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Ⅱ: 정류장

 

 <지구 최후의 계란>을 관람한 뒤한동안 지인에게 보답할 방법을 고민했다당시 방 한편에 놓인 칠판에 지인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확률적으로 계산해보기도 했다치밀한 계산이 오고 갔지만사람 관계라는 것이 결코 산식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건,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식당에 지인을 초대하면서부터였다.

 

어쩌면 무례한 부탁이었을지도 모른다그럼에도 왕복 서너 시간이 걸리는 먼 길을 흔쾌히 오겠다고 답한 건 본인이 아닌 지인이었다적막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손님 맞이를 준비했다예고 없는 방문객은 익숙한 일상이었지만그날만큼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튀김기의 기름 소리가 정적을 채우던 중 전화기 알람이 울렸다늘 먼저 전화를 걸어오는 쪽은 이번에도 지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법 재밌는 상황이었다식당 문앞에서 들어오기를 머뭇거리는 지인을 보고성미 급한 본인이 들어와 식사하라며 인사를 건냈다지인은 무거운 비타민 음료 한 박스를 들고 들어와 우리에게 건넸다그렇게 아버지와의 어색한 첫 대면이 시작되었다오히려 아버지가 먼저 말을 붙이셨다식사 도중에 지인이 갑자기 휴대폰 문자 내역을 보여주는 일도 있었다상황을 빠르게 판단하신 아버지는 한숨을 한 번 쉬시더니 이내 편안하게 자리를 지켜주셨다아버지 덕분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지인을 소개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아버지의 제안으로 본인과 지인은 근처 '별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어색한 침묵 속에서 30-40분 동안 별다른 대화 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지인이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다음 일정을 물었고버스 시간에 맞춰 지인을 정류장까지 배웅했다아마 그것이 마지막 식사였을 것이다.

 

먼 길을 찾아와 다시 긴 시간 돌아가야 하는 정류장에서지인 역시 어떤 심정이었을지 지금의 본인으로는 헤아리기가 어렵다지인에게는 또다른 고된 시간이었을 수도 있기에이 기억을 문장으로 옮길 때만큼은 결코 함부로 대하고 싶지는 않는다지인을 보내고 식당으로 돌아오자아버지는 왜 더 놀지 않고 일찍 왔느냐고 물으셨다그저 설거지나 돕고 싶다고 답하며 부엌 한쪽에 놓인 그릇들을 씻어낸 뒤 아버지와 흡연했다맞담배를 피우는 사이였지만그날은 왜인지 자꾸만 울컥했던 것 같다당황한 아버지가 지인 때문이냐고 물으셨고그렇다고 답하자 아버지는 깊은 함숨을 내쉬셨다차라리 초대하지 말걸아예 신경 끄고 살걸 하는 후회가 당시엔 일었다.

 

그날 이후로 당분간 흡연을 그만두었고 좋지 않은 식습관도 서서히 버렸다. 아마 텅 빈 정류장에 착잡한 마음으로 담배를 태우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지루하고도 지겨웠던 그날의 하루는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사형수의 마지막 식사처럼그때의 연기가 가끔 지워지지 않는다지인이 내 차와 지갑 속 카드를 보며 여유 없음을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지인이 선물한 비타민 음료를 배달원과 나누어 마셨다그래서 이제 흡연 대신 비타민과 운동을 곁에 두려 한다.

 

한겨울 전에, 넌지시 결혼을 일찍 하고 싶다던 지인의 말에 속으로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되뇌던 이는 정작 본인이었다당시 서울에 오히려 가지 않겠다고 고집했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었지만그 지인만큼은 상대에게 먼저 말을 건넬 수 있는 용기를 가진이미 준비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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