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생산 양식: 박현채의 난제


경제학계에서 '아시아적 생산 양식'에 대한 해명은 그동안 난제였다. 그 이유는, 『자본』 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들은 Ⅲ권의 '상인 자본' 편을 참조하면서도, 까막눈처럼 다른 산업 분야의 생산력과 관련지어 근대 경제사의 발달 과정이 아시아에서는 자생적으로만 발달했음을 견지했다. 그러나 영국 ·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의 설립 과정에서 인도·중국 등의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상인 무역 거래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신대륙 개척'이 아시아 식민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최근 무렵에 밝혀졌다. 이는 근대 상인 무역만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의 화폐 발달 과정에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다만, 상품의 유통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확립된 시기가 길드 조합이 형성되고 난 이후의 유럽의 식민지 개척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진한 시점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생산 양식이 왜 유럽·아메리카보다 미발달된 생산 양식을 갖고 있었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는 소규모 경제 공동체로 설명된다. 아시아는 아프리카 생산 양식과 비슷한 규모로 시작됐다. 유목민들은 직접 동아시아의 '실크로드', '차마고도' 등을 거쳐 초기 무역 상인에게 이동하여 등지에 정착한 채 동아시아 영토의 대부분은 소국이 성립하였고, 이는 아시아 국가의 역사적 발달 과정으로 설명된다. 


1960년대 박현채 씨는 초기 식민지 봉건제에 대한 연구를 일부 진행하였지만, 그 자신은 국가 생산력도 아닌, 국가 경쟁력에 따라 산업 자본의 발전이 선행한 이후에서야 상업 자본으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상업 자본이 발전한 무역 원조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국내 상업 역사의 발전 과정이 다국가 간의 대외 무역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짚어내지 못하였다. 실제로 박현채와 조희연 간의 '사회 구성체' 논쟁은 1960-1980년대의 경제를 짚어내는 일부 논쟁에 불과했지만, 그 여파는 경제학적 논의도 아닌, 철학적 함구 대상으로만 도배된 상태에서 한국 경제를 모호하게 거론하는 데 그쳤다. 


박현채는 이러한 국가 경쟁력의 토대가 자민족의 고유한 생산력 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높은 대외 의존도가 강한 상태에서의 '상인 자본'과 '산업 자본' 간의 역학 관계를 해명했을 때 비로소 밝혀진다. 물론 반식민지봉건에 대한 일부 견해를 그 자신이 수용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질적인 자본주의 역학 관계에서 아시아의 식민지 형성 과정을 전개할 때만 타당한 주장이 된다. 박현채가 설령 그러한 부분까지 간과했다 하더라도, 한국 산업 혁명 시기가 1960-1980년대 무렵에서야 뒤늦게 발달했다는 점은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공장제 수공업에서 일부 기계제 대공업으로 겨우 전환되어 도입된 시기와도 일치하므로, 이러한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의 극심한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전 세계와의 경쟁력에서 더욱 후진되는 취약한 제도적 약점을 안은 채 현대 사회에 겨우 진입할 수 있었다. 


그가 현대 경제적 지형에서 '중립 지대'를 선택했다면 '인민주의 경제'의 일부로 수렴되는 경향으로, 실제로는 극심한 정부와의 반발 상태에 내몰린 상태에서 후기에는 '민족 경제'를 우호한 측면 역시 배제할 수 없으므로, 그의 입장은 다소 모호하다고 볼 수밖에는 없다.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수용 여부가 직접 거론되지는 않지만, 실제로 그가 개진한 '민족 경제'는 '대한민국'의 형성 과정의 일부로 깊숙하게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국의 산업 지형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다는 말일까. 물론 그가 자신의 경제관을 토대로 한국의 식민지 흡수 과정을 역사적으로 해석했다는 견해는 일부 타당하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 형성 과정과 식민지 건설을 파악하기에 앞서, 이러한 논의 자체가 진영 논리로 흡수되는 과정을 미리 목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그동안 자신만의 논의를 끌어온 것이다. 


자본 공황: 화폐 붕괴, 노동자 대책 부재 및 방치


대체로 경제학자 전반은 공황이 발생하면 수치 환산 불가의 문제로 판단하여 화폐 붕괴의 시점을 일찍 설명하려 들지만, 대부분 그릇된 견해를 갖고 있다. 경제 상승에 동반하는 요인들이 현대에는 다양하듯이, 화폐 가치의 동반 상승률이 꾸준한 채 경제 공황의 타격 이후로 전개될 때는 부의 세습이나, 자본가들의 재산권 등의 법적 관할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는 정치경제학에서 다루는 부분이지만, 자본의 대공황 이후 동시다발적인 전쟁의 위협과 그 발생은 일본의 경제학자들이 해석한 봉건제 식민지의 '개화'라는 토대의 시각과는 결이 다르며, 오히려 경제 공황으로 인한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노동 계급의 정책 마련이 부재한 상태에서 방치되어 초기 대책마저 수립하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 화폐의 대량 생산은 결국 자본의 대공황을 심화시킨 측면으로 나타나며, 이는 상인의 기만성과도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중층 지대'의 원론적 논의로만 해석하는 편협한 일부 시각조차 화폐 붕괴의 시점이 곧 '대종말'을 의미한다고 내세우지만, 정작 화폐 가치가 통용될 수 없던 소규모 공동체를 '원시 사회'로 단순히 일축하고 만다. 더불어, 그것은 산업 발전 시기가 뒤늦게 자리잡은 국내 경제의 해석상의 선입견 및 편견이 만연한 이유와도 같다. 


결국 '시민 혁명'은 일어났다. 1950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미군정의 지도 아래 '대한민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항복 선언'을 받아낸 채 지금의 국가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것은 이후에 '민주화 운동'을 알린 시기와 비슷하며, 그것이 이제는 자본주의의 국가 문제와 동시적으로 겹치게 된 현재 시점에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아시아적 생산 양식 전반은 반대로,  


'근대적 생산 양식의 초기 단계인 공장제 수공업 (매뉴팩처)은 그 성립을 위한 제반 조건이 이미 중세에 형성된 지역에서만 발달하였다. 이는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역사적 대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단행된 상업의 급격한 팽창과 세계 시장의 창출이 낡은 생산 양식의 몰락과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상업적 성취는 기만적으로 이미 존재하던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 위에서 달성된 것이다.'


[『자본』 Ⅲ권: '상인 자본']. 


이것이 곧 화폐 축적이 낳은 자본주의 토대의 단초에서 상업 자본의 형성 배후에 존재하는 '상인'의 국가라는 실체이다.


결론: 북조선의 경제 통계 행방


그렇다면 이러한 공장제 수공업이 기계제 수공업으로 대체된 시기가 아시아 및 아프리카 전반과 대비된다는 점은 이들이 자본 경쟁 사회로의 진입이 뒤늦다는 말일까. 앞서 밝힌 대로, 현대 사회의 시점에서 설명이 되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은 그것이 '낡은 생산 양식'의 오래된 '난제'로만 여겼다는 점이다. 그것이 방치된 결과란 일부 경제학자들이 지닌 구시대적 발상 수준의 역사 논쟁을 지금까지 '재탕'하고 만다. 한국 사회가 박현채의 '민족 경제'가 고착화된 시기와 대조하여 반대로, 우리는 지금 '북조선'의 경제를 언젠가 다룰 시점을 별도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미군정의 치하에 있던 분단 국가의 형성 과정과 더불어 휴전기 이후 남북한의 계급적 차이로 인한 경제 비교 대상은 연구되어야 한다. 여태까지 자본주의적 '흡수 통일'을 기대하는 자본가 간의 논의에서 여전히 배제된 노동자들은 그 대상으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이 지점에서는 백남운, 『조선 경제사』가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이 비록 '숙청 대상'이 된 경제 연구의 은폐 시도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제는 이러한 노력에 조금은 가닿기 위한 우리 사회의 '절실함'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곧 우리가 '이산된 상태에서 남은 虛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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