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체제 내 가부장적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일부 부르주아 여성주의는 개혁적 의식 제고나 제도 개선 수준의 한계에 봉착했다. 이는 여성에 대한 실존적·관념적 고찰의 한계와도 맞물려 있다. 특히 일부 여성 철학자나 성학자들의 추상적 인식 체계는 여성 대중의 동요를 혁명적 실천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체제 내적 미봉책에 의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석에 반대하여』류의 저작들이 추구하는 ‘전근대적’ 단상이나 모호한 어휘는, 세대 갈등을 전 사회적으로 확장하며 민주화 열망을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질서로 편입시키기려는 시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정희진를 비롯한 일부 여성학자들의 담론 역시 실질적인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먼 비생산적 논의를 반복하며, 부르주아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성격을 명확하게 띤다. 자본주의 체제 내 여성은 이미 심각하게 계급적으로 분화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들 담론은 여성을 단순한 ‘소비의 주체’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며, 대다수 민중 여성의 지지를 받기보다는 소부르주아 중간 계급에 호소하는 신여성적 한계를 답습한다. 이는 남한 정부가 추진하는 성평등 정책의 ‘체제 내적 흡수’ 기조와도 직결되어 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이러한 비논리적 체계성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는 ‘다양성’의 수용이나 부르주아 질서를 위한 ‘공권력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여성의 신변을 위협하고 불안을 자극하는 구조적 폭력을 방치·조장한다. 이에 가담하는 언론 역시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 ‘여성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거나 관념적·종교적 환각에 기댄 여성주의자들의 책략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대변하지 못하며, 이들을 자본주의 체제 내로 강제 편입시킬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여성이 겪는 추가적 지출 부담은 크게 (1) 필수 생필품 및 위생용품 비용, (2) 노동 시장 편입 및 고용 유지를 위해 강제되는 노동력 유지 비용, (3) 신변 안전 확보를 위한 주거 및 추가 비용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비용은 여성이 노동 시장에서 노동력을 판매하거나 생존·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구조적 지출이다. 결국 저임금·비정규직에 집중된 여성 노동자는 월 수입 대비 과도한 지출을 강요받으며, 이는 체제 내 계급 분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취약한 지위에 내몰리는 이유는 단순한 소비 행위 때문이 아니라, 체제가 강제하는 ‘소비 형태와 구조’에 있다. 이는 단지 계급 격차라는 눈앞의 현상에 그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가 자연적 생산 및 가부장적 구조와 결합하여 여성의 생산 동력을 자본 축적에 지속적으로 동원하는 방식과 직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폭력을 명확히 지적하는 한편,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생산하는 담론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사회주의적 노선의 우위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여성의 계급적 단결은 필수적이지만,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계급적 분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국가가 여성의 생산성을 독려하는 방식은 자본주의 생산 동력의 확장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공권력과 국가 기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의 부재는 상류층 여성만을 위한 형식적 교육과 기회의 평등으로 귀결되며, 이는 계급적 차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폭력을 가중시킬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내 여성 해방의 의의는 여성주의 담론이 양산하는 ‘타자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실천 속에서 노동자 여성이 주체성을 획득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에게 부여된 가장 핵심적인 과제이다.

 

당의 실천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전면적 단결이자, 프롤레타리아 여성 해방을 향한 전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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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셰프스키의 생애

 

체르니셰프스키는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신학 대신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해 유물론 철학과 공상적 사회주의를 흡수했다. 이후 당대 최고의 진보 잡지인 『현대인』의 편집을 맡아 사회 비판적 논설과 비평을 쏟아내며 청년들의 사상적 지주로 떠올랐다. 1861년 러시아 농농해방령이 농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자, 혁명적 농민 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1862년 제정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를 집필했다. 1864년 ‘시빌 공판 (가짜 사형 집행 의식)’을 거쳐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베리아에서 고된 유배 및 강제 노동 생활을 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후 1883년에야 고향 사라토프 부근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은 감옥에 갇혀 있던 체르니셰프스키가 집필한 작품으로, ‘새로운 사람들(신인류)’이라 불리는 급진적 진보 지식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노동 조합 공동체를 다룬다. 주인공 베라 파블로브나는 속물적이고 가부장적인 부모의 압박과 원치 않는 정략결혼 위기에 처해 있다. 이때 그녀의 남동생 가정교사이자 의학도인 드미트리 로푸호프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로푸호프는 베라에게 법적·사회적 독립을 제공하기 위해 위장 결혼을 제안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부부가 되어 부모의 집을 떠난다.

 

독립한 베라는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모아 봉제 작업장 (협동조합)을 설립한다. 이 작업장은 기존 자본주의 공장과 달리, 모든 노동자가 이익을 공평하게 나누고 경영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구조이다. 베라는 단순한 경제적 자립에서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자존감을 되찾는 공동체 공간으로 발전시킨다.

 

소설에는 베라가 꾸는 네 가지 주요 꿈이 등장한다. 

 

첫 번째 꿈에서 베라는 어둡고 습기 찬 지하실에 갇혀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누워 있다. 이때 신비의 여신 (‘민중에 대한 사랑’ 혹은 ‘해방’)이 나타나 그녀의 손을 잡자, 베라의 마비가 풀리고 지하실 밖으로 나와 들판을 달리게 된다. 여신은 베라에게 “사람들을 감옥에서 풀어주라”고 당부한다. 이 꿈에서 베라는 억압에서의 해방과 자립을 깨닫는다.

 

두 번째 꿈에서 로푸호프와 베라가 들판을 거닐고 있다. 들판에는 이삭이 자라고 있지만, 관리되지 않아 황폐해진 땅과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 대비되어 나타난다. 꿈속에서 이성적 판단과 자연적 순리가 대화를 나누며, 어째서 어떤 땅은 황폐하고 어떤 땅은 결실을 맺는지를 설명한다. 이 꿈에서 자연과 이성의 조화를 이해한다.

 

세 번째 꿈에서 베라는 자신의 비밀 일기장을 읽어주는 여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기장에는 베라가 자신도 모르게 숨겨왔던 진심이 적혀 있다. 베라는 자신을 구출해 준 첫 남편 로푸호프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은 사상적 동반자로서의 감정이자 부채의식일 뿐 성적·감정적 울림을 주는 ‘진정한 연애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꿈에서 베라는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

 

네 번째 꿈에서 베라는 여신의 안내를 받아 인류 역사 속 여성의 지위 변화를 살펴본 뒤, 미래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목격한다.

 

베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로푸호프의 친구이자 의사인 알렉산드르 키르사노프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보통의 통속 소설이라면 질투와 갈등이 일어났겠지만, 로푸호프는 ‘합리적 이기주의’ 철학에 따라 행동한다. 소유욕이나 질투로 베라를 구속하는 것은 모두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로푸호프는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한 뒤 미국으로 떠난다. 이후 베라와 키르사노프는 정식으로 연인이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사상적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살아간다.

 

소설 중반에 등장하는 라흐메토프는 일반적인 ‘새로운 사람’에서 ‘헌신적인 혁명가’의 전형이다. 그는 오직 민중의 해방과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사사로운 욕망, 편암함, 사랑까지 포기한다.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뾰족한 못이 박힌 침대에서 자는 등 극단적인 금욕주의와 훈련을 거친다. 작품 전체에서 비중은 크지 않지만, 당대 러시아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혁명적 모범을 제시한 인물이다.

 

훗날 미국에서 돌아온 로푸호프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여 베라·키르사노프 부부 근처로 이사한다. 두 부부는 서로 깊은 우정을 나누며, 이상적인 공동체와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체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 (1863)는 단순히 한 편의 문학 작품에서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흔들고 러시아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한 가장 강력한 정치·사회적 선언문으로 평가받는다.

 

새로운 사람들 (신인류)라는 행동하는 지식인상을 제시하여 소설은 관념적 논쟁에만 머물던 기존 1840년대 세대 (‘잉여인간’)와 달리, 이성과 행동으로 삶을 주도하는 1860년대 진보 청년층 (‘신인류’)의 모델을 제시했다. 베라, 로푸호프, 키르사노프 같은 인물들에서 이기주의와 타인에 대한 봉사가 대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합리적 이기주의’를 보여주었다. 금욕과 철저한 자율 훈련으로 자신을 단련하는 라흐메토프는 당대 청년들에게 ‘민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전천후 혁명가’의 완벽한 표상이 되었다.

 

가부장적 억압이 극심했던 당대 러시아 사회에서 이 소설은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자립을 최초로 정면 다룬 작품 중 하나이다. 부모의 압제나 정략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방 수단으로 ‘위장 결혼’을 제시했다. 베라가 만든 봉제 작업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 없이 이익을 나누는 생산자 협동조합이자 여성이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러시아 여성 운동과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시험대가 되었다.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혁명가들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1870년대 “민중 속으로 (브나로드)”를 외치며 농촌으로 내려간 수많은 청년들이 이 책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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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성향을 막론하고, 당 내 특정 집단이 저지르는 마르크스에 대한 노골적인 왜곡은 엄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이는 공산당이 추구하는 이론적 모범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자 훼손이다.

 

특히 자본주의 체제 내 매체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평생에 걸쳐 규명한 ‘자본주의 분석과 세계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박’을 두고 ‘실패한 사상’이라는 딱지를 붙여 자신들의 이론적 궤변을 정당화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체제적 모순을 깊이 파악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의 수혜를 누리는 지식인층 학자들과 손잡고 마르크스의 ‘단편성’에만 집착하는 태도는 그들이 정치적 기득권과의 타협이 케케묵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폭로할 뿐이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재해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소시민적 연대나 노조 민주화 등을 합리화하고, 기존 정권과의 일시적 타협을 도모하고 있다. 급기야 마르크스의 과학적 분석과 당시 러시아 노동자들의 역사적 경향마저 ‘실패’로 단정 짓는 논리적 파단을 저지르고 있다. 그러나 운동권에서 사회주의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당 내 투쟁이자 공산당의 확실한 일보 전진을 의미한다. 마르크스라는 대의명분 아래 그의 평생에 걸친 연구가 정확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공산당 선언』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라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제시했던 선언의 참뜻을 알 것이다. 즉 “당의 전진을 가로막는 반동적 경향”에 맞서 엄중히 투쟁하고 “부르주아적 이상에 대한 반박”을 전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결코 안일하고 귀찮은 일이 아니며, “끈질기고 집요하게”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러한 반동적 경향들은 늘 ‘전통적 색채’나 ‘진보적 수사’를 들먹이며 자신들을 합리화해 왔으며,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노골적으로 논변을 ‘수정’하고 ‘변질’시켜 왔다. 따라서 독자라면 원전이 갖는 중요성을 끊임없이 자문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 추모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마르크스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당당한 자부심으로 그의 평생의 과업을 돌아볼 수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엥겔스,『제2인터내셔널 폐막 연설』 中

 

단순히 마르크스를 입맛대로 요약하여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평생의 유산과 노고를 되새기는 실천이야말로 우리 당이 추구해야 할 가장 정확한 노선이자 선구적인 조직 투쟁의 결집이다.

 

만국의 부르주아지를 심판하자! 그들의 녹슨 사슬은 ‘현대화’로 둔갑한 전근대적 자본의 비참한 결말일 뿐이다. 공산당의 전진에는 오늘날 계급 투쟁의 역사가 함께하고 있으며, 이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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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적 파산은 단계상 충분히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을 대비한 중도 보수층의 집결 역시 몰락의 국면이 예고된다." 


자본이라는 구체제의 숨결이 지도자 개인을 거두어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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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지도 제도와 노동 시장의 구조적 모순


한국의 대표적인 취업 지원 제도인 국민취업지원제도와 공공 고용 서비스는 청년과 구직자들에게 경제적 유인을 제공하는 사회적 측면에도, 실질적 취업 연계의 부족과 형식적 운영이라는 구조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감사원 검사 결과》와 《한국고용정보원》 등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참여자의 30%~40% 이상이 고용복지플러스센터 등의 상담 프로그램이 단순 수당 수급 조건을 채우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그치며 실질적인 구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수당 지원 등 경제적 만족도는 높은 반면, 일자리 프로그램이나 알선 서비스에 대해서는 희망 직종과 무관한 단순 사무 및 행정 알선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제도 종료 후 6개월 이내 취업률은 50%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1년 이상 고용 유지율은 50% 안팎으로 떨어져 단기 및 전전형 취업이 반복되고 있다. 아울러 국비 지원 직업 훈련 수료자 중 훈련 분야와 실제 취업 직종이 일치하는 직무 연계율은 30%에서 40%대에 불과해, 양적 확대에 비해 질적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형식적 한계는 단순한 행정적 미숙함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고용 제도가 결합하는 방식에서 비롯된 구조적 문제이며, 전 세대에 걸친 노동자 박탈 현상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취업 지원 제도는 개별 노동자의 장기적 역량 개발보다 ‘몇 명을 시장에 재배치했는가’라는 수치적 실적에 집중하며, 구직자를 저임금 및 단기 노동력을 공급하는 상품화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또한 수당 지급에 엄격한 구직 활동 조건을 걸어두어 구직자를 주체적인 노동자가 아닌 행정 절차의 통제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로 인해 청년층은 양질의 노동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채 단순 보조직을 전전하며 역량 축적 기회를 박탈당하고, 중장년층은 평생 쌓아온 경력과 존엄성을 부정당한 채 하위 노동 시장으로 강제 이동하는 이중 하향 취업을 겪으며, 노년층은 죽을 때까지 저임금 노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생존형 노동 박탈로 이어지는 전 세대적 고용 불안정을 겪게 된다.

 

제도가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양상을 띠는 원인은 운용하는 행정 체계의 내적 구조와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 속에서 목표가 왜곡된 결과에 기인한다.

 

첫째, 고용센터와 민간 위탁 기관의 성과 평가가 단기적 취업률 숫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상담원과 기관은 구직자의 작성이나 일자리의 질을 고민하기보다 채용이 쉽고 퇴사율이 높은 일자리에 우선 알선하게 된다.

 

둘째, 신공공관리론에 따라 고용 서비스를 민간에 대거 위탁하면서 최저가 입찰과 영리성 추구가 도입되었고, 이로 인해 개별 맞춤 상담 대신 서류 양식 채우기나 형식적 전화 상담 등 최소한의 요식 행위가 구조화되었다.

 

셋째, 상담원 1인이 수십에서 백여 명의 구직자를 담당하는 과중한 업무로드 속에서, 상담원들은 진정성 있는 진로 설계를 포기하고 수당 지급 기준 검토나 부정수급 방지 서류 확인 같은 형식적 행정 처리자로 전락했다.

 

넷째, “구직자가 수당만 받고 일하지 않을 것”이라는 도덕적 해이가 작동하면서, 제도의 중심축이 역량 강화 지원이 아닌 구직 활동 증명을 요구하는 감시 및 통제 행정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관료화와 형식화는 단기적 행정 예산 낭비만이 아니라 노동 시장 전체에 심각한 장기적 해악을 끼치고 있다. 우선 구직자들이 하위 노동 시장에 갇히는 고착화 현상이 발생하여 사회 전반의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다. 특히 급변하는 고용 조건 속에서 기업들은 신입에게마저 ‘즉시 전력감이 되는 중고 신입’이나 다름없는 연차별 실무 경력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으나, 형식적 취업 지원 제도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구직자들을 단기 알선과 부실한 훈련에 머물게 하여 심각한 경력 단절을 유발하고 있다.

 

이처럼 체계적인 경력 형성이 차단된 노동자들이 다시 노동 시장에 유입될 때, 기업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더욱 까다롭고 과도한 경력직 수준의 ‘스펙과 요건’을 들이밀며 진입 장벽을 높이고 있어, 구직자들은 일자리를 구할수록 오히려 더 깊은 미숙련화와 고용 불안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또한 높은 퇴직률과 재실업의 무한 반복 속에서 국가 전체의 노동력과 노동 생산성이 저하되며, 청년층의 경우 제도에 대한 불신이 학습된 무력감으로 이어져 구직을 포기하고 비경제 활동 인구로 돌아서는 역효과를 낳는다. 자본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 보조금과 제도를 활용한 저비용 노동력 돌려막기에 안주하게 만들어 근로 조건 개선과 기술 혁신 등 체질 개선 유인을 완전히 상쇄시키며, 결과적으로 현행 취업 지원 제도는 노동자의 삶과 숙련을 보장하지 못한 채 자본의 유연화 요구만을 나타내면서 노동 시장의 양극화와 노동 생산성 하락을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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