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꽃': 사무직의 이면


수학에는 '기하학'이라는 분야가 존재한다. 수학자에게는 이 분야가 '수학의 꽃'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자본에도 세부 분야가 존재한다면 '자본의 꽃'이 있을까. 이 시든 꽃은 다름아닌 '상업 자본'이다. 상업 자본이 단기간에 형성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면 바로 직접적인 상품을 제작하는 생산직이 아닌 이러한 거래를 매개하는 사무직들의 환상에서도 비롯된다. 


현대 사회에서 사무직이라 한다면, 주로 은행 업무, 우편 업무, 일반 사무 업무 등이 존재한다. 소상인들은 산업 자본가로 거듭나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여 자본의 독식을 겨우 차지하게 되지만, 사무직들은 그의 하수인들이 되어 생산직과 실제로는 마찬가지로 거래를 납품하거나, 주식을 정산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 전반을 교통 체증과 관료 등에게 바치게 된다. 


'화이트 칼라'라고 불렸던 이전에 양복 신사들은 지금은 복장 자율화가 보편화되었지만,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인 노동은 잡업에 매일 시달리며 야근을 겸할 수도 있다. 이는 야근 수당에 따른 선택이 아닌 필수로 여겨지거나, 퇴근을 '눈치'보면서 챙기는 사무직의 생활로 어느덧 진입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정규직'에 도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산직이 아닌, 그나마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사무직을 대체로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생산직이든 사무직이든 노동자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근로 시간에 불과한 처우이지만, 실제로는 생산직이 기여한 산업 자본과 사무직이 기여한 상업 자본이 모여 총자본의 일부를 형성하며, 이 역시 대자본의 총자본 수익과 잉여 가치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음에, 천문학적인 수치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의도에 가면 15분이라는 짧은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흡연을 고충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사무직에 대한 대우가 높았다면, 지금은 생산직만큼 못하다는 형편에서 실제로 공실의 비율 또한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물론 여전히 노동 인구가 보태졌을 때를 전제하지만, 실제로 도시권이 자랑하는 최상층 건물에 비하면 공실 비율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후술하겠지만, 토지 문제와도 밀접하게 관련 있기 때문에, 국내 자본가들은 지금까지 부동산을 투기 대상으로만 여긴다. 


이 여파는 결국 지금의 결과를 초래했다. 사무직들은 생산직보다 정신적인 면에서 취약하며, 이들은 회사 전반의 문제를 자신의 실수라 여기는 자책의 경향과 높은 직급의 상사에게 시달리며 일생을 보내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대책 역시 지금의 정부 수준에서는 당연한 수순이라 여기며 방치했지만, 사내 복지를 우선시하는 일부 회사가 슬그머니 작업량을 늘리며 이들에게 소화를 요구할 때, 그것의 부담마저 토로할 수 없음은, 밤낮이 전환된 노동자들의 고충에서 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처지와 가족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노동력 상실을 어느덧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이 부족해도 자본은 돌아간다. '아웃 소싱'으로 정평난 개인적 용역 (서비스), 바로 위탁 업체가 이들을 '독한 기생충처럼' 기간제 비정규적으로 고용하기를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통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이들도 회사에서는 '표준적인 규격'으로 생활하게 된다. 특히 연구원들도 이러한 사무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순수 학문에 투자할 시간을 낭비하게 되며, 공인된 자격을 부여받고자 부단히 자신의 연구와 거리가 먼 활동을 펼치게 된다. 특히 일부 과학 연구진들이 보여주는 '형식적인' 연구는 때때로 자원 낭비의 정점이기도 하다. 이처럼, 노동자들의 실상이란 곧 '학문의 자유'가 아닌 '자본의 학문'이 보여주는 바로 그 지점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현재의 노동 계급의 취약함을 설명하기 이전에, 그것을 가로막는 대자본가와 자본의 독점 형태가 여전히 방치되는 이상, 이들 역시 건강한 생활을 보장할 수는 없다. 옥상에서 추락한 한 가장이자 사무원의 비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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