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 잉글랜드 은행법 (피일법)의 발휘와 통화주의 정책

 

1847년의 경제 공황 시점 이전에, 1844년에 잉글랜드는 은행법을 발휘하였다. 잉글랜드 중앙 은행에서는 통화주의, 곧 태환권 발행액을 그 정화 준비량에 맞추어 조절하기만 하면 물가가 안정된다는 논리가 학계의 유행처럼 번진 시기였다. 당시 로버트 피일 수상과 오브스톤의 이론적 기초하에 영국 화폐 체계를 금 보유량에 강제로 묶게 된다. 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이 법에 기초하여 은행의 기능으로 발권부와 은행부, 두 부서로 분리시킨다. 두 부서의 업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발권부: 금 보유량만큼만 은행권을 발행한다. (, 금 없이도 발행되는 무담보 발행 한도’를 1,400만 파운드 설정)

 

은행부: 일반 은행처럼 예금과 대출 업무를 수행한다.

 

이 법령이 시행된 이후 1847년 시기처럼 흉작이 다가오면 이를 수습하고자 상인들은 식량을 대량으로 구매하기 위해 금이 해외로 대량 유출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고, 1844년 은행법에 따라 시중의 은행권도 강제로 회수했다. 결국 식량 기근보다 더 극심한 화폐 기근이 발생하였고, 시장에 돈이 마르자 이자율이 폭등하게 된다. 상인들은 자신의 자산 (어음, 상품)이 있음에도 이를 현금으로 교환하지 못해 연쇄적으로 파산한다은행는 폭리를 취하면서도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은행의 법적 한도로 인해 잉글랜드 정부는 더 이상 돈을 풀지 않아도 된다고 표하며, 당장의 식량 구매가 절박한 상인들에게 9-10%의 고율 이자를 받아 챙기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사태는 국가적 파산 위기로 치달았다. 184710월 잉글랜드 정부의 존 러셀 수상은 잉글랜드 은행에 서한을 부치게 된다. 이 서한으로 인해 은행법의 효력은 일시 중지되었고, 영국 전역의 금융 시장뿐만 아니라, 전 세계 상업계도 이 법적 효력이 발휘되었다. 그 서한금 보유량과 상관없이 돈을 더 찍어내라는 내용이었다. 수상의 서한이 발표되자,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상인들의 안도감과 더불어 공황은 진정되었다. 이는 공황의 원인이 실물 자본의 부족이 아닌, 인위적인 화폐 공급의 차단이었음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1874 은행법을 발휘한 오브스톤은 돈의 양은 금의 양과 같아야 한다.는 강제적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실제 경제에서는 자본의 운동 속도가 화폐의 양보다 더 중요했다. 그는 이 법이 가져올 파국을 예상하지 못했고, 그가 법정의 심사를 받게 될 때에도, ‘자본의 가치 상승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자신의 주장을 번복할 뿐이었다. 그것은 자본가 및 은행 주주들의 배당금을 실질적으로 7-9%로 올리기 위한 기획이었을 뿐이었다.

 

존 러셀 수상의 서한

 

존 러셀 수상의 서한은 수신인상으로는 잉글랜드 은행에 보낸 것이었지만, 그 효과와 실질적 대상은 영국 전역의 금융 시장과 전 세계 상업계를 향했다. 18471025, 존 러셀 수상과 찰스 우드 재무장관은 잉글랜드 은행 총재와 부총재에게 공식 서한을 보내게 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금융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1844년 은행법이 규정한 발행 한도를 넘겨서라도 상인들에게 대출을 해주고 어음을 할인하라.’

 

이를 시행한 정부는 이로 인해 법을 위반하게 된다면, 정부가 의회에 사후 면책을 요청하여 책임을 지겠다고선언하기에 이른다. 비록 서한은 은행에 전달되었지만, 이 소식은 발표 즉시 시장의 공포를 잠재웠다. 신용의 회복 관점에서 당시 시장은 현금을 구할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정부가 무제한으로 돈을 풀겠다고 발표하자, 사람들은 수중에 움켜쥐고 퇴장시킨 화폐를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당시 영국은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다. 영국의 금융 마비가 풀림으로 인해 영국과 거래하는 전 세계 모든 상인들에게도 대금이 결제될 것이라는 일시적인 안도감을 주게 된다.

 

오브스톤의 단언과 상인의 경제적 난경

 

존 러셀의 서한은 이러한 경제 공황을 화폐를 대량으로 유출시켜 상황을 안정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1844년 은행법의 효력과 맞물려 더 큰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 오브스톤은 이자율이 높은 이유가 단순히 자본이 부족한 자연적인 현상이라 주장했지만, 이자율이 떨어지고 공황이 진정된 것은, 위기의 원인이 자본 부족이 아니라, 1844년 은행법에 따른 화폐 공급 차단이었음을 드러낸다. 행정적으로는 잉글랜드 은행에 보낸 법 집행 정지 명령이 사회·경제적으로는 전 세계 시장에 보내는 신용 보증서로 작동하였기에, 러셀의 서한은 잉글랜드 은행의 닫힌 금고문을 결국 열게 되었고, 신용의 귀환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상인들이 겪은 난관의 핵심은 자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본의 형태를 교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강제된 고금리에 따라 이미 상품 (면화, 설탕 등)을 상당히 보유한 자본가이었다. 하지만 수중의 빚을 갚으려면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당시 은행법은 금 유출 시 화폐 발행을 엄격히 제한하였으므로, 시장에는 화폐가 귀해진다. 이때 은행은 상인에게 현금이 급하면 10% 이자를 요구하게 된다. 통상 상인의 이윤율이 7%라고 전제하면, 이자율이 10%가 되는 순간, 상인은 물건을 팔아도 손해를 보게 된다. 이는 상인이 창출한 가치를 은행이 이자라는 명목으로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자산 투매가 영웅적 희생이라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이자율을 감당하지 못한 상인들은 파산을 면하기 위해 수중에 가진 상품 등을 헐값게 시장에 투매하게 된다. 오브스톤은 이를 경제 정화라고 불렀지만, 그 실상은 상인의 실물 자본을 금융 회사가 헐값에 흡수하는 과정이었다.


1844년 은행법의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오브스톤의 시각은 어음 할인이 자본이 없는 자가 타인의 자본을 단순히 빌리는 '추가 자본 확보' 행위라고 여겼지만, 어음의 할인의 본질은 상인이 보유한 자산 (상품)을 지불 수단 (현금)으로 형태 변환하는 과정일 뿐이다. 공황기에 상인들은 높은 이자율을 감수하는 것은 자본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장 빚을 갚을 화폐 '유동성'이라는 퇴로마저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오브스톤은 공황기를 단순한 추가 차입 현상이라 여기며 외면하였다. 


은행의 이윤율 폭리 형태: 공황이라는 수익 모델

 

오브스톤의 동료 코튼이 증언하였지만, 1847년의 위기 역시 잉글랜드 은행 주주들에게는 축제의 시간이었다. 투기한 배당률이 역으로 상승하면서, 실물 경제가 파탄이 난 1847년 잉글랜드 은행의 배당률은 7%에서 9%로 상승한다. 상인들의 기업들이 쓰러질 때 은행은 고금리 이자 놀이를 감행하며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세금 대납의 특권으로, 주주들이 직접 내야 할 소득세를 은행이 대신 내주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위기 시기에 금융 자본이 과도한 잉여 이익을 독점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44년 은행법이 바로 잉글랜드 은행에 의한 독점적 발권력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순간이었다. 경제 위기가 오면 공급을 줄여 가격 (이자율)을 높이고, 정부가 무슨 식으로든 서한을 보내 구제해줄 것을 알기에 은행은 아무런 위험 부담 없이 폭리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폭리의 형태는 금융 자본가들의 기본 시각으로 형성되었고, 주주의 소득세까지 은행에 대납하는 특혜를 누렸다. 결국 1844년의 은행법과 맞물려 이들의 이윤을 더욱 남기게 된다. 이러한 폭리 취득 형태까지 실무적 시각까지 다루면서 그들의 법적 정당화를 강변하는 일까지 나타난다. 


현대적 함의: 자본의 수집가들


시사점이 있다면 현대에는 이것이 발전하여 대자본가들과 일부 금융 자본가들이 보유한 수집 경로는 이러한 식으로 경제 위기를 의도적으로 발생시키거나, 이자율 폭리를 취하는 형태로 부를 더욱 축적하여 그 부를 소득세의 범위에 제한되지 않는 '예술품 수집'이나 '희귀 장서' 등과 같은 추상적인 실물 자산의 형태로 수집되거나, 고착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표적으로 삼성 일가가 수집한 고가의 예술품 중 715만 9,000달러, 그 당시 한화로 약 86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 소장되어 큰 파장을 일으킨 것도,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비자금 의혹과 자산 가치의 폭등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비자금'이나 '자산 가치'는 이러한 이자율 폭리와 밀접한 관계가 깊다. 공황기일수록 이자율 폭리는 곧 생산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땀과 흘린 피눈물의 가치를 은행 및 금융업자의 수중으로 강제 이전시킨다. 반면에, 상인들은 파산을 면하기 위해 헐값에 상품을 투매하거나, 은행 주주 간의 모의하에 배당률을 상승시킬 수 있다. 이 추가적인 이득은 최종적으로, 생산적 재투자도 아닌, 거물 자본가들의 개인적인 '수집실'로 향하게 된다. 


특히 공황기에는 화폐는 유동적이지만, 가치가 불안정하다. 그러나 예술품이나 희귀 장서 등은 직접적으로 소유되는 실물 화폐보다는 불변적인 또는 '절대적인 가치'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형태의 통로'를 좁히며 상인들의 부를 점차 흡수하면서, 현대의 자본가들은 비자금이나 초과 이윤을 예술품이라는 형태로 전환시키거나, 법적 추적과 과세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자본을 은닉하게 된다. 상인들에게는 '어음을 현금으로 바꾸는 길'을 막아 파산시키고, 자신들은 그 수익으로 '현금을 불멸의 예술품으로 치장하는 행위'에 도전하게 된다. 이러한 심미적 포장은 인적 희생을 가릴 수 있다. 자신들의 약탈적 논리를 '학술적 연구'나 '자본의 법칙'으로 의도적으로 포장하면서 오브스톤과 같은 금융 이론가들처럼 그의 사무실로 도망치거나, 대규모 자본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논란은 예술품이라는 심미적 가치로 종식시킨다. 이처럼 그들의 서재에 꽂힌 희귀한 도서들과 자본가들의 아늑한 거실에 걸린 명화는, 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희생된 생산 계급들의 '실질적 소외', 곧 피눈물을 희석시키는 물신적 장치이다. 그것은 대자본가들의 조세 회피 수단과 자본 지대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경제 위기가 발생하는 원인은 수중에 자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중에 화폐의 운동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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