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제6차 인터내셔널 재수립 여부

 


여기서는 코민테른 이전, 인터내셔널(국제노동협회) 문제를 다뤄보고, 전 세계, 노동 안건들을 포함해서, 회담에 대한 내용들, 국제 공산당이라는 과업, 그리고 제6차 인터내셔널이라는 국면에서 재수립 방안에 대해서도 논의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이른바 반동 문제


 

북한에서 '김가' 일파(주사파)를 비롯한, 주체 사상에 대한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북한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추종하거나, 비판한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종합해서 다뤄보겠다. 


어느 집단이든, 단체든 상대 국가를 규정하는 문제를 두고, 짐작해서 파악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부 사정, 속내를 살펴보자면, 주장한 사람들도 숱한 사견들에 기초한다. 체제주의로부터 국가를 규정하는 문제란, 이를테면 단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부터 공산권 국가를 규정하면서 현 사회를 보지 못하고, 무척 이르게 본 탓에, 매우 모순된다는 지점에서도 따끔하게 비난받아야만 옳다. 주로 대표성을 띤 집단이나, 단체에서도, 지도자들이나, 사상가들은 체제를 지지하고자, 혹은 지적하고자, 정작 내부 문제를 보지는 못하고, 상대 국가를 규정하는 일을 서슴없이 일삼는다. 그러한 문제로는 노동조합주의로 빠진 부패자들과 관료주의에서도 여전함을 잘 보여준다.

 

대표격인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국제주의 시각에서만 보는 문제점과 정돈되지 못한 입장들에 기반을 둔 난삽하다는 근거로, 각국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을 결전하고, 조치할 수 있도록 프롤레타리아 혁명 문제란 더욱 시급함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식인 운동가들에 대한 영향력과 한계를 짚어본다. 바로 '인텔리겐치아'라는 문제다. 국내로는, 마르크스도 지적했던 '룸펜' 문제도 끼여있기 때문이다.

 

김가와 주체 세습


북한은 무산 국가가 아니다.

 

신사 양반들! 계급 투쟁 없는 운동이란 얼마나 무식한가! 전도된 주객에다 번지르르 말만 앞서고 분별 할 줄도 모르는 꼴이란!

 

북한은 수정과 반동을 일삼아 온 무고한 숙청과 인민 착취로 완성한 국가의 겉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내부 모순이란 정작 자본가들에 대한 부패를 고스란히 안고 갈 수밖에는 없다. 마찬가지로 남북한에서도 재산의 상속과 세습은 부르주아지들에게는 제약 없이 자신들의 유산을 오랫동안 대물림하도록 유지할 수 있는 기능으로 작용해왔다. 특히 부르주아지들은 철학으로부터 자신들의 지배적인 속성을 강화할 수 있도록 보존하고자 더욱 강력하게 통제된 국가와 임금 노동을 지불하고, 또한 착취하면서 자신들의 시공간을 부르주아지들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그리고 부르주아지들을 위한 정당이자, 부르주아지들만의 국가로 투신해왔다는 점이다. 이제는 오히려 소부르주아지들도 자본이라는 기회의 씨를 뿌리고, 타락한 꽃으로 거두어 가고 있으니!

 

일반적으로 남한에서는 북한을 봉건적인 왕국이나, 파렴치한 독재 국가로 자주 여기곤 한다. 그러나 같은 지적들은 주로 반공주의자들도 내세우는 명분으로, 정작 자신들에 대한 국가와 지배 체제를 자주적으로 국방에 대한 안보로만 들먹이곤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이든. 대소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평화 통일이라는 민주적인 구호가 어느덧 계급 투쟁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이름도 없이 그저 부르주아지들을 위한 벌이에 불과한 좌우파 밥그릇 싸움으로 치달았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폭동을 정당화하게 됐을까. 바로 혁명에 대해 심사숙고 없이 조사해본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연구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혁명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도 학회는 부르주아를 위한 사적 소유물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고, 오히려 오래된 헌법을 훼손하거나, 뜯어고치는 지배 계급을 위한 전유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치주의도 폭동으로 수용되거나, 매우 헛된 계급적인 중도로만 도망치고, 주관적인 인식으로 가로막혀, 사적 복수와 사사로운 판결만 이루는 도대체가 도무지도, 도저히도 용서할 수 없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그릇된 행위를 올바르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주 보여주는 정치적 모순이란 여기서도 계급적인 파악을 먼저 전제로 한다.

 

한국에서도 자본주의에서 주체는 세습된다. 주체란 씨족 사회만으로 이뤄졌던 매우 역사적인 본가를 따르거나, 또한 자본재 기업 운영이나, 생산 업체들에 있어서도 재산 축적을 위한 손 쉬운 발판을 법적으로 허가받을 수 있었다. 검토 과정도 없었고, 뒷돈으로 부패했고, 어느 곳에서든 국가란 잘 소멸하지도 않고는 오히려 부르주아지 국가로부터 꼭 폐지해야할 근거를 곳곳에서도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 오히려 무단으로 폭력을 사용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제거하도록 해온 짐승들이나 다름 없는 폭압을 행사하기도 했던 사람들은 누구던가. 우리는 늘 수비해왔다. 그러나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파시스트 폭동으로 휘말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왜 또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지에 대해서는 지친 심정이자. 그리고 이제는 모두에게 꼭 묻고 싶을 지경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무정부주의 오류!

 

일부 혁명가들에게는 동감을 얻기도 했었던,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도 국내 역사를 고찰해보고,

매번 체제로는 어떻게 손 쉽게 타협주의라는 편에 섰는지를 분석해보자.

전시 행정 체제 아래에서 군국주의, 전범주의라는 큰 오점에 대해서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파병을 반대하며

 


러시아

 

자국을 지키기 위한 수호 전쟁이 아니라, 두 양상국들은 침략 전쟁이라는 명분이 있다. 러시아는 토지 확장 정책이 아닌 우크라이나, 무력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일 뿐이다. 공산당에 대한 원조란 고작 '군사적'이었다면, '건설적'인 원조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보도록 만든다. 공산당에서는 꾸준하게, 러시아 파병에도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를 단지 수호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지배자들이 벌인 도발에 항복한 러시아라는 큰 오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심각한 수준까지 파병을 지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모양새다.

 

오랫동안 공산당에 대한 포부를 벌이고,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적 도발을 감행한다. 과연 공산당이란 남북한에서도 공동의 적으로 비출 수밖에는 없다. 모든 전쟁 양상들은, 미국에 대한 지지를 반영한다면 더욱이나 반대한다. 어디서든, 그들에게 건설이란, 강제된 군사 도발일 뿐이라면, 남한에서는 심심한 사과를 보탠다. 그러나 양보할 수는 없다.

 

무인기 열풍으로, 안보에도 금이 간 상태다. 그러나, 지배층 지도자들은 정작 안보에는 관심도 없다. 매일 이남 전단 풍선도 날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 가운데는 북한을 도발해야만 한다고 내세운다. 정작 하지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소수인 가운데, 연락처마저 파괴해버렸다.

 

공산당에게 인민들은 어디로 갔던가. 서로가 도발에 대한 불안감만 가득 안고 있다.

 

이스라엘

 

전쟁에 미친 사람들은 있어왔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서는, 하마스 테러에 대해서는 비열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스라엘이 벌인 학살에 대해서는 눈 감아준다. 전쟁에 대해서는 미래로 다가올 핵 전쟁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당에서 두려운 건, 바로 국가란 소멸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가를 오랫동안 유지해왔음에도, 다른 나라들에 대한 독립은 거부해왔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강간당하고, 죽어서는 조국을 잃고 돌아온다. 들을 수 있는 건 짧은 소식들 뿐이고, 어떤 언론인들도, 세계를 잘 안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그리고 세계가 모두 방관했다고, 그저 거리낌도 없이 소비했다고 말할 날도 올까. 세계는 전쟁 중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잘 모른다.

 

왼손도 모르게 하고자, 한 국가가 빼돌린 전쟁 비용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지지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안다면 과연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나 있었을까.

 

'미국도 공범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

 

자본가들이여, 그들이 밟은 땅은 과연 누구 땅이었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4. 10. 16


연설문 

 

문학을 끊은지는 참 오래됐다. 그래도 틈나면 읽고자 했던 아쉬움이 묻어,

쓰지도 못한다면, 읽지도 못했다. 단지 수상을 했다는 축하가 아니라,

어쩌면 전하지도 못하는 먼 미래로 보낸 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아무도 전하지 못한 그런 글이라면 더욱 말이다.

비좁고도, 도무지도 답답한, 조그만 땅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이나 쓴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옥중에서도 쓰여진 글일 수도 있는

작은 집에서 연설을 쓴다. 그러나 집이란 감옥이 아니다.

 

축하라는 미명 아래로도,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작가에 대한 정신은 신비로운 미신만은 아니기를.

그렇다고 마술도 아닌,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를 바래온 건 보탬이던가.

상관없다.

 

매우 젊고도, 일면식도 없이, 등단하겠다는 한 어린 애를 죽였다.

바로 글로 말이다. 문학이란 참 쉽다.

쓰기만 하면 바라는 대로 풀 수 있다.

빈 터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도 않는 청중들을 생각하노라면,

 

참 우스운 꼴이다.

그리고 전쟁이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적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벌써 죽었다.

매일마다 지는 삶이란 바로 그런, 지겹도록 꾸준한 극복도 아니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소하기 때문도 아니다.

버티지도 아니하고, 짖기만 하던 개 같은 삶도 아니다.

패 버릴 구원 노래도 아니라, 그렇다고 빈틈 없이 꼭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런 말들이라면, 차라리 불 끄고 암실 속에서 적어나가는 글이란, 쓰기란 더 쉽다.

 

그리고 시끄러운 책을 덮는다.

 

공산주의 만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