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유럽사 - 유럽을 만든 200년의 이야기
데이비드 메이슨 지음, 김승완 옮김 / 사월의책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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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유럽 하면 안정된 이미지부터 연상한다. 정치 체제의 정비부터 경제적 성취에 복지까지 겸비한 그야말로 이상향, 유토피아를 떠올린다. 그러니 급속한 사회 변동보다는 기존의 체제가 무한정 이어져 역동성이 떨어지는 정체된 곳이라 여기기 십상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근대 이후 유럽은 질풍노도의 변화를 보이고 있는 곳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발발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순간 일촉즉발의 시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몰락 이후 보여준 변화는 우리 인식의 추종 속도를 넘어선 그야말로 초고속 진보의 과정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읽는 유럽사]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으로 급변하고 있는 유럽사 전개의 실상과 변동의 의미와 방향을 친절하게 정리해주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1789년과 1989년 두 해의 의미에 천착하고 있다. 유럽 근대를 열어젖힌 대혁명과 새로운 통합 유럽 질서 구축 계기가 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에 대해서 말이다. 두 사건 모두 유럽사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나간 기념비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기점을 기준으로 각각 그 이후 벌어진 후속 사회변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789년 이후 프랑스의 정치체제 변화, 영국의 산업혁명 과정,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 안티 이념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등장 및 1,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전개된 냉전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스코프와 시퀀스로 연결하고 있다. 1989년 이후에 대해서는 주로 유럽연합의 통합 과정과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역사적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두 사건에서 비롯된 근대 유럽 200년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친절함에 몇번이나 감탄하였다. 매 사건에 대해 심각한 역사적 의미를 부각하면서도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독자의 집중력을 유지하도록 이끌고 있다. 군데군데 역사 상식사전이라 하여 가벼운 팁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림과 사진도 적절하게 배치하여 눈길을 끌고 있다. 더구나 책의 말미에는 역사용어 설명과 유럽사 연표란을 두어 본문에서 스킵한 것들을 챙길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용어와 연표만 보더라도 유럽사 전반, 그 질풍노도의 과정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 하여 읽을수록 이건 텍스트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텍스트북이 지니고 있는 식상함을 걸러낸 잘 읽히는 교과서 같았다고 할까.

 

현대 사회에서 미국을 대신해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유럽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를 모르고서는 이 글로벌 시대를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유럽을 이해하려면 오늘의 유럽을 있게 한 근대 및 탈근대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그래서 꼭 읽어보아야 할 기본 텍스트로 손색이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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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자 철학에 답하다
스티븐 랜즈버그 지음, 김세진 옮김 / 부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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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괴짜는 괴짜다. 경제학의 본령을 한참이나 일탈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짚고 있는 것은 하나 같이 우리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기본적 인식틀이다. 실재와 허구, 지적 설계론과 진화론, 믿음의 근거, 지식 논리의 법칙 등 경제학보다는 철학의 인식론이나 논리학에서 다루기에 적합한 것들을 특유의 유머러스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화법으로 얘기하고 있다. 하여 얼핏 존 롤스나 마이클 샌델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 그것도 재기발랄한 발산적 사고의 대가답게 이러한 논의들을 경제학적 사고로 수렴하고 있다. 특히 자신의 독자적인 논리인 EGR(Economist's Golden Rule)을 이용하여 민감한 주제들을 재단하고 있는 대목은 압권이다.

 

남의 것을 훔쳐도 되는가? 위조 행위는 괜찮은가? 자선 기부금은 얼마나 내야 하는가? 쓰레기 투기는 괜찮은가? 등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부딪히는 사회문제들에 대한 질의응답을 저자의 EGR 기준에 따라 응답하고 있다. 쓰레기 투기에 대한 응답은 이렇다.

 

“그렇게 버린 쓰레기를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악취를 맡거나 그 사이를 누비며 감당해야 하는 총비용이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누릴 편익보다 적다면야 괜찮다. 십중팔구 그렇지 않을 것이 문제다.”

 

EGR에 입각한 편익-비용 분석에 따라 명확한 응답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민자를 받아야 하는가,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현재의 삶의 질을 포기해야 하는가?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EGR을 적용하여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EGR이 만능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판단 근거로 유효해 보인다. 일부 공감 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하여 이 책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적합한 정치한 논리를 배울 수 있고 우리 사회의 민감한 이슈들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나름의 관점을 파악할 수 있어 즐겁고 유익하게 읽힌다. 지적인 향연에 참여한 기분이 든다. 유일한 옥의 티라면 책 아래쪽에 있는 각주가 너무 작은 글씨에 옅은 청색으로 되어 있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용한 아이디어가 많이 담겨 있는 부분이 사장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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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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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도 실은 마음에 관련된 일이다. 어린 시절의 작가처럼 아무리 달래도 육식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다든지, 맛집으로 소문난 곳을 찾았더니만 주인장이나 인테리어가 맘에 들지 않아 음식이 전혀 당기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성석제는 [칼과 황홀]에서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마음의 식도락 기행이라 하겠다. 행복한 기억으로 먹었던 이야기들로 빼곡하다. 어쩌면 행복을 찾는 구도행의 한 소도구로 먹는 일이 등장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선 그의 행복론부터 들어보자.

 

소와 명이가 처음 내 입안에서 만났다. 짭짜름하고 향긋한 명이 장아찌가 단백질과 지방이 고루 섞인 일등급 한우 등심을 싸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오래 씹었다. 다른 건, 이를테면 술도 말도 필요 없었다. 그 둘만으로도 행복해지기에 충분했다.(15쪽)

 

군데군데 그는 먹으면서 행복해했던, 행복하게 먹었던 얘기를 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간간이 위트도 곁들이고 있다. 야키우동을 맛보러 갔던 경북 봉화에서의 중국집 경쟁 스토리는 배꼽을 잡게 한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용궁반점과의 경쟁에서 완전 밀린 인근 중국집이 안간힘을 다해 맞대응한다는 게 상호를 펭귄반점으로 바꾼 것이라는 대목은 정말 웃기는 짬뽕이었다. 동원예비군 소집 시간이 임박한 가운데 어머니와 먹는 일을 두고 벌인 일합도 압권이었다. 기어이 아들에게 라면이라도 먹여 보내겠다고 설득하는 어머니의 질펀한 논리에 아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아들과 한참 공방전을 벌이던 어머니는 네가 떠드는 사이에 물이 다 끓어버렸다며 떡하니 한 그릇 차려내신다. 어머니와의 대결에서 완패당하고 라면 한 그릇을 비우며 그는 흐뭇해한다. 어머니의 논리는 애써 차려낸 것은 먹어줘야 인간이고, 먼저 인간이 되어야 훈련도 의미 있을 테고 그래야 국토방위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들을 먹여 보내지 못했을 때 자신이 느낄 허탈함과 약간의 죄의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음식에 대한 소신 한번 대단하게 보였다. 그때 이를 외면했다면 작가는 인간도 아닌 놈이 될 뻔했을 것이다. 거의 코믹 드라마 한 장면 같았다.

 

아릿하면서도 훈훈한 에피소드도 종종 섞여 있어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중국 강서성 여산에 있는 오로봉 등정 시 산 중턱에서 만난 아리따운 처녀를 보고 “여우다.”라고 외친 작가. 그 여우가 이끄는 데로 따라 갔다가 덕분에 괜찮은 국수도 맛보고 모노레일도 반값에 탈 수 있었으니.

 

하여 성석제의 [칼과 황홀]은 음식에 대한 미식가의 단순한 품평이 아니라 하겠다. 먹는 게 다가 아닌 것을,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도 인간 세상은 모두 먹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말 먹는 것은 마음의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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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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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겨우 겨우 읽어낸 듯합니다. 쭉 읽히지 않고 호흡이 자꾸 끊어지는 통에 얼마나 자주 멀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다시 잡는 덴 또 어찌나 엄두가 나질 않던지. 간신히 읽긴 읽었는데, 이제 읽고 나니 더욱 막막해집니다. 도대체 정리가 되질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게 60년대 얘긴지 라잇 나우, 작금의 상황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여전히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고민을 담고 있는 생생한 것이어서 자꾸 감정이입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고전은 고전인 것 같습니다. 그 생명력이 일시적으로 반짝하고 명멸해버리는 게 아니니 말입니다.

 

내용은 토막토막 단절적으로 두서없이 배치되어 있고 메타포도 거두절미 아무런 단서도 없이 군데군데 깔려있어 읽어내기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겨우 얼개를 잡은 건 책 말미에 나오는 번역자 김성곤 님과 브라우티건 작가의 대담을 읽고서였습니다. 소설의 난해하고 무질서한 폭과 깊이에 비해 작가의 이야기는 매우 정선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송어낚시가 사실은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 이름이기도 하고, 장소이면서 때로는 펜촉이기도 한, 그러면서 아무 것도 아닌 무(無)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환경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밝히고도 있습니다. 주인공의 탐색 여행 과정에서 어렸을 때 아름다운 폭포로 보였던 것이 실은 나무 층계나 대리석 이었다든지 하천들은 모두 아스팔트가 되었다든지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상실감과 좌절감의 다양한 표출이 여러 형태로 변주되는 송어낚시로 대변된다는 얘기겠지요.

 

소설의 형식면에서도 파격에 파격이라 하겠습니다. 기존의 스토리텔링 위주의 픽션을 기대했다간 너무도 큰 실망감을 맛 볼 것입니다. 인상적인 것은 흔히 키치라 불리는 패러디와 변주의 기법을 많이 차용했다는 점입니다.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묘비명의 형식을 빌어서 표현한 대목이나 토머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나오는 폐차장의 모습을 오버랩시키는 부분이 그러합니다. 익숙한 표현과 기법으로 독자들이 비교적 친숙하게 작가의 상상력 범주에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그래도 어색하고 낯설기는 여전하지만요.

 

하여 [미국의 송어낚시]는 지금도 여전히 전위적인 내용과 형식의 작품 범주에 넣을 수 있을 듯합니다. 영원히 청년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 기백과 실험정신은 아직도 생기발랄함을 간직하고 있지 때문입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는 읽기에 힘겨웠지만 그만큼의 값어치를 얻은 책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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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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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은 드라마틱하고 의미심장한 것이라 속단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 않은 듯하다. 인간의 일이기에 별 뜻 없이 벌어지고 때론 남루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니 오히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싶다.


흔히들 조선 후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해 떠올릴 때, 삶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이고 매순간 심사숙고 끝에 당대나 후세에 두루 영향을 미칠 유의미한 선택만 행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김훈은 [흑산]에서 그런 견해를 일거에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다. 아무런 현실적 대책이나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이 민초들에 기생하는 어이없는 모습으로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 지조도 없이 신념을 버리고 지인들을 발고하는 배반자의 무리로 매도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훈의 [흑산]은 또 다른 차원의 견해를 슬몃 보여주고 있다. 그게 인간의 일이라고, 그런 모습이 당연한 것이며 비난받을 게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노골적으로 대 놓고 두둔하거나 강력하게 부르짖지는 않지만 배반에 대한 질책이나 무능력에 대한 조소를 싹 거둔 건조한 문장을 통해 지나친 폄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두 갈레 극명하게 나뉜 길이 있다. 정약종과 황사영이 걸어간 길, 천국으로 이어진 관념의 길과 약전과 약용이 택한 인간의 길이 그것이다. 약종과 사영은 이승의 고통과 인연을 초개같이 여기며 끝내 구원의 나라에 안기었다. 둘째 형과 막내는 삶의 구비에 몸을 맡긴 채 흘러 흘러 강을 지나 바다를 넘어 인간의 마을에 깃들었다. 신앙의 지조와 순결 면에서 보자면 배반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약종은 형제들이 그러할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다.


형 정약전과 아우 정약용은 심지가 얕고 허약해서 신앙이 자리 잡을 만한 그릇이 못 된다. 천주학을 한바탕 신기한 이야깃거리로 알았을 뿐, 그 계명을 준행하지 않았고 타인을 교화시키지도 못했다. (16쪽)


이러한 인식 속에는 신앙 배교자에 대한 경멸이 들어 있다. 물론 형과 아우를 자신과 연루시키지 않음으로써 극형을 면하게 하려는 의도로 진술한 측면도 있겠지만 평소부터 지녀왔던 그의 생각의 결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지조와 배반, 삶과 죽음의 의미나 무게가 그런 기준으로만 나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약전이나 약용의 삶이 오히려 더 지난하고 힘겨우며 인간적인 길이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부과된 고통이나 혼란스러움이 어쩜 더 무거운 짐이었으리라는 말이다.


죽음의 길로 나아간 이들은 이승에서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른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오로지 마음의 나라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 물정과 절연하여 마음 문을 닫았기에, 마음의 나라를 인간의 마을에 세울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죽음의 길로 흔쾌하게 걸어간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이 오히려 더 쉽고 편한 길은 아니었을까. 일체 혼란스런 상념에 빠질 이유나 필요가 없이, 돌보고 보살필 인연들에 대한 연민도 접어두고 신념에만 충실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길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이어진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영은 본래 내면의 바탕이 저자 거리의 실상보다 고요한 마음의 세계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사영은 과거 답안에다가 “마음이 세상의 근본이며, 세상의 동력이어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 못하며, 마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것”(60쪽)이라고 썼던 것이다. 셋째 처숙부 정약용은 황사영이 “경전이나 인륜으로 채울 수 없는 아득하고 넓은 땅이 그 소년의 마음에 날것으로 펼쳐져 있음을 알았지만” (69쪽) 정약용의 눈길은 늘 세상의 굴곡에 닿아 있어서, 이승의 아픔에 이어져 있어서 황사영과는 겹쳐지지 않았다. 사영은 천주학을 접하기 전부터 마음의 나라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멀고도 먼 곳을 향해 피흘리며 나아가는 길이 그에겐 현실과 육체의 인연과 고통보다 힘겹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반해 약전과 약용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의 무게, 인간의 길로의 나아감은 결코 가볍고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심사숙고 없이 당장의 힘겨움만 면하려 쉽고도 편한 길을 택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에 아파하고 이웃의 가여움에 대해 연민을 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정서이다. 그들은 솔직하게 이를 드러냈다.


서울에서 의금부 형틀에 묶여서 심문을 받을 때 곤장 삼십대 중에서 마지막 몇 대가 엉치뼈를 때렸다. 그때, 캄캄하게 뒤집히는 고통이 척추를 따라서 뇌 속으로 치받쳤다. 고통은 벼락처럼 몸에 꽂혔고, 다시 벼락쳤다. 이 세상과 돌이킬 수 없는 작별로 돌아서는 고통이었다. 모든 말의 길과 생각의 길이 거기서 끊어졌다. 고통은 뒤집히면서 닥쳐왔다. 정약전은 육신으로 태어난 생명을 저주했지만 고통은 맹렬히도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10쪽)


그들은 또 늘 번민하였다. 인간이기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남을 끌어들여서 보존한 나의 목숨으로 이 세속의 땅 위에서 좀 더 머무는 것은 천주를 배반하는 것인가? 어째서 배반으로서만 삶은 가능한 것인가(18쪽)


그러기에 늘 자책하고 울부짖으며 스스로를 유폐시키려 했다. 그 길의 끝엔 빨갛고 하얀 바다가 이어져 있었고 까무라치며 그 사선을 넘어선 곳에 검은 섬 흑산, 절해고도가 펼쳐져 있었다. 약전은 비로소 구원을 받은 듯했다. 거기엔 세상의 고통과 슬픔, 아스라한 소망 따위와는 절연된 새 세상이 열려 있었다. 순매와 창대 같은 민초들의 순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어쩜 지상에 건설된 천국 같은 모습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약종과 사영이 하늘에서나 맛봤을 세상을 이곳 땅에서 이룬 것이다. 약전은 거기서 눌러 앉아 순매와 연을 맺고 창대와 교유하며 [자산어보]를 엮었다. 동생 약용이 강진에서 또 다른 유토피아를 건설했듯이.


하여 약전과 약용은 배반자요, 얕은 자가 결코 아니었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인간의 길, 오늘 여기의 삶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고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고 자신만 지고지선의 경지에 오를 수 없었던 이들이었다. 그 과정이 어찌 순탄할 수 있었겠는가? 그게 어찌 경박하기만 했겠는가? 오히려 더 힘겹고 무거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민초들의 고통에 같이 아파하며 겨우겨우 살아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김훈의 [흑산]은 마음의 길로만 나아간 이들의 지적, 관념적 우월감에 대한 통렬한 지적으로 읽힌다. 그게 다가 아님을 약전의 삶을 통해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향해, 오늘 여기의 생생한 현실에 눈을 돌리는 일의 무게와 의미심장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약전, 약용이 택했던 삶이 약종, 사영이 나아간 지조와 죽음에 비해 결코 순도가 떨어지고 비중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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