획을 세워 보았는데 어떨는지 걱정이 앞섭니다.  

올해는 우선 책 읽는 즐거움부터 누려보려 합니다. 뚜렷한 목적 없이도 읽는 자체에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게 독서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요? 하여 문학과 예술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즐겁게 서핑할 수 있는 책들을 먼저 골라 봤습니다. 그런 다음 머리가 데워지면 깊은 상념을 요하는 의미 추구형 책 읽기를 시도해볼까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책 읽는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게 소설 장르이지요.  그래서 1, 2월엔 정이현의 <너는 모른다>와 김선우의 <캔들 플라워> 등 스토리 라인도 재미 있고 나름의 주제의식도 투철한 작품에 도전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미뤄두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도 독파할 생각입니다. 읽어본 지인들이 1200여 쪽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잘 읽힌다 하니 믿고 읽어볼랍니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올 때까지 한결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두뇌에 워엄 업이 되었다면 3,4월엔 삶의 의미를 반추해볼 수 있는 책들을 골라 내면을 좀 더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야 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먼저 조한알이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 님의 글과 서화를 모은 책 한권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을 읽어보려 합니다. 짧은 글과 그림이니 통독보다는 한 꼭지씩 음미하며 새겨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활과 내면을 비쳐보아야겠지요.

  

또 고전도 한 권,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통해 동양 고전의 진수를 맛보며 그 교훈을 오늘에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시적인 뉘앙스가 한껏 깔린 멋진 잠언집을 발견하였는데 바로 김소연의 <마음사전>입니다. 그 중 몇 편을 골라 오래 숙고하며 마음으로 읽고 싶습니다.
 

또 의미함축적이어서 발산적 사고를 유발하기에 적합한 것이 시 아닐까요? 마종기 님의 시선집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을 천천히 소리내어 또박또박 읽어보겠습니다. 삶의 의미, 모국어의 존귀함을 맘껏 느껴 보려고요.

 

한동안 심각한 주제에 골몰했다면 5,6월엔 마음을 풀고 가벼이 즐기는 취미 생활편. 기타 연주 이론서 몇 권을 통해 주법의 기본기를 익히고 어설픈 연주나마 시도해볼까 합니다. 잘 하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들려줄 수도 있겠지요.

우선 이정선 기타교실 중 맘에 드는 곡의 악보가 곁들여진 몇 권을 구입하여 연주해보겠습니다.

 
또 아르페지오에 관한 기타 교본도 구입할 예정이다. <포인트 기타 교본>이 적합할 듯 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시의적절한 책들을 골라 읽어볼겁니다. 하나 하나 다 꼽지는 못해도 말입니다. 하여 이 계획은 최소한의 독서 방침이라 하겠습니다. 플러스 알파는 전처럼 마음 결 닿는 대로.그리고 이 계획을 잘 실천한 다음 보완할 것을 챙겨서 하반기 계획 수립 시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0년 02월 05일에 저장

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10년 02월 05일에 저장
품절

1Q84 1- 4月-6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14,800원 → 13,320원(10%할인) / 마일리지 74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2월 05일에 저장

1Q84 2- 7月-9月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14,800원 → 13,320원(10%할인) / 마일리지 74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10년 02월 05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얽히고설킨 미스터리로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우리 사회의 그늘에 대해 성찰 가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모르겠다. 인물의 정체도, 사건의 실상도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 이 가족에게 페르소나의 가면을 벗고 서로 맨얼굴로 대면하며 소통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 보이니 외형만 갖고는 도무지 진단 불가랄 밖에. 공교하게 숨어 가식과 위악의 몸짓으로 다만 관망하고 있을 뿐인 그들이니까 말이다. 심지어 어린 유지의 내면조차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이 가족의 정서적 유대감은 선을 넘어버렸던 것. 하여 읽어내질 못하겠다. 이 가족의 진면목을, 아니 작가의 의도를.

1. 작가 정이현에 대해 제대로 몰랐다.

전작을 통해 각인된 정이현의 이미지는 시대의 트랜드를 반영하는 쿨한 작가라는 정도였다. 게으름과 무지로 인해 그녀의 진면목을 제대로 접해보고 알아채지 못한 탓이 크겠지만 내 감식안으로는 그런 범주와 위상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너는 모른다> 초반부까지만 해도 예의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아 약간 식상한 감마저 들었다 할까. 스피디한 전개에다 나긋나긋 잘 읽히는 문체가 시종여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어느 순간 갑자기 멈칫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익사 사건의 실마리라곤 조그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는 와중에 느닷없이 유지의 실종 사건까지 발생하여 스토리 라인이 더욱 난마처럼 꼬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도 뚜렷한 암시 하나 없이 뚜벅뚜벅 나아가는 게 너무 막막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으면 우리의 뇌가 겉도는 법. 하여 정말 모르겠다고 되뇌며 간신히 읽어내고 있는데 어느 순간 작가가 내미는 손이 얼핏 보였던 것 같다. 그 복잡다단한 일들의 실마리를 하나하나 정교한 퍼즐의 형태로 슬몃슬몃 건네주고 있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를 조금씩 짜 맞춰 나가다 보니 이럴 수가, 어느새 윤곽이 얼비치는 게 아닌가. 인물들을 한 사람씩 불러내어 과거와 현재를 톺아보는 가운데 그들의 정체도, 그와 관련된 사건의 실상도 서서히 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빨려들듯 몰입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작가의 손이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절감하게 되었다. 곳곳에 반전을 예감하는 장치를 절묘하게 숨겨두어 긴장을 고조시키면서도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시적인 문장으로 따뜻하게 다가오고 있어 어느새 마음으로 다가가 작가의 심경을 고스란히 따라 읽게끔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가 이 정도 내공을 지니고 있을지 그동안 정말 까맣게 몰랐다.
 

2. 김상호 가족에 대해 도무지 모르겠다. 

방배동 서래마을 하이밸리 김상호 가족은 겉으론 평온해보이지만 속을 조금만 헤집어 보면 퍼뜩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여있고, 일견 해체 일보 직전까지 이른 것 같기도 하다. 하여 그들 가족에 대해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할밖에. 그런데 작가가 인물과 사건별로 하나씩 제시하는 퍼즐을 맞춰나갈수록 이미지가 서서히 그려지며 파편화된 듯 여겨지던 개별적 자아와 그들의 집합인 가족의 실상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할까. 아버지 김상호로부터 배다른 막내 유지에 이르기까지 그들 가족 모두는 자신의 영역 구획을 너무 높게 해버린 극단적 단독자들이었다. 다른 가족 구성원에 대해선 비밀번호 설정 여부도 모를 정도였고 대체 무슨 고민에 빠져 있는지 가늠하지조차 못해 다만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낼 뿐이었다. 

우선 아버지 김상호와 어머니 진옥영. 늘 삐걱대는 이들에게서 정겨운 가족의 모습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는 지경이라 하겠다. 하여 사설탐정 문영광은 수첩에다가 ‘의뢰인 부부 사이를 파악할 것’이라고 메모할 정도였다.

“무디게 갈린 얼음처럼 식탁 위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의 아버지 김상호는 아내 진옥영과 아침 내내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밥을 먹는 김상호의 동작은 사뭇 기계적이었다. 젓가락을 놀려 반찬을 집을 때나 어금니를 그것을 씹을 때도 아내와 자식들이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무엇엔가 단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그것을 드러내려는 의도가 너무나 역력해서 도리에 그 자리에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잊힐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10-11쪽)

새엄마와 혜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자분자분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어딜 가는지 얼마 동안 집을 비우는지 피차 밝히지도 묻지도 않았다. 수년에 걸쳐 성립되어 온 일종의 암묵적 규칙이었다.”(12쪽) 

혜성은 겉으론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범생이지만 내면에 울화를 늘 억누르고 있다가 결정적으로 폭발할 지경에 이르면 차량 방화를 통해 이를 해소하곤 하는 일탈자였다. 또 명문대 의예과에 입학하였지만 학업도 포기하고 말았고. 

은성은 좀 더 심한 경우라 하겠다. 애정 결핍이다 보니 매사에 삐딱이였고 늘 집착할 대상에 몰입하는 가엾은 아이였다. 거쳐 간 이들도 사기꾼에다, 학원 강사 심지어 유지 수사를 맡은 사설탐정 문영광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는데 하나같이 처참한 파탄으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니 사귀던 남자에게서 내가 본 최고의 미친년이라는 소리까지 들을 밖에. 

유지에 대해선 다들 착하고 얌전한 막내딸로만 여겼지 그 내면에 벌써부터 트라우마가 중첩되어 있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짱깨의 딸이라 놀림 받고, 초등학교에선 세컨드 소생이라는 소문으로 친구들에게 외면당한 아이였으니 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고 지레 짐작해버릴 밖에. 하여 할 말이 있어도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작은 어금니로 그냥 오독오독 깨물어버릴 정도로 삭이곤 했던 것. 그러니 도피기제가 발동하여 실재하는 세계는 허상으로 보고 오히려 가상의 공간, 혼자만의 영역으로 깊이 침잠하고 만 것이다. 그런 선택의 일단이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하울카와 내밀한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진옥영의 연인 밍. 그는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국외자, 이방인이었다. 김상호 가족에 속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한국인도 대만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그러면서 바람처럼 자유롭게 자발적 고립의 길을 택한 자였다.

이런 하나하나의 모습만 놓고 보면 그들도 한때 인간 본연의 순수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뽀얀 얼굴의 천사였다는 걸 도무지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유지의 실종 사건은 이런 김상호 가정의 터닝 포인트였다. 막내의 실종이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 혼자만의 꼬치 속에 똬리 틀고 있던 개별적 자아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숨겨왔던 내면의 그 보드라운 진면목이 슬몃 고개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되니 다른 이들도 자신 못지않게 버거운 짐을 부여잡고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으며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간신히 숨기고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고. 그 과정을 거치며 이제 김상호 가족은 서서히 화해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언젠가는 환자용 침대에 누워 잠든 아이를 들여다보다가 작은 탄성을 뱉어내기도 했다. 얘가 이렇게 예쁜 애였구나.”(484쪽)

마음의 문을 가장 굳게 닫아걸고 있던 은성마저 유지를 보고 이렇게 감격하며 목욕을 시키고 숟가락으로 죽을 떠먹이는 등 정성스레 돌보는 일을 기꺼이 맡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런 소중한 발견을 위해서는 대가가 없을 수 없는 법. 희생 제물은 불가피한 통과의례였다 하겠다.

3. 한국 사회가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너는 모른다>를 통해 한국 사회가 정말 불가해한 곳이라는 걸 새삼 절감했다. 김상호 가족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아주 특별한 얘기만은 아닐 듯하다. 우리 삶이 온통 천민자본주의 근성으로 물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장기를 밀매하고 경찰력을 대신하여 사설탐정에게 유괴 의심 사건의 해결을 맡길 수 있으며, 불법 도청과 정보 유출이 가능했겠는가? 그건 오로지 돈의 힘이 최고의 권력인 시대니까 공공연히 시도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또 하나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가해지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과 배제가 우리 사회에서 일상화된 모습도 읽을 수 있었다. 그것도 심해도 너무 심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가부장이 아내와 아이들 위에 가공할 권력으로 군림하는 모습하며, 다른 민족 구성원에게 이유 없이 가하는 집단적 따돌림 등 한국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아프게 확인했던 것이다. 특히 화교들이 이 정도로 고통 받고 이처럼 깊은 상처를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 늘 의심받으며 어떤 집단에도 선뜻 끼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예외적 존재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다. 오죽하면 밍과 옥영이 남태평양 어디쯤에 섬 하나를 사서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을까.

“그들은 단박에 서로의 고향을 알아보았다. 아무리 감추려 애써도, 그들의 발음에선 산둥성 악센트와 한국어 악센트가 독특하게 뒤섞여 묻어났다.”(55쪽)

“2008년의 옥영이 창밖을 바라보며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그렇지 한국 여자들만 빼고. 그러네 정말, 그런데 나는? 내가 한국 여잔가? 밍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중국 여자는 아니잖아.”(57쪽)

이렇게 천민자본주의의 포로가 되어 불법, 탈법을 일상적으로 저지르고 있으니 합법적인 시스템에 의한 사건 해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거고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인 화교가 개입된 사건이었으니 해법을 찾기가 오리무중이었다 하겠다. 놀랍고도 안타까운 우리의 참 모습에 진저리칠 밖에.

4. 그리고 삶에 대해 정말 모르겠다.

삶이 왜 그리 어렵고 팍팍한지 모르겠다. 김상호 가족이 하나 같이 까칠하고 서로 부대끼는 것은 그만큼 그들 각자의 삶이 인내의 한계를 넘나들 정도로 힘겹다는 반증이 아닐까? 그러니 이런 약육강식의 살벌한 무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때론 길들여진 사회적 자아, 페르소나의 가면 뒤로 교묘하게 숨고, 더러는 위악을 행하며 자신의 두려움을 위장하곤 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리라.

장기 밀매 브로커로 인간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은 노예상인 아버지, 그의 내면에선 얼마나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겠는가? 페르소나로 두껍게 위장하고 애써 태연한 척 해보지만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실종되었는데도 두려움에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사설탐정에게 의뢰할 정도였으니까. 그 막막함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부분의 직업인들처럼 그도 자신의 생업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모든 기본적 업무들이 다 법적인 테두리 밖에서 진행되므로 받게 되는 업무 스트레스의 강도가 특히 두드러졌다. 만약 이 세상의 모든 직업군을 다만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누어야 한다면 자신이 어디에 속하게 될지 김상호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수치스런 행위로 치부당하기에는 억울한 것도 사실이었다.”(279쪽)

위악은 자신에게 닥친 외부의 자극을 어떻게 방어해야 좋을지 모를 때에 행해지는 안쓰러운 폭력이다. 늘 거부당하는 환경 속에서 쩔쩔매다 주눅이 들게 되면, 욕망하는 바를 표출하지 못하고 꾹 눌러 억압해두었다가 엉뚱한 상황에서 낯선 방식으로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은성이 한 때의 연인 스티브가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벽거울에 이마를 찧어 피가 흐를 정도로 자신을 학대한 것처럼 말이다. 차량 방화로 스트레스를 풀던 혜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여 억지로 악을 행하는 이들의 내면을 한 꺼풀만 벗겨 봐도 여리디 여린 속살이 오롯 들어차 있는 걸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세상은 외면만 보고 미친년이라고, 소년 방화범이라고 금방 낙인찍어버리니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될밖에. 하여 삶은 마냥 고달파지고 타인의 배제는 한층 노골화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일 게다. 이 안쓰러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그건 결국 각자가 스스로를 이겨내어야 할 것인데 그 과정에 외생적 계기가 주어진다면 긍정적 자극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상호 가족의 경우는 유지의 실종이라는 불행이 닥쳐옴으로써 다들 위악의 몸짓을 거두고 본래의 그 선한 얼굴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리라. 생의 비의가 놀랍다.

5. 퍼즐 속 숨은 그림을 발견하다.

작가가 건네준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다 보니 완성된 퍼즐의 배경으로 슬몃 숨은 그림이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실눈으로 가늠해보니 그건 가족 구성원 모두가 하나같이 따뜻하고 반듯한 인간의 품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모습이었다. 본연의 뽀얀 얼굴로 서로에게 연민과 위로의 눈짓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다들 이랬구나 하는 경탄이 절로 나왔다. 그걸 모르고 그렇게들 먼길을 돌아왔다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하여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김상호 가족의 순수한 면모를, 아니 이를 고스란히 그려낸 작가 정이현의 심경과 역량을 말이다. 정이현은 얽히고설킨 사건과 관계의 실마리를 퍼즐 조각 하나하나 마다에 담아 이를 긴 호흡으로 일관되게 엮어내어 어느새 선명한 이미지로 살려내었던 것이다. 그 도저한 내공이라니. 그리고 퍼즐의 단순 조합을 넘어 숨은 그림을 깔아두기까지 하였다. 그런 정이현을 따라 가다보니 가면을 쓰고 위악을 일삼던 김상호 가족의 진면목도, 유지 실종과 익사 사건의 실체도 또렷이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따뜻한, 아니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 방식이 비록 서툴고 거칠었으며 때론 위악적인 모습이었다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이제 유지를 다시 찾고 아버지 면회도 다니게 되면서 그런 방식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는데 그들이 갑자기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뽀얀 얼굴의 천사, 방배동 서래마을 하이밸리 김상호네 가족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의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세계의 끝 여자친구. 87쪽) 

1. 끝이라니, 거기가 도대체 어디 

세계라는 게 만약 끝이 있다면, 그 경계선 안쪽에 머물러 있건, 끝을 지나 세계 바깥쪽까지 일탈했건 어느 경우나 슬픈 일일 것이다. 경계선 내에 있는 자는 자기에게 부여된 좁디좁은 세계를 탓하며 그런 세계관을 강요한 측을 원망하고 그러면서도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할 것이며, 끝을 지나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던 세계를 벗어났다면 일탈을 방임한 측의 무책임을 탓하며 때론 세계 안의 안락함을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사고 과정이나 정서적 반응은 세계의 끝에 이르거나 더 나아가 한계를 넘기까지 해보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끝이 무엇인지 또렷이 보이고, 끝까지 치달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성찰하며 안과 밖 두 세계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끝을 본 사람은 삼나무 우듬지에 오른 까마귀처럼 이제 다시는 뜰로 내려앉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의 끝이라니, 도대체 어떤 지점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사회의 분위기나 개인적 역량의 차이에 따라 다르게 지각될 것이다. 얼마나 관대하게 구성원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지, 혹은 감성의 울림에 공감하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심성의 두께와 경험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오차의 범위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끝이란 바로 그 사회의 규범이 허용하는 한계를 구획하는 선, 넘는 순간 가해질 지탄을 개인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분량의 최대치가 아닐까. 

우리 사회는 너무나 편협한 세계관을 강요하고 있다. 약간의 변주와 일탈도 용납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유로운 영혼들의 서식처로는 지극히 부적합한 환경일밖에. 세계가 이런 지경인데 감성까지 작은 떨림에도 울림이 깊게 스며든다면 그의 아픔은 극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들은 또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예민한 촉수를 뻗고 있으므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천부적으로 이끌리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랑은 온 생애를 건 것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서 어찌 흔들리지 않겠는가? 하여 그들은 누구보다 쉽게 세계의 끝에 이르고 때론 그 선을 넘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더러는 죽음으로 삶을 마감하거나 이혼으로 또는 연인과의 사랑을 일거에 접어버리는 방식 등으로 말이다. 그들에게 세계의 끝은 상심을 넘어 절망으로 다가올 것이다. 믿었던 것들이 하나 남김없이 무너지는 그 순간, 세계의 끝이라는 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니까. 

하여 끝이란 게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끝에 직면했다는 건 생의 근원을 뒤흔드는 뼈저린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만약 세계의 끝이 없다면, 생의 어떤 임계치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한번이라도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삶이 이리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겠는가. 너무 아픈 사랑이었다 해도 그게 사랑이 분명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면, 끝 모르고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사랑의 실체가 온전히 도드라지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하여 진정한 사랑은 갈 데 까지 나아가 끝에 이르러야만 제대로 판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온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실감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사랑의 실체를 파악하고 다시 세계 안으로 돌아오게끔 가리키는 이정표인 셈이다.

2.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끝에 이르는 과정에서 치르는 아픔은 겪지 아니한 자의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정도로 고통스런 일이다. 하여 이건 도무지 사랑이 아니야 하며, 아예 사랑의 근원을 부정하기도 한다. 

체르니 40번을 친다는 건 고통 없이 플랫과 샵이 네 개 이상 달린 악보를 읽는다는 뜻이거든.
고통이라고 말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린다. 그건 힘들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힘든 건 마음이 힘든 거고, 고통은 몸이 고통스러운 거 아닐까?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고통이겠지. 그치? 손가락이 아파서 건반을 두드릴 수가 없었으니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6쪽)

피아노 연주의 고통을 통하여 삶의 힘겨움을 말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 처연하여 가슴이 저려온다.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는 이런 아픈 얘기들로 빼곡하다. 사랑하는 연인 케이케이를 잃고 그와 인연이 있는 모든 것에 탐닉하거나, 헤어진 연인과 이름이 같은 할머니에게 끌려 그의 사랑하는 제자 대역을 해 주는 남자, 영화감독의 꿈을 접고 택시운전수가 된 연인을 잊지 못하여 위성처럼 그 주위를 배회하는 서른 즈음의 여자이거나, 곁에 있어도 정서적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단절되어 버린 부부, 문화혁명 기간 중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그에 대한 얘기만을 평생 다른 버전으로 만들고 있는 노인의 사랑 얘기 같이 너무 절절하고 아픈 사랑만 그리고 있어 세계의 끝이 어떤 건지 다양한 변주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그 곡은 때론 비장하고 더러는 도무지 읽어낼 수 없는 경계를 오르내리고 있다.

3. 아무리 아파도 사랑은 사랑인 법

그러나 그 사랑은 하나 같이 뜨겁게 불살라 결국은 끝을 보고야 말았다. 미련 없이 에너지를 소진해버린 것이다. 하여 타버린 불씨만이 남은 지금 그들은 이제 고요해진 상태다. 그리고 추억한다. 그것은 자신이 사랑에 지폈던 시절이거나 절망에 이르게 했던 이에 대한 것이다. 불꽃처럼 세계의 끝, 사랑의 절정에 이르렀던 그 순간은 비록 “짧은 눈부심만 뒤에 남기고” 사라져버렸지만 지금 돌이키건대 “긴 기다림만 여기 남기고” 있다. (김광석 노래 <회귀> 중에서)

하여 작가는 말하고 있다. 제발 좀 돌아보라고. 그리고 이제 얘기 한번 해 보라고 채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삶이 정리되고 비로소 그 시절 세계의 끝까지 막무가내로 치닫던 자신의 모습이 안개 걷히듯 또렷하게 보일 것이라고 말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모든 삶은 고귀한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거라며 달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세상이 끝났다고 여길 정도로 막막한 순간에 처하면 일체의 이성적 판단은 작동 중지되고 악에 북받쳐 분노에 눈이 멀고 만다. 자연 파괴와 자학이 뒤따를 수밖에. 이럴 땐 끝에 이르게 된 과정을 꼼꼼히 복기해보는 게 우선일 것이다. 물론 마음 엄청 추슬러야 하고 세월도 훌쩍 지나가야 가능 하겠지만 말이다. 그때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에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게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세계의 끝 여자친구. 81쪽) 

그리고 세계의 끝에 이르렀던 과정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말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대화라는 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상황 정리가 이루어져야 소통 가능한 것이므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일의 실체를 냉정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심경의 내밀한 구석까지 얘기하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까 말이다. 끝났다고 여겼던 일을 얘기하는 가운데 스스로 흐름을 읽게 되고 자연스레 맺혔던 응어리가 누그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이야기들이고 서로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별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각자 고독하게 달로 가지 않고 모두 함께 복된 새해를 맞이할 수 있으려면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리 올리버가 가르쳐준 대로 말이다.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는 동안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312쪽)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315쪽)

그때 비로소 타인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 대한 성찰로 바꿀 수 있고 그 순간 상대방의 처지와 심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자각이 일어나며 분노와 원망이 연민과 공감으로 화하게 된다. 용서와 화해도 그 지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이제 홀가분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과거의 족쇄에서 놓여나게 되었으니까. 

차가운 바다. 차가운 운하, 차가운 웅덩이. 그렇게 차가운 물에 둘러싸인 나는, 또한 따뜻한 그녀 안에 머물던 나는,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 그리고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중에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도 있었으나, 기억하지 않아도 좋을 것들이 더 많았다.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124쪽)

4. 그러니 세상은 아직 살아볼만한 곳이 아닐까.

세계의 끝, 그 절망의 지점에 이른 자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아니 돌아온 자만이 끝에 대해 알게 된다. 절망에 휘둘려 삶의 끝에 이른 자는 세계의 끝을 결국 알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돌아온 자는 이제 일상의 가벼운 것들에는 전혀 요동치 않게 된다. 삼나무 우듬지까지 올라가 보았으니 하찮은 것들에 눈길 돌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여 분노는 수그러들고 이제 오히려 그 시절이 아름답게까지 보이게 된다. 그것을 추동력으로 삼아 이제 현실로 당당하게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198쪽)

하여 김연수는 경계선의 작가라 하겠다. 세계의 끝 그 언저리에서 서성대는 우리에게 결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말았다. 바람이 사위어진 다음 비로소 경계였음이 드러난다는 걸 명료하게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끝을 넘지 말라고, 넘었거든 속히 돌아오라고 간절하게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아니 짐짓 들리지 않는 척 백수광부마냥 그예 넘고 말곤 한다. 하니 지금 막 선을 넘으려는 자에게 김연수는 하나의 구원이 될 것이다. 아픔을 딛고 응어리를 풀고 세상 한가운데로 돌아온 이들을 보여줌으로써 말이다.

절망의 지점, 세계의 끝에 이르러 지상의 고통을 맛보았던 자는 이제 돌아와 다시 세계의 한 가운데 설 수 있게 된다. 그 힘은 세계의 끝, 절정의 순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 하니 세상 모든 일들이 여유로워지고 이제 그 절망의 순간들에 대해서도 매혹적이고 경이로우며 고귀한 의미로 차득 차 있었다고 아름답게 추억하며 얘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하여 세계의 끝은 절망의 지점이지만 또한 희망과 구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김연수는 말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V의 역기능을 부풀려 ‘바보상자’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지만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용하고도 신선한 몇몇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면 그 말이 무색해지곤 한답니다. 나의 채널 선택권을 앗아가 버린 그런 것들 가운데는 괜찮은 토크쇼가 꽤 있습니다. 그런데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MC의 역할이 거의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얼 맡겨도, 어떤 빈약한 소재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만족스런 결과를 낳는 MC가 있다는 거죠. 한결같이 미덥고 맡는 것 마다 품질이 보장되는 그런 진행자라면 PD보다 먼저 눈 밝은 시청자들이 알아보겠지요.
 

그런 이들 가운데 군계일학이랄까, 요즘 강호동을 빼면 더 이상 꼽을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강호동은 프로그램을 원만하게 진행하는 우아한 MC이기도 하지만 거의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남성성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말 그대로의 남자이기도 하여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답니다. 뽀샵없는 날 것 그대로의 야성미 넘치는 모습에서 본연의 남자다움을 새삼 확인하곤 불끈 주먹을 쥐는 남자들도 꽤 있을걸요. 쉴 새 없이 강력한 포스가 작렬하는 통에 시청자들은 어느새 빨려들고 말게 되지요. 그런데 기를 너무 세게 내뿜어서인지 초대받은 패널이 묻히는 일도 가끔 있더라고요. 특히 <무릎팍 도사>에선 무속인 캐릭터로 분장하여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한동안 능글능글 약을 올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고함을 버럭 지르며 온몸을 내던지곤 하여 심약한 패널 가운덴 기겁을 하고 까무룩 정신 줄을 놓는 지경에 이르는 이들도 있답니다. 그런데 이런 강호동을 순하디 순한 어린 양, 속칭 초식남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을 최근에 목격했습니다.

바로 비야 님 앞에서 말이지요. 그것도 판정패 정도가 아니라 깨끗이 완패를 시인해야 할 정도로요. 오랜 기간 긴급구호팀장으로 활약하던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새로운 트랙에 막 오르고자 하는 비야 님이 미국 유학 전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며 출국 인사 겸해서 출연한 순서였지요. 그런데 그만 공격 본능으로 이글거리는 야성미의 화신, 육식남 강호동을 보기 좋게 순치시켜버린 겁니다. 완벽한 무장해제 말입니다. 너무 의외여서 이 무슨 황당한 시추에이션일까 곰곰 따져보았습니다. 강호동의 가식일까, 어쩜 설정은 아닐까 하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무지 그건 아니었습니다. 한 눈에 진정성이 느껴졌으니까요.
 

곧 그건 지고지순한 사랑 앞에 고꾸라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계산 없는 순수한 사랑 앞에 세상 논리도 동물적 공격 본능도 눈 녹듯 사라지고 본연의 인간적인 면모, 어린 양 같이 보드라운 모습이 되고 말았다는 거죠.

사랑은 정말 놀라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강호동을 초식남으로 바꿔버린 정도는 약과이지요. 아 글쎄! 하나님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동을 먹었는지 몇 번이나 기도 응답을 해 주시고 또 동행하며 지켜주기까지 했으니까요. 빙하 크레바스에 빠지기 직전 뒤로 잡아당겨 넘어뜨린 손길을 얘기할 때 얼마나 아찔하면서도 흐뭇하던지요. 파키스탄 군인들도 종교가 다르고 본 적도 없는 외지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기꺼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의탁하기까지 했고요, 지진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해 나와 있던 보석상, 변호사들도 비야 님의 사랑에 감전된 듯 앞뒤 재지 않고 선뜻 짐꾼을 자청하여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지경으로 이끌기도 했지요. 심지어 고생 모르고 귀하게만 자랐던 부잣집 아들 이샴조차 건강도 돌보지 않고 난생 처음 겪는 험한 일을 묵묵히 해나가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무의식중에 실천해보이기도 했는데 그게 다 비야 님의 사랑의 자장에 휩싸인 이들에게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모습이거든요. 과연 사랑의 힘은 높고도 크다 하겠습니다.

한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는 말이 회자되곤 했지요.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들의 절박한 사정에 관심을 가질리 없으니 뻔히 보고도 그들의 처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밖에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런 사랑의 결핍과 무관심을 은유한 작품 아닐까요. 그런데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비야 님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배우고 또 마음으로 따라하다 보니 이제 겨우 색맹은 면하게 된 것 같아 여간 뿌듯한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비야 님의 그 도저한 사랑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는 의문이 종종 들었답니다. 사랑의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고 넘치게 된 데는 분명 연유가 있을 테니까요. 먼저 꼽아본 게 지식에서, 아니 그건 앞뒤가 한참 바뀐 것 같았답니다. 사랑해야 알게 된다 했으니까요. 지식은 충만한데 메마른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처해 있는 입장 때문에, 그건 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직책에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이처럼 영혼을 바쳐 몸과 맘이 혼연일체가 되게 몰입하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비야 님의 그 결곡하고 넘치는 사랑은 천부적으로 발달된 감성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까 하는 쪽으로 좁혀지더라고요. 유난히 민감하고 울림이 깊은 심성이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의 떨림에 공명(共鳴)할 밖에요. 그러니 자연스레 사랑의 눈길을 기울이고 가슴과 손발로 다가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건 비야 님이 시를 좋아하고 또 분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는 걸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 시인의 그 짧은 시에서 많은 의미를 떠올리며 감흥의 여운을 즐기는 모습이라니. 또 ‘슬픈 사람들에겐 / 너무 큰 소리로 말하지 말아요 / 눈으로 전하고 / 가끔은 손 잡아주고 / 들키지 않게 / 꾸준히 기도해 주어요’라는 이해인 시인의 <슬픈 사람들에겐>을 읽고 가슴 울렁거리는 대목에선 아! 비야 님의 감성지수가 바로 이 정도로구나. 초민감 센서를 장착하고 있구나 하고 무릎을 치고 말았답니다.

또 비야 님 스스로 꼽은 좋은 습관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게 칭찬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거라 했죠. 그게 다 감정이입이 쉬 이뤄질 수 있는, 그래서 자신이나 타인에게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거든요. 글쎄 자신을 후원금 모으러 다니는 앵벌이라고까지 스스럼없이 말할 정도로 흉허물 없이 대하는데 누가 가슴을 열고 비야 님과 하나가 되어 그 사랑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가슴이 부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반응할 줄 아는 센서가 유난히 발달한, 그리고 그것을 늘 긍정적인 쪽으로 자동 변환시키는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는 비야 님이기에 매사에 거리낌 없이 솔직하고 사랑이 흘러넘칠 밖에요.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올레(olleh)! 하고 외치게 된답니다. 가슴에서 비롯된 따뜻하고 진실한 사랑을 확인하고 만끽하게 해 준 비야 님 만세(Biya)!

비야 님의 사랑은 또 깊은 영성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기도가 응답되는 복도 받고 싶지만 자신이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 응답이 되는 복 또한 한껏 누리고 싶다는 비야 님의 고백에서 영성의 깊이를 알 수 있었거든요. 언감생심 복의 원천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복을 전달해주는 통로는 꼭 되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정말 울컥했답니다. 고통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응답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그 결곡하고 심원한 영성 앞에 내 얕디얕은 영적 감수성이 그만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아 일순 부끄러움도 밀려왔고요. 신앙인이라 하지만 영적인 떨림에 얼마나 민감하게 촉수를 뻗어 반응을 보여 왔는지 돌아볼 때마다 늘 민망할 지경이었는데 비야 님 앞에서는 더욱 초라하게 왜소해지고 만 듯하여 자괴감에 빠질 정도였답니다. 비야 님은 또 복이 들어와 쌓이는 종착역이 아니라 들어와 쌓인 복이 골고루 나눠지는 환승역이 되고 싶다고 했죠. 사랑과 평화의 도구로 말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저는 늘 제 이익과 안일만 간구하는, 그리하여 복이 제게 머물기만 바라왔다는 생각에 뜨끔해졌답니다. 신앙을 복 받는 수단으로 삼은 셈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이젠 어디 가서 감히 신앙인이라고 입도 뻥끗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런 좀비 같은 자를 어디에 쓸 수 있을는지 하나님도 골치깨나 아프실 걸요.
 

그렇게 깊은 영성을 지녔으니 감사할 수 없는 것까지 감사하는 성숙한 기도를 구호 현장에서 드리며 시종일관 사랑의 메신저가 되었던 것이겠지요. 눈에 보이는 은총은 물론 고통으로 가장한 은총까지 알아챌 정도였으니. 이 부분을 읽다가 불현듯 교회 목사님들이 <그건 사랑이었네>를 꼭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핏대 올리며 불신 지옥만 외칠 게 아니라 사랑이 뭔지,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어떤 경로로 순환되는지, 그리고 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은 또 얼마나 중요한지 비야 님께 좀 배우셨으면 해서요. 그러면 세상 어디에서나 환영받을 수 있을 건데. 빛과 소금의 역할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닌데 말입니다.

비야 님의 사랑은 또 주변 뭇사람들과의 인연의 연쇄에서 비롯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관계의 망, 그 네트워크가 어찌나 촘촘하게 잘 짜여 있던지. 비야 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듬뿍 사랑을 안겨주며 뭐든지 밀어주는 이들이 끊임없이 중보의 기도를 올리고, 108배를, 또 묵주신공을 드리니 어찌 하늘이 비야 님을 보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비야 님을 에워싸고 있는 이들의 깊고 절절한 사랑이 어떻게 비야 님에게 감염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늘 멘토가 되어주는 친구 수녀님, 외모에다 내면의 깊이까지 곁들인 첫사랑 남자 동창생, 실연의 상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던 대학 은사님, 그리고 칭찬과 배려를 아끼지 않던 부모님까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기에 좌충우돌하는 비야 님의 파격적인 행보도 결국은 사랑스런 결말로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버팀목이자 보호막이 한결같이 애정 어린 눈길로 보살피고 있다는 걸 알기에 얼마쯤의 일탈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거고요.

사랑은 받아 본 자만이 느낄 수 있고 또 베풀 수 있는 거라고 했지요. 비야 님의 곡진한 사랑도 결국은 비야 님께 사랑을 베풀던 분들에게서 옮겨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가식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받게 되면 가시 같이 건드리기만 해도 아픈 상처가 어느새 은은한 향기를 발하는 향주머니로 바뀔 정도니까요. 그러니 비야 님도 실은 사랑의 빚을 듬뿍 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걸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갚고 있는 거고요.

하여 민감한 감성에다 깊은 영성, 그리고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주기만 하는 이들로 겹겹이 에워싸인 관계 망에서 비롯된 그 사랑이 긴급 구호 현장으로 달려가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베풀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공유하며 희망을 꿈꿀 수 있게끔 이끌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야 님은 늘 한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젊은이 같은 싱그러운 이미지로 다가오곤 한답니다. 이번에 또 변신을 시도하려 하고 있지요. 현장 실무 경험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쌓으려 미국 유학의 길에 나서니 말입니다. 보나마나 어려운 여건에 힘겨운 과정이 가로놓여 있겠지만 늘 긍정적 에너지가 흘러 넘치고 스스로를 행복 발전소로 여기는 비야 님이기에 이 도전도 너끈히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발랄하고 도전적인 화두를 던지는 비야 님을 가까이에서 뵐 수 없다는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곧 환하게 웃으며 짠 하고 나타날 줄 알기에 기다린다는 게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듯도 합니다. 못내 섭섭하기는 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하여 비야 님의 그 사랑이 한결 더 성숙하고 깊어져서 어려운 이들을 전폭적으로 보듬어줄 수 있게 될 것이기에 기꺼이 마음 추스르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 남은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비야 님을 위해 중보 기도의 화살을 쏘아 올리는 일밖에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기도가 모인 사랑의 저수지에 한 모금 물이라도 더 보탤 수 있었으면 해서요. 남을 위해 기도해본 게 참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기도를 통해 오히려 제가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그건 사랑이었네>를 통해 터득한 이치지요. 이런 값진 의미를 발견하고 또 사랑의 기를 팍팍 받는 기쁨을 누리게 해 준 비야 님께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습니다. 이제 저도 그 빚을 다른 이들에게 갚아야 되겠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