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를 소비하는 더러운 족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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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는 언제나 식량 공급의 풍족함을 보장하는 듯이 포장하지만, 그 실상은 가난과 영양실조, 그리고 자본에 동원된 농업 개량화 따위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식품 산업이 고도로 발달했음에도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은 극한의 기계화에 노동을 종속시키고, 비효율적인 유통 구조를 장려하며, 농업 인구의 기하급수적인 감소를 부추겼다. 해외 원조와 무역에 의존하는 식품 및 제조업의 자본주의적 식량 문제는 단순한 ‘낭비적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거대 자본 기업이 농촌 노동자를 구조적으로 배제하여 ‘잉여 생산’을 유발하는 사회구조적 모순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 지점은 농업을 단순히 ‘소비의 영역’으로 제한하는 부르주아 학계의 생산성 논리와 관련되며, 나아가 고숙련 노동층에 국한된 ‘노동 귀족’ 문제와도 밀접하다. 자본 체제는 늘 인력난에 시달리면서도, 정작 농촌과 지방을 비롯한 노동 전반의 유통 방식을 자본 기업 및 식품 생산에 복무하도록 지속적으로 강제해 왔다. 반면,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에서 벌어지는 재고의 과다 축적과 영양 과잉을 목도하면서도, 이를 계급적 분화가 아닌 ‘개인의 가난’ 탓으로 돌리며 스스로를 비난하는 기만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내에서 ‘계획경제’의 요소가 부분적으로 도입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당 체제가 지닌 무차별적 확장의 논리, 대외 원조의 기만성, 그리고 자국 생산 체제의 비효율성이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한 국가의 농촌 사회 붕괴는 도시 유통망에 즉각적인 타격을 입힌다. 수입에 의존한 농산물 침탈은 ‘식민화’를 가속하고 농촌 내부의 계급화를 심화시킨다. 그 결과 이주 노동자를 포함한 자국 노동자들에게 상품으로서의 농산물은 늘 과잉 생산되지만, 무분별한 자본 개발과 토지 개간으로 인해 실제 식량 생산에 쓰이는 유효 농지 비중은 도리어 감소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처럼 개차반이 된 빈농의 삶이 피폐해지는 동안, 자본주의 체제가 ‘이윤 추구’에만 몰두함에 따라 농민의 생산성은 저하되고 국내 계급 분화는 더욱 심화된다. 식량 기술의 개량이 비교적 이루어진 현대에조차, 독점적 유통망과 고물가 정책은 부르주아 계급만이 소비를 독점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 격차를 증폭시킬 뿐이다.

 

이러한 고물가 기조는 유통의 독점 및 사유 재산권(토지 사유화)에 대한 집요한 보호 정책에 부합한다. 막대한 자본금을 쥔 자본가들에게 식량 고갈이나 물가 문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며, 언제든 보충되는 영역일 뿐이다. 심지어 언론조차 자본에 포섭되어, 기자 정신을 한 잔의 와인과 바꿀 정도의 저급한 수준에 이른다.

 

자본의 논리는 식량 고갈 및 자원 배분 문제 앞에서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경제학적 궤변만을 늘어놓는다. 자본주의하에서 계획경제의 시도가 끝내 실패하는 결정적 요인은, 독점 생산의 역사와 확장의 논리가 기생적 기업 구조와 결합하여 내부 노동자들의 비생산성과 비체계성을 고착화하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노동 계급의 불만을 해소하기는커녕 더 큰 폭발적 잠재력으로 축적시킬 뿐이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는 불안정한 내적 모순이 극에 달하는 시점으로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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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 병합과 강제 징집을 둘러싼 동유럽 및 중동 문제, 그리고 이에 따른 선진국의 확전 우려와 경제적 피해는 역사적으로 지속적인 불안을 조성해 왔다. 이러한 불안과 확전 우려는 언론의 과장 보도와 매체 노출로 증폭되는데, 이는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민의 맹목적 추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지배 기구(정부)의 계획된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동유럽과 중동의 분쟁은 제국주의 세력에 직접 맞서는 대결 구도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란혁명수비대(IRGC)는 이번 미 선거 결과를 두고 “미국의 패배이자 정치적 여파의 결과”라고 일축했는데, 당의 노선에서도 이러한 진단에는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단순한 확전 양상에 그칠 것인가는 의문이다. 대통령제든 부르주아 의회 제도든, 자본주의 국가는 피식민지에 대한 영토 소유와 식민지적 병합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수렴된다.

 

엥겔스 역시 『자본』 후기에서 세실 로즈의 식민지 정책을 언급하며, 제국주의적 확장이 곧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량 양산과 직결된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이는 유럽 전역을 휩쓴 산업화의 진행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국가 간 전쟁과 확전에 대한 자국민의 우려는 경제적 불신을 낳고, 나아가 국가 권력에 대한 투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미국과 같은 양당제 선거 제도에서는 전쟁 긴급권 발동이 아닌 부분적 파병에 대해서조차 민중 대다수의 동의가 표출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대의제 민주주의가 ‘인민의 동의’로 기능한다는 관념은 착각이다. 양당 제도는 권력의 안전성을 보장하기보다는,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에게 경제적 해악을 미칠 뿐이다. 자본과 노동 제도의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는 한, 전쟁의 전비와 부담은 구조적으로 후발국과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된다. 나아가 분단 체제에 종속되어 폐쇄적인 사회배외주의에 매몰되는 현상은 계급적·혁명적 단결을 와해시킨다는 점에서 지배 계급의 논리와 다름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한편, 중동 분쟁(이란·팔레스타인 문제)은 사우디, 이스라엘, 이집트 등 석유 자본을 독점해 온 기업들과 자원 원조에 의존하는 자본주의 공장 가동에 타격을 입힌다는 점에서 체제 균열의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가 노동 인민의 계급적 각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전쟁이 초래하는 고물가와 경제적 부담은 오롯이 민중의 몫으로 남게 된다.

 

한국 사회 역시 과장된 확전 공포와 구질서의 자본주의 정치 제도가 유지되는 한, 그 피해는 항상 소득의 최하층인 노동자와 농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확전의 과장이 끼친 해악은 단순히 인종적·종교적 탄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막대한 전비 지출과 자본 소유의 모순으로 직결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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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가 바뀐 뒤로도 87년 체제의 양당적 대립은 계속되었고, 이 시기 한국의 공화국은 분단 체제를 더욱 고착화했다. 조선의 붕당 정치와 일제의 악습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수립된 현행 정부의 국가적 기조는, 사실상 헌정 질서라는 명목하에 분단을 정당화하고 야기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의 사회주의적 가치가 현재 독일의 경제적 현실과 모순을 빚고 있으나, 과거의 정치가 퇴색할 때 혁명의 성과 또한 그 내용을 달리하며 변화한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언급한 “소비에트를 기억하지 않는 자는 심장이 없고, 그것으로 돌아가려 하는 자는 뇌가 없다”라는 발언의 모순은, 소비에트를 어기고 인민적 독재의 영역으로 나아간 최후를 반복할 뿐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구체제적 정치의 기반은 조선의 정치적 유산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드러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구공화국 시대를 지나 혁명의 시기를 목도하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단순한 흡수 통일이라는 무력화를 내세울 때, ‘이산가족’의 비극은 조선 체제의 유산이 불러온 경제적 비극과도 밀접하다.

 

한국의 의회 정치는 두 조선 국가 모두를 양면적으로만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역설에 착지한다. 이러한 구도하에서 집권 세력은 현상 유지를 반복하며 정부의 반동성을 강화했고, 국민 전반에 짙은 폐쇄성과 취약한 개량적 획일화를 낳았으며, 자유 경쟁의 미덕을 자본주의적 지배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87년 체제는 사실상 유신의 잔재가 남긴 이념적 대립과 반공주의가 결합하여, 체제의 자유가 ‘자본의 제도’로 수용되는 고질적인 독점 문제를 양산했다. 특히 노동 제도의 한계 역시 구시대적 조선 정치의 그림자 아래 자행된 토지 개발, 그리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발생했다. 이는 고립된 지역 노동 인민에 대한 체계적 계급화와, 이를 층위적으로 분류했을 때 드러나는 소득 산정의 평균적 모순을 잘 보여준다. 물론 한국에서 군주제는 폐지되었으나, 의회의 기능은 여전히 조선 체제의 구시대적 틀에 갇혀 제한적이다. 그 구습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유포되었든 아니든, 분단된 두 국가 모두 조선 체제의 고질적인 악습만을 반복하며 역사적 반동성의 최후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서로를 비난하기에 앞서, 과거의 체제를 청산하지 못한 노동 제도와 그 주도권이 각국의 부르주아적 대표자들에게 돌아가 국가 기구를 안주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구조는 충분히 ‘배반적’이다.

 

차기에 부상할 집권 세력에게 더 이상의 권력적 정당성은 없다. ‘구원은 독점에 있다’는 말에 대해 ‘독점은 제국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던 레닌의 지적대로, 제국주의적 독점과 자본에 기댄 구시대적 정치의 여파가 인민을 더욱 옥죄게 왔음을 다시 한번 증명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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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으며, 그 결과와 무관하게 유럽 전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 중동 전쟁의 여파가 각국 민중의 삶에 깊은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의회주의가 사실상 제국주의적 통치 기능으로 변질된 프랑스의 시위 역시 단순한 생태적·기술적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청년층을 중심으로 번져나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물결과 맞닿아 있다. 선진국 대도시에서 분출되는 이러한 투쟁은 급속히 확산하며 전 유럽을 물가 폭등에 맞선 강력한 투쟁의 장으로 전환하고 있다.

 

반면 아시아가 조용하다는 학계 일각의 진단과 달리, 이 대륙은 사회주의 체제 이행기에 수반되는 혁명적 질서의 재편을 심층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이는 오히려 지금까지 축적된 부분적 투쟁의 성과들이 집약된 혁명적 결과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국 상황에 대해 장기적 전망 아래 발발할 혁명의 발아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우 분단 체제와 맞물린 정치 질서 전반에서, 향후 급격한 경제 악화가 결정적 변수로 대두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국민 개개인의 ‘피신’이 아니라, 대의에 동참하는 노동자 계급의 대규모 결의와 투쟁 참가다. 이러한 민중의 요구는 결코 기존의 의회 제도 내에서 만족하여 수렴되기란 극히 어렵다.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포착되는 전 세계적 전조는, 지금까지의 ‘전쟁의 세계’를 이끌어온 구질서와 지배 체제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반발을 담고 있다. 이 거대한 격류 속에서 노후화나 청년 인구 감소 같은 세대 갈등 요소는 상쇄되며, 당면한 현실은 계급 투쟁이라는 단 하나의 지름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우리 당은 이 혁명의 전조를 양분 삼아 차차 전진할 것이다. 구시대의 유물인 국가와 의회 제도가 부르주아 질서를 옹호하는 반동 집단과 결탁해 있는 지금, 한국에서도 혁명의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국가의 본질이란 인민의 계약으로 성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혁명은 단순한 ‘표심의 이동’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다수 인민이 직면한 참담한 현실에 대한 거부이자, 혁명적 질서에 대한 동의로 표출된다. 이 지점은 국가의 성립 기반과 국가 내 인민들 사이에 내재된 계급적 모순과 암묵적으로 충돌해 왔으며, 그것이 가시화될 때 거대한 연속적 사건이자 역사적 현상으로 발현한다.

 

결국 자본주의의 ‘제국적 기생성’이야말로 현대 사회 체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파생된 누적된 제도와 법적 문서들은 그 효력이 다하는 순간, 자본의 내적 모순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의 산물에 불과하다. 이 모순이 극에 달하는 시점을 두고, 한국 사회만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라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착각이자 과오다.

 

이 혁명적 국면은 우리 당의 목적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될 것이다. 부르주아 지식인 집단과 그 일파는 그동안 혁명적 공산당의 존재를 간과하며 관습적인 제도권 정치에 안주하는 패착을 저질렀다. 또한 부르주아 언론은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노동 인민의 자본 노동 피로도를 외면한 채, 사태를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자본의 편을 들었다. 이러한 부르주아적 선동 매체야말로 민중을 압박하고 투쟁을 방해하는 반동적 세력이다.

 

저들은 도시의 약탈과 방화를 우려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기존 정부와 체제가 전체 인민이 아닌 독점 자본만을 위해 작동해 왔음을 상기할 때, 기존의 정부와 현 집권 세력의 정당성과 발언권은 이미 효력을 다했다. 노동 인민의 피를 수혈받으며 기생해 온 자본이 그제서야 현실에 놓인 프롤레타리아의 ‘살인’이라는 생존 위기를 목격할 때, 매체를 앞세워 논란의 불씨만 지피는 궤변만을 늘어놓고 있다.

 

인민의 각성은 이제 더 이상 관제 언론이나 함량 미달의 시민 언론 따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피억압의 식민지 역사에서부터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국호만 바뀐 채 집권 세력의 반동적 질서가 반복되어 온 이 탄압의 굴레를 우리는 뼈 깊이 새기고 있다. 이 시퍼런 사슬에 묶여 눈이 멀어 버린 자들, 부르주아의 영속성에 기대어 우리 당을 향한 적의를 부추기는 이 무지한 반동 세력에 맞서, 우리는 계급적 단죄와 혁명의 불길을 완성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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