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를 둘러싼 도덕적·윤리적 논란은 혁명의 본질을 가리는 구실에 불과하다. 우리는 혁명적 형벌로서 사형제 도입의 당위성을 적극 주장한다. 부르주아 법체계는 무고한 민중을 억압해 온 반면, 정작 처발받아야 할 자들에게는 심판을 유예하며 민중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혁명기의 사형제는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의 억압 기구가 아니다. 그것은 부르주아지를 단죄하는 민중의 혁명적 재판이어야 한다. 한국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사유 재산을 사수하려 할 때, 생산 수단을 전유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전 세계 부르주아지를 청산하기 위해 혁명적 사형제를 단호히 결정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다. 

 

제국주의와 대자본이 야기한 사회·경제적 해악은 명백하다. 단순히 감옥에 가두어 방치하는 온건한 처벌 방식으로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진정한 단죄가 될 수 없다. 자본의 결탁과 인적·물적 영향력을 보존한 채 감금되는 것은 반혁명적 복권의 여지를 남겨둘 뿐이며, 이는 민중의 피해와 계급적 수탈을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못한다. 혁명적 사형제는 과거의 무차별적 숙청이 아니며, 단순한 경제 성장 가속화 수단도 아니다. 이는 지배 계급의 반혁명적 유산을 청산하고 역사를 진전시키기 위한 단계적이고 결정적인 단죄이다. 평화적 해법이라는 소시민적 착각은 대자본의 생산 수단 독점을 눈감아주는 결과만을 낳을 뿐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법적 기준은 주로 하층민이 저지르는 ‘거리 범죄’를 집중 처벌하지만, 실제 사회적·경제저 피해 규모는 부르주아지 (기업 및 대자본가)가 저지르는 범죄가 월등히 크다.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임금 체불 역시 중대한 범죄 행위임에도, 형사 처벌보다는 민사상 합의나 과태료 처분 정도로 유야무야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사법 체계가 계급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된다. 소액 절도나 생계형 범죄를 저지른 하층민의 구속 및 실형 선고율은 매우 높은 반면, 수천억 원대 배임·횡령을 자행한 대기업 총수나 자본가에게는 집행유예, 보석, 사면이라는 특혜가 압도적인 비율로 부여된다. 전 세계 교도소 수감자의 80~90% 이상이 하층 계급 및 소외 계급 출신이라는 구조적 통계는 자본주의 형법 기구의 본질을 폭로한다. 결국 현행 법 체계는 자본가의 범죄를 ‘경영상 실수’나 ‘비폭력 범죄’로 포장하여 보장하는 반면, 소외 계급의 범죄만을 선별적으로 단속하고 진압하는 계급적 도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부르주아 정부의 법집행이 무능과 범죄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직접 집행하는 혁명 재판만이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켜 온 부르주아 '평화 정치'의 허구를 폭로하고, 역사적 정의를 바로 세우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다. 부르주아지의 위선은 분야를 막론하고 점차 노골적이고 해악적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맞서는 우리의 과제는 더 이상 일방적 순종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수탈 방식에 대한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단호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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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OTT나 AI 등 기술 매체가 기획·개발 단계부터 ‘유료화’를 전제로 삼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는 기술 발전이 어떻게 공공재를 사적 소유물로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본래 이러한 매체와 기술은 사회적 생산 수단이자 공공재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특히 AI·AGI (인공일반지능) 등의 유료화는 거대 자본의 사적 이윤 창출과 독점을 위한 민영화 기제 및 투자 수단으로 손쉽게 변질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기술 매체의 사용 자체를 단순히 거부하는 방식만으로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기술주의자들이 제기하는 거부론이나 비판은 때로 공허한 ‘종말론’을 부추기는 데 그치거나, 모순적으로 자본이 형성한 상품성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기술 사용을 거부하는 소극적 태도는 공공재를 부분적으로 유료화하며 사적 이윤을 정당화하려는 자본의 점유 시도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확한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대기업이 주도하는 AI 기술 등은 정치적·법적 권리를 바탕으로 자본가가 그 소유권을 독점하고 있는 구조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나 대중의 통제권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본 기업은 공공적 가치를 지닌 기술마저도 부분적 유료화로 이윤 창출의 도구로 전환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 내부의 개별 노동자나 대중이 이러한 유료화 공세에 맞서 반대 목소리를 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기업 경영진이 지닌 법적 권한과 거대한 법률 조직, 그리고 투자 유치를 명분으로 기술 발전과 공공재의 상품화를 정당화해 왔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술의 유료화는 자본에 접근할 수 있는 계급만이 첨단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독점하는 ‘기술적 소외’를 정착시킨다. 이는 지식과 생산 수단에 대한 접근 권한을 자산 규모에 따라 제한하여 사회적 격차를 구조적으로 고착화한다. 자본 기업이 아무리 ‘할인율 적용’이나 ‘구독 방식의 정당성’을 포장하더라도, 유료화 전략의 본질은 개인적 자본 수탈에서 사적 이윤 추구를 정당화하는 기제에 불과하다. 

 

따라서 개별적 수준에서 유료화 제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공공재의 사적 점유에 동의해서는 안 되며 기술 발전에 따른 결실이 사회 전체에 분배될 수 있도록 구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기술의 이점은 개인이 비싼 비용을 치르고 사서 쓰는 상품이 아니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공공의 자유여야 한다. 이는 현대 예술계에서도 저작권을 둘러사고 벌어지는 법적·정치적 분쟁의 사례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될수록 사용자에 대한 기술적 제약을 강화할 것이 아니라, 이를 독점하려는 자본에 맞서 공공재로부터 사적 이윤을 취득하지 못하도록 사회적 통제와 제한을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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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전진과 선진적 사회주의 투쟁을 수행하시는 일꾼 여러분, 당이 추구하는 노선과 운동의 장기적 전략적 전환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 운동에는 반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반동성과의 투쟁 중 포착되는 소부르주아적·유토피아적 성향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노동 운동에서 저항적 수습이 일시적 단계에 그치거나, 민주주의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전제 정부와 다름없는 부르주아 정부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최근 『노동자 연대』는 현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줬다 뺐는다’라는 표현을 쓰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한편 정파 ‘전진’ 내에서는 1960~80년대 그리스,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시행되었던 국유화 방식을 바탕으로 생산 수단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 연대』의 비판점이 노동자 계급의 자각된 조직적 투쟁과 정치권력 쟁취가 빠진 ‘자본주의 국가 주도 국유화’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 투쟁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국유화에 따른 생산 수단 점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레닌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계급적 결집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일부 기사에서는 레닌의 국유화에 대한 우호적 시각만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본질은 자본주의 국가가 가질 내적 모순과 위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3차 코민테른 및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나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지적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 인민들의 저조한 계급 의식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교육을 논할 때, 노동자 계급의 무지를 탓하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답습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외의 중대한 시련이 상충했던 1921년의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국유화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토지 문제에 관하여』 등에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화 및 투기·투매 행태에 대해 엄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유화의 전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 권력을 획득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반동성이 장기간 지속된 체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동의를 얻기 어렵다.

 

따라서 당의 전망은 단순히 국유화를 외치는 허황된 구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의 노선은 자본주의적 선거 제도나 법적 틀 안에서의 권력 획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노동 인민의 단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전진’이 추구하는 방향이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협동조합, 단순 국유화, 일부 노조와의 타협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조속히 본격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긴급히 요구한다. 노동자 권력 획득이라는 과제는 관념적 구상이나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계급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 인민의 실질적 투쟁과 봉기를 요구한다. 현장의 일시적 파업이나 선동 구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종속된 사회적·구조적 본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반동적 굴레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부르주아지에게 국유화를 구걸하는 소수의 요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결집하여 선언하는 참된 국유화 강령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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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증시의 하락세와 세계 자본 경제의 수축


최근 미국 뉴욕 증시의 하락세와 세계 자본 경제의 수축 현상은 단순한 금융 변동이나 계절적 악재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구조적 모순이 표출된 결과이다. 미 연준의 매파적 긴축과 국채 금리 급등, 고용 및 소비 지표의 둔화는 실물 생산 부문에서 이윤율이 하락한 상황을 드러낸다. 기술 혁신과 자동화 (IT·AI) 설비 투자로 인해 불변 자본 (c)의 비중이 가변 자본 (v)에 비해 크게 늘어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이 진행되었으며, 잉여 가치의 유일한 원천인 노동의 비중을 축소시켜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촉진했다. 이러한 실물 이윤율의 저하를 상쇄하기 위해 형성되었던 가공 자본 (주식·부동산)의 거품은 고금리와 실질 구매력 약화라는 벽에 부딪히며 본격적인 평가절하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적 모순은 지정학적 충돌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매개로 더욱 계급적 폭력으로 분출된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과 이란 지정학적 위기는 석유 및 물류 등 필수 불변 자본 (c) 비용을 폭증시켜 기업의 이윤율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 레닌이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핵심 자원 수송로와 시장 독점을 둘러싼 국가 대립은 자본의 세계적 순환을 가로막는 병목을 형성하며,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중앙은행의 고금리 유지를 강제한다. 이는 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침식하여 유효 수요 부족과 과잉 생산 위기를 심화시키는 한편, 증시 시장에서 가공 자본의 이탈을 가속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이러한 뉴욕 증시의 하락은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로 대표되던 미국 지배권의 구조적 쇠퇴와 맞물려 진행된다. 제조업 기반을 해외로 이전하고 금융화 및 달러 지배력으로 유지해 온 미국 경제는, 실물 가치 창출의 한계 속에서 가공 자본에 지나치게 의존해 왔다. 이러한 우위성의 균열은 증시 상장사들의 통계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천문학적인 설비 투자 (c)를 집행했으나 단기적 잉여 가치 실현에 난관을 겪는 독점 기술 자본 (빅테크) 및 반도체 기업들이 급격한 평가절하을 겪고 있으며, 고금리로 신용 압박을 받는 소형주 지수 (러셀 2000)와 가계 부실 위험에 직면한 금융·소비재 업종이 큰 낙폭을 기록하는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를 보여주는 통계적 증거이다.

 

지표명

통계적 사실

노동 생산성과 임금의 격차

미국 정책연구소(EPI) 분석에 따르면, 1979년부터 최근까지 미국 노동자의 실질 생산성은 약 60% 이상 증가한 반면, 실질 시간당 임금은 약 15~18%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의 대부분을 자본가가 잉여 가치 (m)로 흡수했음을 증명한다.

총생산물 가치 내 노동 소득 분배율 하락

미국 노동통계청(BLS) 통계에 따르면, 미국 국민 소득 중 노동소득 점유율은 1970년대 약 64%에서 최근 56~57% 수준으로 구조적 하락을 기록했다. 이는 전체 부의 창출에서 가변 자본 (v)으로 돌아가는 몫이 크게 축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착취율 (m/v)의 극대화

미국 제조업 및 비금융 기업 부문 전체의 임금 총액 대비 기업 이윤 및 자본소득의 비율인 착취율 (m/v)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노동자가 자기 생존에 필요한 시간 (필요 노동 시간)보다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시간 (잉여 노동 시간)의 비중이 역사상 최고 수준에 달해 있다.

   

증시 하락으로 대표되는 가공 자본의 파열은 실물 경제의 이윤율 하락을 증명함과 동시에, 자본가 계급이 이윤율 방어를 위해 노동자 계급에 가하는 수탈을 극대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미국 경제분석국 (BEA)과 노동통계청 (BLS) 등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비금융 기업의 이윤율은 장기적인 하락 추세를 그리는 반면, 노동자의 실질 생산성 증가율에 비해 실질 임금 상승률은 턱없이 미달하여 노동 소득 점유율이 구조적으로 하락해 왔다. 이는 자본이 착취율 (m/v)을 극대화하여 이윤율 감소를 저지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 소득 감소와 신용 카드 및 자동차 대출 연체율의 급증은, 노동자 가계가 고금리 조건 속에서 신용 수탈과 파산 위기로 몰리고 있음을 입증한다.

 

미 연준 (Fed)의 고금리 및 긴축 정책은 부르주아 경제학이 주장하는 편파적인 ‘물가 안정 수단’이 아니라, 노동자의 임금 인상 요구를 억압하고 자본의 이윤을 수호하기 위한 계급 투쟁의 도구이다. 연준이 목표로 하는 ‘노동 시장 과열 수습’의 본질은 마르크스가 명시한 ‘산업예비군’을 인위적으로 창출하는 것이다. 고금리를 동원하여 경기 후퇴를 유도하고 실업의 공포를 유포하여 노동자 계급의 저항력을 무력화하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려는 것이다. 1980년대 초 폴 볼커 연준 의장이 20%에 다하는 극단적인 고금리로 10.8%의 실업률을 유발하며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신자유주의 착취 체제의 문을 열었던 ‘볼커 쇼크’와 마찬가지로, 현재 제롬 파월 체제의 긴축 역시 이윤율 위기를 노동자의 희생으로 돌리려는 동일한 계급적 공격이다. 다만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은 노조 조직률의 추락과 높은 가계 부채로 인해 볼커 시대보다 훨씬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여 있다.

 

나아가 최근 자동화 및 AI 기술에 대한 폭발적인 투자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c/v) 상승을 정례 없는 속도로 가속화하며 산업 예비군의 양상을 재편하고 있다. 독점 기술 자본 (빅테크) 자본이 자동화 생산 수단 등 불변 자본 (c) 투입을 급증시키는 반면 지식·사무 노동력 (v)을 축소함에 따라, 과거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전문 노동자들마저 유동적·잠재적·정체적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대규모 예비군화는 재직 노동자에 대한 임금 억제와 노동 통제의 무기로 활용된다. 그러나 모든 자본가가 가변 자본을 줄이고 불변 자본 (AI)에 집중할수록, 노동자의 구매력 저하로 인한 과잉 생산 위기가 깊어지고 가치 창출의 원천이 축소되어 체제 전체의 이윤율이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은 더욱 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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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적 시민 사회는 시민 교육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주입하는 담론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표방하는 ‘선진적 노동 의제’의 실상은 노동자 해방이 아니라, 자본의 계급적 억압에 맞선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여된 시민 교육은 반동적 노동관을 답습하는 동어반복일 뿐임이 자명하다. 이러한 비생산적 담론의 반복은 사회주의 전진을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적 시민 사회가 추구하는 자유론의 한계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미 명확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내의 역학 관계 속에서 시민 사회가 결국 반동적 질서로 흡수된다”는 점을 명시했다.

 

이러한 균열은 한국 상황에서도 결코 특수한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는 틀 안에서 노동 의제에 대한 관심이 직간접적으로 표방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체제가 부재한 공허한 민주적 수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다. 결국 노동 계급의 투쟁을 단순한 제도적 법제화, 시민 사회로의 흡수, 노조의 관료적 의존성에 매달리게 만들어 노동 계급의 사회주의적 전진을 지속적으로 방해할 뿐이다.

 

이러한 자본 체제의 균열은 현대 전제 정부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럼에도 기존 학계와 담론 체계는 이러한 조짐을 ‘인정 투쟁’이나 ‘신유물론’적 접근으로 포섭하거나, ‘이념적 국가 기구’ 식의 해석에 그치는 관념론적·수사적 공리공론에 빠져 있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질서는 결코 ‘교양’스럽지도 ‘우월’하지도 않으며, 이는 자본 체제 내에서 생산되는 제반 담론과 소부르주아적 모임 등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전(全) 노동 계급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시각과 철저히 단절해야 한다. 시민 사회 내부에서 추구하는 체제적 사고의 그늘에는 언제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존재하며, 노동 계급의 시각은 부르주아적 틀에 갇혀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을 간과한 채 시민 사회의 관념론에 매몰되고 부르주아적 자유관으로 도피하는 것은, 모순적으로 계급 투쟁의 전면에서 부르주아지와의 철저한 단절 및 전투적 유물론으로의 전환이 왜 필요한지를 입증할 뿐이다.

 

부르주아 시민 사회와 전제 정부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반복해 왔다. 이들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과 전근대적 귀족의 수혜를 누려온 역사관을 유지한 채 계급적 교육을 장려하고 있다. 시민 사회 내에서 자행되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과 무의미한 소부르주아적 단상들은, 한국 시민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 모델이 결국 부르주아적 질서로의 귀속을 반복할 뿐임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자본 체제의 균열은 체제 내 노동 계급을 억압하고, 나아가 타국 인민에 대한 수탈과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러한 시민 사회 담론의 공허한 반동성은 자명하다. 따라서 노동 계급은 계급 투쟁에 있어 부르주아 시민 사회 이론과 완전히 단절하고, 독자적인 프롤레타리아 노선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공산당 강령의 입장을 명확히 표방해야 한다. 전 노동 계급은 노골적인 부르주아 시민 사회의 기만과 책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전투적 투쟁에 나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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