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고려 공산당의 조직적 한계와 민족주의 경향
한국 초기 공산당 건설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 투쟁과 더불어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독립 운동가들의 헌신이라는 성과와는 별개로, 역사적 진행 과정을 객관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 김 알렉산드라와 이동휘가 주도한 고려 공산당은 그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나 조직적 기반은 결코 견고하지 못했다. 이는 볼셰비키 혁명에 입각한 철저한 계급 투쟁 성격보다는 이동휘 개인의 신념과 민족주의적 단결의 목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지식인과 인민을 결집하기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이는 레닌이 지원한 혁명 자금의 횡령 의혹이나 자유시 참변 같은 사건의 단초가 되었다. 본질적으로,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사상적 토대인 계급 해방의 원리를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채, 민족 해방이라는 전근대적 과제에 함몰되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구) 조선 공산당의 결성과 경성 콤그룹의 해체
조선공산당은 고려공산당의 유산을 계승하며 국내 투쟁의 매개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재유의 헌신적인 활동은 이후 박헌영 투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가교가 되었다. 레닌 사후로 스탈린주의 여파 아래 조직의 견고성을 확보하고자 경성 콤그룹과 같은 비밀 결사를 조직했으며, 일제 타도와 더불어 사실상 부르주아 국가 전복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들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자본』을 읽었다. 이들은 이론적 학습을 병행하며 이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나, 핵심 인물인 이재유 체포와 일제 경찰의 집요한 수사로 인해 조직은 필연적인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이 시기 조직의 궤멸 과정을 고찰하는 것은 독립 운동의 한계를 검토하는 동시에, 오늘날 유산 계급 집단이 왜 그토록 공산당 건설에 강력한 거부감을 표하는지 확인하는 핵심적 근거가 된다.
(구) 북조선 사회주의 체제의 정체와 인민주의의 한계
이른바 북한이라 불리는 체제는 국가 내부의 기능을 지속할 동력을 상실한 채 과거의 유산에 고착되어 있다. 유격대 활동은 역사적 전략 면에서 기여한 바가 있으나, 결과적으로 폐쇄적인 국가 구조를 형성하는 데 그쳤다. 더욱이, 공산주의의 본래 취지와 무관하게 권력을 세습하는 구조는 부르주아적 권력 유지 기반을 마련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제한 채 또 다른 형태의 부르주아 국가를 건설한 것에 불과하며, 인민주의가 지닌 사상적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김일성 중심의 유격대 사관은 마오쩌둥의 중국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의 주체성을 제거했고, 공산당 대의가 부패한 세습 자산으로 전락하면서 체제의 역사적 정당성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이처럼, 지금까지 공산당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역사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실감한다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독일의 사례는 현시점의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독은 서독 체제에 포섭되어 흡수 통일의 길을 걸었으나, 실제로는 독일 공산당의 부상 역시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문제로 인해 다시금 중요해진다. 한국의 공산당 건설을 위한 운동은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닌, 현재의 계급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새로운 과제이다. 분단과 전쟁, 그리고 유산 독재의 시간을 지나온 기존의 공산당 건설의 한계와 성취를 토대로 비판적으로 복기하는 작업은 앞으로의 공산당 건설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