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제된 기록
언젠가 너무나 분해서 낙서를 하던 일기장을 모두 찢어 버린 적이 있다. 몇 권의 공책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기록은 모두 지우면 그만이었다. 이번 연말에는 처음 출근을 벗삼던 노동 현장이 생각난다. 지방 대학에서 여유 자금을 위한 임금 노동을 헤매다가 찾은 어느 물류 센터였다. 그날은 지금처럼 쌀쌀한 9월이었다. 긴장을 안으며 간단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곧바로 짐을 나르러 다녔다. 곧바로 배달원 전용 수송 차량에 싣는 작업이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차곡히 짐을 테트리스처럼 쌓았을 때, 어느 관리자는 도대체 서툰 몸으로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보면서 물 하나 건내는 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8시간 이상의 밤샘도 거뜬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 새벽 노동은 80년대 공장 제조 사례와 무관하지 않았다. 노동의 집중은 곧 정신 단결과 같았다. 그 일로 인해 등이 살짝 굽을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 중에 5일 연속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기간제가 아닌 시간제로 노동한 적이 더 많았다. 임금의 산정 방식도 일한 만큼 수령했기에, 노동의 강도 대비 보상은 소비에 비하면 늘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마음을 다치는 일은 현장에서는 부차적인 일이 된다. 밀려오는 화물이 산만하게 쌓여있던 시절에는 그 짐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끝나고 나면 몇 번 잠을 설친 적이 있어, 방학 기간 중에는 시간제로 5일 동안 밤낮으로 2개의 일을 병행하던 동료의 비슷한 사연을 듣곤 했다. 단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임금의 산정 방식 또한 차분하게 고려할 시간마저 없었고, 주어진 조건에 해당하면 무조건 생계가 먼저였다. 지방 대학의 등록금을 감당하기 이전에 겨우 학점을 맞추어 장학금을 탈 수 있었다. 그렇게 짐 싣는 작업을 그만두고, 다음은 동료의 이륜차를 몰 기회가 생겨 잠시 배달일을 하였다. 때가 되었을 무렵에는 군대에 입대해야 했다. 총구 요대 사용과 행군 훈련 중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왼쪽 어깨가 기울어졌다. 보직 특성상 장시간 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최소한 그곳에 남아 있던 부조리만큼은 제거하고자 했다. 온갖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자신의 의견을 제대로 감추는 일은 사회 현장에서 처음 배우게 되었다.
비밀리에, 노동 현장에 근무하면서 가족조차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일한 적을 따로 밝힌 적은 없었다. 몇 번은 경미한 손목 부상이나 장기간 다리 근육 풀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마른 체형이었을 때는 지금 체형보다 더 큰 짐을 옮겨야 했기에 마땅히 도움을 구할 수 없어 큰 위협이 되었다. 영상 속의 현장 시청만으로는 큰 도움 역시 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근 오랜만에 그곳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모든 사업을 처분했기에 그곳의 부름을 받은 듯이 자원했다. 겨우 1일 체험에 불과한 현장 방문으로 다른 보직을 심사 받았다. 면접 이후의 심사 여부는 통과였지만, 그동안 무리했음을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가족이라면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말로만 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퇴근 모습이 여전히 보상에 대한 다음 준비와 어두운 모습으로만 읽혔다. 그래서 더는 할 수 없다고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 그제서야 다른 일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비정규직이나 기간제의 수습 기간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기 이전에, 현장에서 배운 점이라면 오히려 무질서함과 때때로 안면조차 없는 사람들의 반복된 육체 낭비였다. 덕분에, 노조 활동을 관두게 되었고, 가입 여부를 묻고, 다시 신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당 활동은 더 이상 노동자를 대변할 수 없다는 일념 아래로 모아졌다. 노동과 관련된 법적 · 형식적 노동 법률을 권하기 이전에, 그 현장의 ‘개선’이 결국 ‘수용’되어 초과 근무를 유도하기에, 노동에 대한 욕심 역시 더욱 생기기 마련이다. 두 번째는 공사 현장이었다. 건축 기사에게 연장을 구분하지 못해 들은 아주 쓰디쓴 고함과 초보 노동자의 기본적인 시멘트 벽돌 운반 및 삽일은 든든한 아파트의 견고물이 되었다. 부실한 철판 위로 올라갔을 때, 흔들거리는 운반 지게를 등에 메면 이것이 감내해야 할 의무라 여겼다. 당연하게도 더욱 무게가 늘렸을 때는 연신 감사만 짤막하게 전달했다. 일찍부터 쌀쌀한 새벽 대기로 인해 긴장된 몸을 풀 시간마저 제한되어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던 그 고정된 형식이 임금보다 중요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다만 남은 사업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목만이 그 노동을 정당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생애의 봄은 아니, 스물은 그렇게 지나갔다. 서툰 사람에게는 내용조차 빈 종이에 불과하다면, 지금도 현장의 노동이 과연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일이 똑같이 일어났다면 그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가까운 노동자이자 동료가 내 옆에서 의문의 사고를 당해 익명으로 장례식을 방문하여 부조를 했을 때조차, 그것이 주체와 운동이라는 사상보다 더 중요한 태도의 문제로 다가왔다.
현장의 노동 앞에서는 누구나 경직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위안을 보내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 뭉뚱그려진 태도가 철학으로 보이더라도, 어떤 일은 더 이상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그 다짐마저, 때로는 계속해서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어 보람으로 그치고 만다. 그래서 쉬고 싶다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그동안 남들이 먹고, 구경하고, 만난 모두가 소멸되거나 소실된 채 부족한 일로만 받아들였다. 몸이 쓰러지면 각오가 온 몸을 지배했지만, 우스꽝스러운 신세보다 못한 부족한 경력과 실력은, 말 그대로 어디 명함도 못 내미는 일이 되어 지금의 내부 작업을 구성하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묻는다면, 이곳에 태어난 것을 두고 평생 저주하면서 사느니, 내일을 준비하며 그나마 생존할 수 있다는 도달의 순간이나 안도 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진다. 적어도, 가난한 마음의 일부를 이루었다면, 그것이 찢어진 노동 일지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그리고 과거를 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