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농민 토지 수탈

 

잉글랜드에서 농노제는 14세기 말 사실상 소멸했다. 당시 주민의 압도적 다수는, 15세기에 이르러 그 수가 더욱 증대하며, 자유로운 자영농민으로 구성되었다 (봉건적 직함이 그들의 소유권을 아무리 은폐했을지라도). 비교적 대규모 영지에서는 농노였던 베일리프(영주 토지 관리인)가 자유로운 차지 농민으로 대체되었다. 농업 임금 노동자 일부는 여가 시간을 활용해 대토지 소유자의 토지에서 노동하는 농민들로, 일부는 독자적인 진정한 임금 노동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후자는 상대적·절대적으로 소수). 그런데 이 후자 역시 실질적으로는 농민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임금 외에 4에이커 이상의 경작지와 오두막집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들은 다른 농민과 함께 공유지를 이용하며 가축 방목과 재목, 장작, 토탄 등을 조달했다.

 

유럽 전역에서 봉건적 생산은 토지를 최대한 많은 신하에게 분할하는 일을 특징으로 한다. 봉건 영주의 권력은 여타 주권자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지대 크기가 아닌 신하·백성의 수로부터 규정되며, 이는 자영농민의 수에 의존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토지는 노르만 정복(1066) 이후 900개의 앵글로색슨 귀족령을 포함하는 거대한 남작령으로 분할되었음에도, 소농 경영이 여전히 주를 이루었으며, 다만 비교적 큰 영주 직영지가 산재했다. 이러한 상황은 15세기의 도시 번영과 결합하여, 대법관 포테스큐가 저서잉글랜드법의 찬미에서 주장한 인민의 부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자본주의적 부의 여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를 놓는 변혁의 서곡은 15세기 마지막 1/316세기 첫 10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제임스 스튜어트의 적절한 표현대로, ‘곳곳마다 쓸모없이 저택과 성에 가득 차 있던봉건적 가신 집단이 해체되면서, 대량의 무일푼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들이 노동 시장에 유입되었다. 부르주아적 발전의 산물인 왕권은 절대적 주권을 획득하려 노력하며 이 가신 집단의 해체를 폭력적으로 촉진했으나,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규모 봉건 영주들 자신이 왕권과 의회에 완강하게 저항하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토지에 대해 동일한 봉건적 권리를 가진 농민들을 그 토지로부터 축출하고, 공유지를 횡령하면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프롤레타리아트를 창출했다.

 

이 과정은 특히 플랑드르 양모 공장제 수공업의 번영과 그에 따른, 잉글랜드 양모 가격의 등귀로부터 직접적으로 자극받았다. 종래의 봉건 귀족은 거대한 봉건 전쟁으로 소멸되었고, 새로운 귀족은 화폐가 모든 권력 중의 권력이 된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경작지를 목양지로 전환하는 일이 그들의 구호가 되었다. 해리슨의 저서잉글랜드의 묘사(1587)에서 소농 수탈이 국토를 얼마나 파괴했는지 기록한다. ‘우리의 대약탈자들이 그 무엇을 꺼릴소냐!’ 농민의 주택과 노동자의 오두막집을 폭력적으로 헐어버리거나 허물어지도록 방치했다. 해리슨은 이렇게 서술한다.

 

어느 기사령의 현재 상태를 과거의 재산 목록과 비교해보면, 17, 18채 또는 20채의 가옥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잉글랜드에는 지금보다 더 적은 사람이 살았던 적이 없다.’ 도시와 읍 중 일부는 다소 증대했지만, 대체로 완전히 몰락했거나 1/4 또는 1/2 이상 축소되었다. 파괴되어 목양지가 되고 영주의 저택만이 남아 있는 읍들에 관해서는,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옛 연대기 편집자의 한탄은 흔히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이는 생산 관계들의 혁명이 당대인들에게 남긴 인상을 정확히 드러낸다. 대법관 포테스큐와 토머스 모어의 저술을 비교하면 15세기와 16세기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 손턴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잉글랜드 노동 계급은 어떠한 과도적 중간 단계도 없이 황금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추락했다.

 

입법부는 이 거대한 변혁에 놀라움을 표했다. 입법부는 아직 국민의 부’, 곧 자본의 형성과 국민 대중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 및 궁핍화가 모든 국가 정책의 극치로 간주되는 높은 문명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베이컨은 저서헨리 7세의 통치사(1870)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시(1489) 울타리 치기(인클로저)는 점점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노동 없이는 경작될 수 없던 경작지가 소수의 양치기로 쉽게 관리되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계약 기간을 종신, 1년 또는 마음대로 정하는 차지 농장, 곧 대다수의 자영 농민(yeomanry)이 살던 곳이 영주의 직영지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인민은 쇠약해졌으며, 도시, 교회, 십일조 역시 쇠퇴했다. 이 폐해를 시정하려는 당시 왕과 의회의 지혜는 경탄할 만했다. 그들은 인구를 감소시키는 인클로저와 목장 경영에 맞서 대책을 세웠다.’

 

1489년 헨리 7세의 한 법령(19)은 최소 20에이커 토지에 딸린 농민 가옥의 파괴를 일절 금지했다. 헨리 8세 통치 제25년의 법령은 이를 갱신했다. 이 법령은 다수의 차지 농장과 수많은 가축, 특히 양이 소수인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지대가 크게 올랐으나, 경작은 크게 쇠퇴하고, 교회와 가옥들은 파괴되었으며, 놀랄 만큼 많은 인민 대중이 생계 수단을 박탈당했음을 명시했다. 이에 따라, 이 법령은 피폐한 농장의 재건을 명하고, 곡물 경작지와 목장지 사이의 비율을 규정했다. 1533년의 법령은 일부 사람들이 24,000마리에 달하는 양을 소유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그 소유 두수를 2,000마리로 제한했다. 그러나 헨리 7세 이래 150년에 걸친 소규모 차지 농업가와 농민 수탈을 반대한 국민들의 원성이나 입법은 모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성과 없던 비밀을 베이컨은 무심결에 누설한다. 그는 저서 도덕론과 정치론2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헨리 7세의 법령은 일정한 표준의 농장과 농가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사려 깊고 경탄할 만한 것이었다. 곧 농장과 농가에 일정한 비율의 토지를 보유하게 하면서, 신민들로 하여금 풍족하게 살고, 노예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며, 또 쟁기를 단순한 일꾼의 수중이 아니라 그 소유자의 수중에 유지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요구한 것은 이와 반대로, 국민 대중의 예속 상태, 곧 국민 대중을 고용되는 사람으로 전환시키고 그들의 노동 수단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도기에 입법은 또한 농촌 임금 노동자의 오두막집에 최소한 4에이커의 토지를 보장하려 노력했고, 그들의 오두막집에 하숙인을 받아들이는 일을 금지했다.

 

1627년 찰스 1세 통치기에, 폰트밀의 로저 크로커는 폰트밀 토지에 4에이커의 영구 채마밭이 없는 오두막집을 세운 이유로 처벌받았다. 1638년 찰스 1세 통치기에는 옛 법령들(특히 4에이커 토지에 관한 법령)의 준수를 강요하기 위한 칙명 위원회가 임명되었다. 심지어 크롬웰까지도 런던 주변 4마일 이내에 4에이커 채마밭이 없는 가옥 건축을 금지했다. 18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농촌 노동자의 오두막집에 1-2에이커의 채마밭이 없을 경우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자신의 오두막집에 작은 뜰이 있거나,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작은 토지를 빌릴 수 있다면 그는 다행이다. 헌터는 이렇게 말한다.

 

지주와 차지 농업가는 이 점에서는 뜻을 같이한다. 오두막집에 붙어 있는 몇 에이커의 토지는 노동자를 지나치게 독립적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 대중에 대한 폭력적 수탈 과정은 16세기 종교 개혁과 그에 따른 교회 재산의 방대한 횡령에서 강력한 새로운 자극을 얻었다. 종교 개혁 당시, 가톨릭 교회는 영국 토지의 상당 부분을 소유한 봉건적 소유자였다.

 

수도원 등의 해산은 그곳 주민들을 프롤레타리아트로 전환시켰다. 교회 토지는 대부분 왕의 총애를 받는 탐욕스러운 신하들에게 증여되거나, 투기적인 차지 농업가와 도시 부르주아에게 헐값으로 매각되었는데, 그들은 종전의 세습적 소작인들을 대량으로 축출하고 이들의 경영지를 통합했다.

 

법적으로 보장되던 교회 십일조 일부에 대한 가난한 농민들의 소유권 역시 암암리에 몰수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잉글랜드를 순행한 후, ‘도처에 거지라고 외쳤다. 결국 여왕 통치 제43(1601), 정부는 구빈세를 도입하며 극빈층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법령 작성자들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따라서 (모든 관례를 깨고) 어떠한 전문도 없이 그것을 공포했다.’

 

이 구빈세는 찰스 1세 통치 제16(1641)의 제4조례로부터 영구적인 것으로 선포되었고, 실제로는 1834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더 강력하고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종교 개혁의 이러한 직접적인 결과가 가장 오래 지속된 영향은 아니었다. 교회의 재산은 전통적 토지 소유 관계의 종교적 보루였으므로, 이 보루가 무너지자 그 토지 소유 관계 또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다.

 

17세기 마지막 10년까지도 자영 농민층은 차지 농업가 계급보다 수가 더 많았다. 그들은 크롬웰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으며, 매콜리의 고백에 따르더라도, 주정뱅이 귀족이나 그들에게 봉사하는 농촌 목사들(귀족의 버림받은 애첩과 결혼해야 했던)에 비해 형편이 더 나았다. 심지어 농촌 임금 노동자들까지도 공유지의 공동 소유자였다. 그러나 1750년경에 이르면 자영 농민층은 사라졌고, 18세기 마지막 10년에는 농업 노동자의 공유지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여기서는 이 농업 혁명의 순수 경제적 추진력은 무시하고, 다만 이 혁명의 폭력적 수단만을 다룬다.

 

스튜어트 왕정 복고(1603) 이후, 토지 소유자들은 법적 절차를 밟아 약탈을 감행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법적 절차 없이 수행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들은 봉건적 토지 제도를 철폐하고, 국가에 대한 토지의 모든 공납 의무를 폐지했다. 그 대신 농민층과 기타 국민 대중에 대한 과세로 국가에 배상했으며, 봉건적 권리만을 가지고 있던 토지에 대해 근대적 사유권을 확립했다. 끝으로, 그들은 거주 법(거주 이동 금지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타타르 사람 보리스 고두노프의 칙령이 러시아 농민층에 주었던 일과 비슷한 영향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을 잉글랜드 농촌 노동자들에게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명예 혁명’(1688)은 오렌지공 윌리엄 3세와 더불어 지주적·자본가적 잉여 가치 취득자들을 지배층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국유지 횡령을 방대한 규모로 실행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국유지는 증여되거나, 헐값으로 매각되거나, 또는 직접적 횡령으로부터 사유지에 병합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법적 형식을 거의 고려하지 않고 수행되었다. 이렇듯, 사기와 횡령으로 취득한 국유지는, 17세기 중엽 내전에서 상실되지 않은 교회로부터 약탈한 토지와 함께 잉글랜드 과두 지배층의 현재 귀족령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부르주아적 자본가들은 이러한 활동이 특히 토지를 자유 매매의 대상으로 전환시키고, 대규모 농업 생산의 영역을 확대하며, 농촌으로부터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 공급을 증가시키므로 이를 적극 지지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토지 귀족은 새로운 은행 귀족, 막 태동한 대금융업자, 그리고 당시 보호 관세로 보호받던 대공장제 수공업 소유자들의 자연적 동맹자였다. 잉글랜드의 부르주아지는 스웨덴의 도시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주 현명하게 행동했다. 다만 스웨덴의 부르주아지는 오히려 자신들의 경제적 세력의 보루인 농민층과 연합하여, 왕들이 과두 지배층으로부터 왕령을 폭력적으로 탈환하는 것(1604년 이후부터 칼 10세와 칼 11세의 치하까지)을 지지했다는 점이 달랐다.

 

공유지는 (앞서 논의한 국유지와는 별개로) 봉건주의라는 외피 아래 존속했던 고대 게르만적 제도였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공유지에 대한 폭력적 약탈은 대개 경작지를 목양지로 전환하는 일을 수반하며, 15세기 말에 시작되어 16세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 과정은 개인적 폭행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이에 대해 법률은 150년 동안 싸웠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법률 자체가 국민의 공유지를 약탈하는 도구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변화가 있었다. 그렇다고 대규모 차지 농업가들이 자신들만의 별개의 사적 방법들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 약탈의 의회적 형태가 바로 공유지 인클로저 법이다. 이는 지주(국회 의원들)가 인민의 토지를 사유지로 자신에게 증여하는 법령, 곧 인민 수탈의 법령이다.

 

이든은 공유지를 봉건 영주를 대신한 대규모 토지 소유자의 사유지라고 설명하는 자신의 교활한 변호론을 스스로 모순시킨다. 그 자신이 공유지 인클로저에 관한 일반적 의회 법령을 요구하며, 공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회적인 쿠데타가 필요함을 인정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이 공유지를 빼앗긴 빈민에 대해 손해를 배상할할 것을 입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독립적 자영 농민 대신 임의 차지 농업가 (1년 계약으로 토지를 빌리며 지주의 독단적 의사에 좌우되는 예속적인 소규모 차지 농업가)가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유지의 체계적인 횡령은 국유지 약탈과 결합하여 18세기에 자본 농장 또는 상인 농장이라 불리는 대규모 농장의 확대를 크게 조장했으며, 농촌 인구가 공업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로 풀려나는일을 촉진했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나라의 부와 대중의 빈곤이 동일하다는 사실이 19세기처럼 완전히 인식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당시 경제 문헌에서는 공유지 인클로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다. 필자가 보유한 방대한 자료 중에서 당시 상태를 특히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부 발췌를 인용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격분할 필자는 하트퍼드셔의 많은 교구에서 평균 15-150에이커이던 24개의 농장이 3개 농장으로 합병되었다.’고 기록한다.

 

노샘프턴셔와 레스터셔에서는 공유지 인클로저가 극심하게 성행했으며, 인클로저로 생겨난 새로운 영지들은 대부분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이전에는 1,500에이커나 경작되던 많은 영지들이 지금은 50에이커도 경작되지 못하고 있다. 이전 주택, 곳간, 외양간 따위의 폐허만이 이전 주민들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몇몇의 개방 경지 촌락에서는 100호의 집과 가족들이 불과 8-10호로 감소되었다. 15년 또는 20년 전부터 비로소 인클로저가 진행된 대부분의 교구들에서 토지 소유자는 인클로저 이전 개방 경지 시대의 토지 소유자들에 비해 매우 소수다. 이전에는 20-30명의 차지 농업가와 동일한 수의 소규모 소작인 및 소유자의 수중에 있었던 큰 영지들이 인클로저 진행 후 4, 5인의 부유한 목축업자에게 횡령되는 것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이들 모두는 자기 가족과, 고용하고 먹여 살리던 다수의 다른 가족과 함께 자기들의 점유지에서 쫓겨났다.’

 

인클로저의 구실 아래 인접한 지주들이 합병한 토지에는 휴경지뿐 아니라, 공동으로 경작하거나 공동체에 일정한 지대를 지불하고 경작하는 토지 역시 흔히 있었다. 프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여기에서 개방 경지와 이미 개간된 토지의 인클로저를 염두에 두고 말한다. 인클로저를 옹호하는 저술가들조차 인클로저가 대규모 농장의 독점을 강화하며, 생활 수단의 가격을 높이고, 인구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현재 시행되는) 황무지의 인클로저 또한 빈민으로부터 그의 생활 수단의 일부를 약탈하며, 그렇지 않아도 원래 지나치게 큰 농장을 더욱 크게 만든다.’

 

토지가 소수의 대규모 농민 수중에 들어가면, 작은 농민들은 타인을 위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필요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매해야 한다. 이 작은 농민들은 그들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의 생산물과, 공유지에서 기르는 양, , 돼지 따위로 자신과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여 생활 수단을 거의 살 필요가 없던 다수의 소규모 토지 소유자 및 소규모 차지 농업가들이다. 노동에 대한 더 많은 강제가 시행되면서 아마도 더 많은 노동이 수행될 것이다. 도시와 공장제 수공업은 발달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주지와 일터를 찾아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몰려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농장의 집중이 필연적으로 일으키는 결과이며, 실제로도 수년 동안 이 나라에서 그러한 결과가 일어나고 있다.’

 

프라이스는 인클로저의 결과들을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하층 계급의 상태는 거의 모든 점에서 악화되었고,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소규모 차지 농업가는 날품팔이와 고용된 사람의 처지로 전락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생활 유지는 더욱 곤란해졌다.’

 

실제로 공유지의 횡령과 이에 수반된 농업 혁명은 농업 노동자의 상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든 자신의 언급에서조차 그들의 임금은 1765년과 1780년 사이에 최저 한도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공적 빈민 구호금으로 보충되어야만 했다. 그는 그들의 임금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활상의 필요를 겨우 충족시킬 따름이었다.’

 

이제 잠시 인클로저를 옹호하며 프라이스를 반대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본다.

 

개방 경지에서 자기 노동을 낭비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구가 감소했다는 결론은 부당하다. 작은 농민들을 타인을 위해 노동해야 할 사람으로 전환시키면서 더 많은 양의 노동이 발생한다면, 이야말로 국민 (물론 전환된 작은 농민들은 국민에 속하지 않는다)이 원하는 이익이 될 것이다. 그들의 결합된 노동이 하나의 농장에서 사용된다면 더 많은 생산물을 얻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공장제 수공업을 위한 잉여 생산물이 생길 것이고, 그렇게 되면서 우리 국민의 금광 중 하나인 공장제 수공업이 곡물 생산량에 비례하여 증가하게 될 것이다.’

 

신성한 소유권에 대한 가장 파렴치한 침해와 인간에 대한 가장 난폭한 폭행마저도,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필요하다면, 경제학자들은 스토아 학파적 태연자약함으로 이를 바라본다. 이 표본을 우리는 이든 (정치적으로 토리적 경향을 지니며 박애주의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마지막 1/3부터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국민에 대한 폭력적 수탈 과정에서 발생한 수 많은 약탈 행위, 잔인한 행동, 국민의 고난조차도, 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편안한결론을 내리게 했을 뿐이다.

 

경작지와 목장 사이에는 적절한 비율이 설정되어야 했다. 14세기 전체와 15세기 대부분에 걸쳐 농경지 2, 3, 심지어 4에이커당 목장은 1에이커 비율이었다. 16세기 중엽에 이 비율은 경작지 2에이커 대 목장 2에이커로 변동했다. 이후 경작지 1에이커 대 목장 2에이커를 거쳐, 마침내 경작지 1에이커 대 목장 3에이커라는 적당한 비율에 도달했다.’

 

19세기에는 농업 노동장와 공유지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졌다. 최근 일은 고사하고, 1801년과 1831년 사이에 지주들로 구성된 의회가 농촌 주민으로부터 약탈하여 지주들에게 분배한 3,511,770에이커의 공유지에 대해 농촌 주민이 과연 단 한 푼의 배상이라도 받은 적이 있는가. 끝으로, 농촌 주민으로부터 토지를 빼앗은 최후의 대규모 수탈 과정은 이른바 사유지 청소’ (곧 사유지로부터 인간을 청소하여 내쫓는 일)였다. 위에서 살펴본 모든 잉글랜드식 수탈 방법 중에서 청소가 그 절정을 이룬다.

 

앞선 장에서 이미 근대의 상태를 보았듯이, 청소될 독립적 농민이 더 이상 없을 때는 토지로부터 오두막집의 청소가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농업 노동자들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에서 거주할 장소를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진정한 사유지 청소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근대적 낭만주의 문학의 성지인 스코틀랜드의 고지에서 비로소 명확히 드러난다. 거기서 이 과정의 특징은 그 체계적인 성격, 단번에 수행되는 매우 큰 규모 (아일랜드에서는 지주들이 몇 개의 촌락을 일시에 청소했지만,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독일의 공국만한 크기의 지면이 일시에 청소된다는 점), 그리고 수탈되는 토지 소유 형태가 특수하다는 점이다.

 

스코틀랜드 고지의 켈트 사람들은 씨족들로 조직되었으며, 각 씨족은 그들이 정착하는 토지의 소유자였다. 씨족의 대표자인 수장 또는 대인은 이 토지의 명목상 소유자에 불과했으며, 이는 영국 여왕이 국토 전체의 명목상 소유자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잉글랜드 정부가 이 대인들사이의 내전과 대인들이 스코틀랜드 저지 평야를 끊임없이 침입하는 일을 진입하는 데 성공했을 때, 씨족의 수장들은 그들의 종래의 약탈업을 포기하지 않고 다만 그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다. 수장들은 자신의 권위로 토지에 대한 그들의 명목상 소유권을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시켰다. 씨족원들의 저항에 부딪히자 그들은 공공연한 폭력으로 씨족 구성원들을 토지에서 추방하기로 결심했다. 뉴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국 왕도 마찬가지 이유로, 그의 신하와 백성을 바다 속으로 몰아넣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왕위 참칭자의 최후 반란(1745-1746) 직후 개시된 이 혁명의 초기 단계는 J. 스튜어트와 J. 앤더슨의 저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세기에 게일 사람들(스코틀랜드 고지인들)은 토지에서 축출되었을 뿐 아니라 국외 이주마저 금지되었는데, 이는 그들을 글래스고나 기타 공장 도시로 몰아넣기 위함이었다.

 

19세기에 사용된 방법의 한 예로, 여기서는 서덜랜드 공작 부인이 실행한 청소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제학에 밝은 이 인물은 씨족의 수장이 되자마자, 경제적 근본 치료책으로, 서덜랜드 주 전체 (이미 비슷한 과정으로 주민 수가 15,000명으로 감소된 상태)를 목양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1814년부터 1820년까지, 15,000명의 주민, 3,000세대의 가족은 체계적으로 축출되고 소탕되었다. 그들의 모든 촌락은 파괴되고 소각되었으며, 모든 경지는 목장으로 전환되었다.

 

영국 병사들이 이것을 집행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주민들과 싸움까지 벌어졌다. 자신의 오두막집을 떠나기 거부한 노파는 불길 속에서 타 죽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귀부인은 아득한 옛날부터 씨족의 소유였던 794,000에이커의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추방된 주민에게 한 가족당 2에이커씩, 6,000에이커의 토지를 해변에 배당했다. 6,000에이커는 이전에는 황무지였으며, 소유자에게 아무런 수입도 가져다주지 못했던 땅이다. 이 공작 부인은 자신의 고귀한 심정에서 (수세기 동안 자신의 가문을 위해 피를 흘린) 씨족민들에게서 약탈한 전체 토지를 29개의 대규모 차지 목양지로 분할했으며, 그 각 목양지에는 불과 한 가족, 대개는 잉글랜드에서 이주해 온 농장 관리인만이 거주했다.

 

1821년에 이미 15,000명의 게일 사람들은 131,000마리의 양으로 대체되었다. 해변으로 추방된 주민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들은 반은 육상에서, 반은 수상에서 생활했지만, 육상과 해상을 합쳐도 그들 생활비의 절반밖에 충당되지 못했다. 그러나 선량한 게일 사람들은 씨족의 대인에 대한 낭만적이고 산악인 다운 숭배 때문에 한층 더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물고기 비린내가 대인들의 코를 찔렀을 때, 그들은 거기에 돈벌이가 있음을 알아차렸고, 그 해변을 런던의 큰 생선 장수들에게 임대했다. 게일 사람들은 다시금 추방되었다. 결국, 목양지의 일부는 이번에는 사슴 사냥터로 재전환되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잉글랜드에는 참다운 삼림이 없다. 귀족들의 수렵장에 있는 사슴은 체질상 가축이나 다름없으며, 런던 시의회 의원들처럼 살쪄 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는 고귀한 정열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것이다. 1848년 서머즈는 이같이 기록한다.

 

스코틀랜드 고지에서는 새로운 삼림이 버섯처럼 급증한다. 게이크 주변에는 글렌피시와 아드버키의 새 삼림이 존재하며, 최근 조성된 크넓은 황무지인 블랙 마운트도 포함된다. 동쪽(애버딘 부근)에서 서쪽(오번의 암초)에 이르기까지 길게 뻗은 삼림 지대가 형성되었다. 고지의 다른 지역들에는 로흐 아케이그, 글렌개리, 글렌모리스턴 등의 새로운 삼림이 들어섰다. 소경영 농민들의 공동체였던 골짜기에 양이 도입되고, 게일 사람들은 더 척박한 토지로 몰려났다. 이제는 사슴이 양을 몰아내기 시작하며, 게일 사람들을 더욱 척박한 토지, 한층 더 비참한 궁핍으로 몰아넣는다. 사슴 수렵림과 주민은 공존할 수 없다. 어느 한쪽이 반드시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앞으로 1/4세기 동안 수렵장이 과거 1/4세기 동안 발달한 만큼 그 수와 규모가 확대된다면, 게일 사람은 단 한 명도 자기 고향땅에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고지 지주들 사이의 이런 운동은 일부 지주에게는 야망, 수렵 스포츠 따위 때문이지만, 더 실질적인 지주에게는 오직 이득에 착안해 사슴 거래 때문이다. 수렵장으로 변한 고지는 많은 경우 목양지로 임대하는 것보다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수렵지를 구하는 사람들은 돈주머니가 허용하는 대로 값을 지불한다. 스코틀랜드의 고지가 겪는 고통은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들(1066-1154)의 정책으로부터 당한 고통에 못지않게 혹독한 것이었다. 사슴은 더욱 자유로운 놀이터를 얻었으며, 사람들은 점점 더 협소한 지역으로 몰려갔다. 주민의 자유는 하나씩 빼앗겼고, 억압은 나날이 증대되어 간다. 주민의 청소와 축출은 (아메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황야에서 농업상 필연적으로 수목과 수풀을 뽑아 없애는 일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원칙으로 지주들로부터 수행되며, 이 업무는 조용하고 사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 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씨족적 소유의 약탈과 그것의 사적 소유로 전환은 모두 시초 축적의 목가적 방법이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고, 토지를 자본에 결합시켰으며, 도시 산업에 필요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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