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전진과 선진적 사회주의 투쟁을 수행하시는 일꾼 여러분, 당이 추구하는 노선과 운동의 장기적 전략적 전환을 위해 몇 가지 핵심적인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모든 혁명 운동에는 반동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 속에서 우리는 반동성과의 투쟁 중 포착되는 소부르주아적·유토피아적 성향의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노동 운동에서 저항적 수습이 일시적 단계에 그치거나, 민주주의의 탈을 썼으나 본질은 전제 정부와 다름없는 부르주아 정부의 실태가 반복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최근 『노동자 연대』는 현 부르주아 정부를 향해 ‘줬다 뺐는다’라는 표현을 쓰며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한편 정파 ‘전진’ 내에서는 1960~80년대 그리스, 아르헨티나,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시행되었던 국유화 방식을 바탕으로 생산 수단을 먼저 점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노동자 연대』의 비판점이 노동자 계급의 자각된 조직적 투쟁과 정치권력 쟁취가 빠진 ‘자본주의 국가 주도 국유화’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 투쟁의 무게 중심이 단순히 국유화에 따른 생산 수단 점유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레닌은 1921년 『제3차 코민테른 대회』에 이르기까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계급적 결집뿐만 아니라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일부 기사에서는 레닌의 국유화에 대한 우호적 시각만을 단편적으로 서술하지만, 그 본질은 자본주의 국가가 가질 내적 모순과 위력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3차 코민테른 및 노동자 인터내셔널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 도입에 따른 민영화나 관료주의적 행정에 대한 지적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를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에 불과할 수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 인민들의 저조한 계급 의식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재교육을 논할 때, 노동자 계급의 무지를 탓하는 부르주아적 시각을 답습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크론슈타트 반란 등 소비에트 내외의 중대한 시련이 상충했던 1921년의 상황을 기억해야 한다. 국유화 논쟁과 관련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 역시 『토지 문제에 관하여』 등에서 실질적인 토지 소유화 및 투기·투매 행태에 대해 엄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다. 국유화의 전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정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직접 정치 권력을 획득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아직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고 반동성이 장기간 지속된 체제 하에서는 인민들의 즉각적인 동의를 얻기 어렵다.
따라서 당의 전망은 단순히 국유화를 외치는 허황된 구호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의 노선은 자본주의적 선거 제도나 법적 틀 안에서의 권력 획득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전 노동 인민의 단결에서 비로소 출발한다.
‘전진’이 추구하는 방향이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 내의 협동조합, 단순 국유화, 일부 노조와의 타협에 머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를 조속히 본격적인 사회주의 투쟁으로 전환할 것을 긴급히 요구한다. 노동자 권력 획득이라는 과제는 관념적 구상이나 시간의 경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계급적 폭력에 노출된 노동 인민의 실질적 투쟁과 봉기를 요구한다. 현장의 일시적 파업이나 선동 구호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체제에 종속된 사회적·구조적 본질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반동적 굴레에 안주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우리의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 내 부르주아지에게 국유화를 구걸하는 소수의 요구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결집하여 선언하는 참된 국유화 강령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