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유랑민
농촌 출신이되, 직업은 주로 공업에 종사하는 한 계급을 논한다. 이들은 자본의 경보병이며, 자본의 필요에 따라 이곳저곳으로 내던져진다. 행군이 없을 때, 이들은 진지를 구축한다. 유랑 노동자는 각종 건설, 배수 공사, 벽돌 생산, 석회 굽기, 철도 공사 등에 고용된다. 이들은 전염병의 유격대와 같이 진을 친 부근 일대에 천연두, 티푸스, 콜레라, 성홍열 등을 확산시킨다. 철도 부설처럼 대규모 자본을 투하하는 사업에서 청부업자는 대개 노동자들에게 목조 숙소 등을 제공한다.
갑자기 세워진 이 부락들은 위생 시설이 전무하고, 지방 당국의 통제도 받지 않아 청부업자에게 매우 유리하다. 이는 노동자들을 산업의 병사이자 세입자로 이중 착취하기 위함이다. 목조 임시 숙소의 굴 같은 방이 하나, 둘, 또는 셋인지에 따라 거주하는 인부 등은 방세로 주당 2, 3, 또는 4실링을 지불해야 한다. 일례로, 사이먼의 보고서에 따르면, 1864년 9월 내무 장관 조지 그레이는 세븐옥스 교구 공중 위생 위원회 위원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고발을 접수한다.
‘12개월 전까지 이 교구는 천연두를 알지 못했다. 그 직전, 루이샴에서 톤브리지에 이르는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주요 작업이 도시 바로 인근에서 진행되었고, 전체 공사의 본부가 이 도시에 설치되어 수많은 노동자가 유입되었다. 이들 전체를 수용할 오두막이 부족하자, 청부업자 제이는 공사장 곳곳에 임시 숙소를 세워 노동자들을 거주하게 했다. 이 임시 숙소들은 환기나 하수 시설이 전무했으며, 게다가 초만원일 수밖에 없었다. 세입자는 가족 수에 관계없이, 심지어 방이 두 개뿐인 집에서도 하숙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접수된 의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불행한 사람들은 밤마다 더러운 물구덩이와 창문 바로 아래 있는 변소에서 풍기는 유독한 악취를 피하기 위해 질식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본 위원회는 이 임시 숙소를 방문한 한 의사로부터 고발을 접수한다. 그는 주거 상태를 비통한 언어로 표현하며, 적절한 위생 대책이 마련되지 않을 경우, 매우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것을 우려했다. 청부업자 제이는 약 1년 전, 임금 노동자들이 전염병에 걸렸을 때, 즉시 격리할 수 있는 가옥 한 채를 지을 것을 약속했고, 이 약속을 지난 7월 23일에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지난 약속 이후 천연두가 여러 건 발생하여 두 건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그는 약속 이행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9월 9일, 의사 켈슨은 동일한 임시 숙소들에서 천연두가 또 발생했음을 보고하며, 그곳의 상황이 처참하다고 서신을 보냈다. 내무 장관 각하께 추가로 알리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 교구민들이 치료받는 이 격리소는 수개월째 환자로 계속 만원이라는 점, 금년 4월 1일부터 9월 1일까지 천연두로 인한 사망이 10건 이상이며, 그중 4건이 전염병의 근원지인 위 임시 숙소에서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병이 발생한 가족들이 이를 비밀에 부치려 하므로, 실제 병에 걸린 사람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탄광 및 기타 광산 노동자들은 영국 프롤레타리아트 중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층에 속한다. 그들이 이러한 임금을 얻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주거 실태를 간략히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채광업자(광산 소유자 또는 임차인)는 노동자들에게 제공할 일정 수의 오두막집을 건설한다. 노동자들은 이 오두막집과 난방용 석탄을 ‘무료’로 받는데, 이는 현물로 지급되는 임금의 일부이다. 숙소를 제공받지 못하는 노동자에게는 그 대신, 연간 4파운드가 지급된다.
광산 지역은 광산 노동자뿐 아니라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수공업자, 소매상 등 많은 인구를 빠르게 유인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곳의 일반적인 현상처럼, 이곳 역시 지대가 높다. 따라서 광산 고용주는 최대한 갱구 부근의 좁은 공간에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밀어 넣기 위해 최소한의 오두막집만을 세우려 한다. 새로운 갱이 개발되거나, 낡은 갱이 다시 채굴되기 시작하면 공간은 더욱 좁아진다. 오두막집 건설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관점은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지출 외 모든 것에 대한 자본가의 ‘절욕’이다. 헌터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노섬벌랜드와 더럼의 탄광 및 기타 노동자 주택은 아마도 일반적으로, 몬머스셔의 비슷한 지역을 제외하면, 영국에서 가장 나쁘고 비싼 축에 속한다. 그 열악한 실태는 한 방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점, 좁은 대지 위에 많은 가옥을 밀집시킨 점, 용수 부족과 변소 부재, 그리고 흔히 가옥을 층층이 세우거나, 여러 층의 다락으로 나눈 점 등에서 드러난다. 세입자들은 전체 부락을 주거지가 아닌 야영지처럼 취급하며 생활하고 있다.’
스티븐즈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내가 받은 지시에 따라 더럼 교구 연합의 대다수 탄광 부락들을 방문했다. 극소수를 제외하면, 어느 곳에서도 거주자의 보건을 위한 대책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광부는 광산 임차인 또는 소유자에게 12개월간 묶여 있다. 그들이 불만을 표시하거나 감독의 비위를 거스르면, 감독은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었다가, 다음 해 계약 시 해고한다. 현물 지급 제도 중 인구가 밀집된 이 지방들에서 시행되는 것보다 더 열악한 것은 없다고 판단한다. 노동자는 고용 조건의 일부로 나쁜 환경의 집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고용주 외에는 의문이다. (그는 여러 면에서 농노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고용주는 오로지 자신의 손익 계산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노동자는 또한 고용주에게서 물도 공급받는데, 물의 질이 좋든 나쁘든 그 값을 지불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비용은 임금에서 공제된다.’
자본은 ‘사회 여론’ 또는 심지어 위생 단속 관리들과 충돌하는 경우에도, 노동자의 노동 생활 및 가정생활에 강요된 위험하고 타락하게 하는 조건들을 자신의 이윤 추구에 필요한 것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자본이 공장에서 위험한 기계에 대한 보호 시설을 ‘절제’하는 것이나, 광산 등에서 환기 및 안전 시설을 절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광산 노동자의 주택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추밀원 의무관 사이먼은 자신의 공식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불량한 주택 조건을 변명하는 이유들은 다음과 같다. 광산이 보통 임차 방식으로 채굴되기에, 임차 계약 기간(탄광의 경우, 대개 21년)이 길지 않다. 따라서 노동자 및 (사업이 유인한) 상인과 기타 인구를 위한 좋은 시설의 주택을 건설하는 것이 할 만한 투자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설령, 임차인 자신이 이 점에서 인색하지 않으려 해도, 토지 소유자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다. 이는 토지 소유자가 자신의 지하 소유물을 채굴하는 노동자들이 거주할 아담하고 쾌적한 부락을 지상에 설치하는 특권의 대가로 엄청나게 높은 추가 지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금지적인 가격(터무니없이 높은 지대)은 (실질적인 금지는 아닐지라도) 그러한 조건만 없다면 아담한 주택을 세우려 할 다른 사람들까지 억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 변명의 장단점을 논하거나, 아담한 주택 건설을 위한 추가 지출이 궁극적으로 토지 소유자, 광산 임차인, 노동자, 사회 중 누구의 부담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것은 이 보고서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헌터, 스티븐즈 등의) 첨부된 보고서들에 나타난 수치스러운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이를 제거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토지 소유권은 여기에서 큰 사회적 불의를 저지르는 데 사용된다. 토지 소유자는 광산 소유자로 자신의 소유지에서 노동할 공업 부락을 유치하지만, 이후 지면의 소유자로 자신이 불러들인 노동자들이 거주할 적합한 주택 건설을 저해한다. 광산 임차인(자본주의적 채굴자)은 이러한 이중적 거래에 반대할 어떤 금전적 이해관계도 없다. 그는 토지 소유자의 두 번째 요구가 과도하더라도,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부담되지 않으며, 그 부담을 지는 노동자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자신들의 위생권의 가치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매우 혐오스러운 주택이나 매우 더러운 음료수는 결코 파업의 동기가 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고 있다.’
Ⅳ. 고임금 노동층과 공황의 영향
진정한 농업 노동자로 넘어가기에 앞서, 공황이 노동자 계급 중 최고의 임금을 받는 계급, 곧 노동자 계급의 귀족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을 한 가지 예로 제시한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1857년은 산업 순환의 종결점인 거대한 공황이 발생한 해였다. 다음 공황은 1866년에 발생했다. (많은 자본을 일반적인 투자 분야에서 화폐 시장의 중심지로 몰아넣은) 면화 기근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공장 지방들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약화된 1866년의 공황은 이번에는 주로 금융적 성격을 띠었다.
1866년 5월, 런던의 한 대형 은행 파산이 그 발발의 신호였으며, 그 뒤를 이어, 수많은 투기 회사들이 무너졌다. 파국에 빠진 런던의 주요 생산 부문 중 하나는 철제 조선업이었다. 이 공업 부문의 대형 조선소들은 투기적 호황기에 무제한의 과잉 생산을 했을 뿐 아니라, 신용이 계속 풍부하리라는 예상 아래 방대한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무서운 반작용이 발생하여 조선업 및 기타 런던 공업 부문을 지금까지(1867년 3월 말) 괴롭히고 있다.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866년 말과 1867년 초에 불황의 주요 중심지를 방문한「모닝스타」지 통신원의 상세한 보도에서 다음 내용을 인용한다.
‘런던 이스트 엔드의 포플러, 밀월, 그리니치, 뎁트퍼드, 라임하우스, 캐닝타운 지역에서는 적어도 15,000명의 노동자가 가족과 함께 극도의 궁핍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중 3,000명의 숙련 기계공들은 (6개월간 실업 후) 구빈원 마당에서 돌을 깨고 있었다. 나는 구빈원 문 앞까지 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곳이 배급표를 기다리는 굶주린 군중으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인데, 아직 배급 시간이 되지 않은 때였다. 마당은 큰 사각형을 이루고, 사방에는 차양이 드리워 있었다. 큰 눈더미가 마당 가운데의 포장용 돌들을 덮고 있었다. 마당은 버드나무 울타리로 양의 우리처럼 작은 칸들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이 여기서 작업을 한다. 내가 찾아간 날은 그 우리들이 눈에 덮여 있어 아무도 그 안에 앉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처마 밑에서 포장용 돌을 깨고 있었다. 각자 큰 포장돌 위에 앉아 무거운 망치로 서리 덮인 화강암을 자갈 크기로 깨고 있었다. 그 자갈이 5부셀(약 182리터)이 되어야 하루 작업이 끝나며, 그는 3펜스와 식량 배급표를 받는다. 마당의 다른 한쪽에는 쓰러질 듯한 작은 목조 가옥이 서 있었다. 문을 열자 남자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들은 서로 등을 기대어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낡은 밧줄을 푸는 작업을 하며, 누가 가장 적게 먹고, 가장 오래 일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이는 인내가 이곳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구빈원에서만, 7,000명이 구호를 받고 있었는데, 그중 수백 명은 6-8개월 전만 해도, 이 나라에서 숙련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최고 임금을 받고 있던 이들이었다. 저축한 돈을 모두 소진하고도, 아직 저당 잡힐 물건이 남아 교구의 구호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 숫자는 두 배 이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구빈원을 나와 대부분 단층 가옥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갔는데, 포플러에는 이런 집이 많았다. 나의 안내자는 실업 대책 위원회 위원이었다. 우리가 처음 들어간 집은 이미 27주 동안 실업 상태에 있는 제철공의 집이었다. 그때, 그는 모든 가족과 함께 뒷방에 앉아 있었다. 방에는 아직 약간의 가구가 남아 있었고, 따뜻한 불기운도 있었다. 몹시 추운 날씨였기에, 어린아이들의 벗은 발이 동상에 걸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기운이 필요했다. 불 맞은편에 놓인 대야에는 낡은 밧줄이 담겨 있었는데, 이것을 부인과 아이들은 구빈원에서 받은 구호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풀고 있었다. 주인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빈원 마당에서 일하며, 하루에 식당 배급표와 3펜스를 받고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듯이) 너무나 배가 고파 지금 막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온 참이었다. 그의 점심은 돼지 기름을 바른 몇 조각의 빵과 우유를 넣지 않은 한 잔의 차였다. 우리가 다음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중년 부인이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는 한 마디 말 없이, 우리를 조그마한 뒷방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온 가족이 금방 꺼져가는 난로를 들여다보며 잠자코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의 얼굴과 그 조그마한 방은 (다시는 그런 장면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비애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인은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애들은 26주 동안이나, 전혀 벌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불경기 때 연명이나 할까 생각하여, 경기가 좋은 시절에 저축해 둔 돈 20파운드도 몽땅 없어졌습니다. 자 보십시오.” 하고 거의 외치다시피 말하며, 그녀는 임금과 출금이 모두 제대로 기입된 저금 통장을 내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 적은 재산이 5실링의 최초 예금에서 시작해 어떻게 조금씩 불어 20파운드까지 되었는지, 그 다음은 파운드 스털링에서 실링으로 줄기 시작해 마침내 마지막 기입으로 통장이 한 푼의 가치도 없는 흰 종이쪽지가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족은 구빈원으로부터 구호를 받고 있는데, 그 구호는 하루에 한 번 제공하는 빈약한 식사였다.
우리가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조선소에서 일했던 한 아일랜드 사람의 부인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그 부인은 영양 부족으로 앓고 있었으며, 옷을 입은 채로 한 조각의 천을 덮고 요 위에 누워 있었다. 침구는 모두 저당 잡혀 집에 없었기 때문이다. 불행한 아이들이 그녀를 간호하고 있었으나, 아이들 자신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돌보아 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19주간의 강요된 무위도식이 그들을 이 처지에 이르게 했다. 부인은 가슴 아픈 과거사를 이야기하면서, 더 나은 미래에 대해 모든 희망을 잃은 듯이 신음했다. 그 집을 나왔을 때, 한 젊은이가 우리에게 달려와 자기 집에 들러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수 없는지 보아 달라고 간청했다. 젊은 아내, 귀여운 두 어린아이들, 한 줌의 전당표 뭉치,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없는 방,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었던 전부였다.’
[「모닝스타」, 1867년, 1월 7일자]
1866년 공황이 남긴 고통에 대해 토리당 계통의 한 신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발췌를 인용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런던의 이스트 엔드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철제 조선업의 장소일 뿐 아니라, 언제나 최저 수준 이하의 임금을 받는 이른바 ‘가내 공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제 수도의 한 부분에서 무서운 광경이 벌어졌다. 이스트 엔드의 수천 명 실업자들이 흑색 조기를 들고, 대중 시위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인파는 정말 사람들을 짓눌렀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무서운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4만 명이나 된다. 우리의 눈앞에서, 이 훌륭한 수도의 한 구역에서, 이때까지 이 세계가 보지 못한 미증유의 방대한 부의 축적과 나란히 4만 명의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이런 수천 명이 지금 다른 구역에 침입하고 있다. 항상 반쯤 굶주리고 있는, 그들은 우리 귀에다 자신들의 참상을 고함치며, 하늘을 향해 절규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주택에서 시작하여, 일자리도 발견할 수 없고, 구걸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지방세 납부 의무자들 자신도 교구 측이 요구하는 구빈세 부담 때문에 극빈자가 될 지경에 처하고 있다.’
[「스탠다드」, 1867년, 4월 5일자]
영국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벨기에를 노동자의 낙원으로 묘사하는 일이 유행하고 있다. 이는, 거기에서 ‘노동의 자유’(곧 ‘자본의 자유’)가 노동 조합의 독재나 공장법의 족쇄로부터 제한받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벨기에 노동자의 ‘행복’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한다. 아마도 벨기에의 감옥 및 자선 단체들의 총 감독관이자 벨기에 중앙 통계 위원회의 위원이었던, 고(故) 뒤크페티오보다 이 행복의 비밀을 더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의 저서 『벨기에 노동자 계급의 가계부』(브뤼셀, 1855)를 살펴본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벨기에 표준 노동자 가족의 연간 수입과 지출이 매우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되어 있으며, 그들의 영양 상태를 병사, 선원, 죄수의 영양 상태와 비교한다. 그 가족은 ‘아버지, 어미니와 4명의 아동’ 총 6명이다. 전제 조건은 다음과 같다.
· 이 6명 중 4명이 1년 내내 벌이가 있다.
· 병자도, 노동 불능자도 없다.
· 매우 적은 교회 헌금을 제외하면, 종교적, 도덕적, 지적 목적을 위한 지출도 없다.
· 저축 은행이나 연금 기관에 예금하지 않는다.
· 사치스러운 지출이나 기타 쓸데없는 지출도 없다.
다만, 아버지와 장남은 담배를 피우고, 일요일에는 맥주 집에 가며, 그 때문에, 매주 86상팀(1프랑의 1/100)을 지출해야 한다.
‘각종 생산 부문의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을 종합해 보면, 최고 임금의 하루 평균은 남자 1프랑 56상팀, 부인 89상팀, 소년 56상팀, 소녀 55상팀이다. 이에 따라 계산하면, 가족의 연간 수입은 가장 많아야 1,068프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전형적인 가계가 얻을 수 있는 모든 수입의 총계를 계산했다. 그러나 어머니도 임금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살림살이를 보살필 사람이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누가 집을 보살피고, 아이들을 돌보며, 식사를 준비하고, 세탁 및 옷 수선을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가 노동자들 앞에 매일같이 제기된다.’
이 가족의 연간 수입
· 아버지: 1.56프랑씩, 300노동일: 468프랑
· 어머니: 0.89프랑씩, 300노동일: 267프랑
· 아들: 0.56프랑씩, 300노동일: 168프랑
· 딸: 0.55프랑씩, 300노동일: 165프랑
합계: 1,068프랑
노동자가 선원, 병사, 죄수의 식사를 한다고 가정할 경우, 이 가족의 연간 지출액과 부족액은 다음과 같다.
· 선원의 식사 시: 연간 지출액: 1,828프랑, 부족액: 760프랑
· 병사의 식사 시: 연간 지출액: 1,473프랑, 부족액: 405프랑
· 죄수의 식사 시: 연간 지출액: 1,112프랑, 부족액: 44프랑
‘여기서 보듯이, 선원이나 병사는 물론, 죄수의 영양조차 취할 수 있는 노동자 가족은 거의 없다. 1847년에서 1849년 사이 벨기에 죄수는 평균적으로, 하루 63상팀의 비용이 들었는데, 이는 노동자의 하루 생계비보다 13상팀이나 더 많은 금액이다. 물론 죄수의 비용 계산에는 감옥의 행정비와 감시비가 포함되지만, 그 반면에, 죄수는 집세를 물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다수, 아니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는 노동자가 죄수보다 더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그들만이 아는 다음과 같은 방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매일 먹는 양을 줄이고, 밀 빵 대신 호밀 빵을 먹는다. 고기, 버터, 채소도 적게 먹거나 전혀 먹지 않는다. 가족들을 한 방이나 두 방에 몰아넣으며, 거기에서는 흔히 하나의 요 위에서 젊은 남녀들이 같이 잠잔다. 그들은 의복, 세탁, 청결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고, 휴일의 소풍도 단념한다. 간단히 말해, 매우 고통스러운 궁핍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일단 노동자가 이 마지막 한계에 도달하면, 식료품 가격의 아주 사소한 인상, 일자리를 아주 짧게 잃게 되는 경우, 또는 아주 사소한 질병이 발생하더라도, 그의 빈궁은 증대하고, 그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빚은 쌓이고, 돈을 빌릴 길은 막히며, 매우 필요한 의복과 가구는 전당포로 간다. 그래서 마침내 가족들은 구호 빈민 명단에 등록하게 된다.’
사실 이 ‘자본가들의 낙원’에서는 생활 필수품 가격이 조금만 변동하더라도, 사망자 수와 범죄 건수에 변동이 일어난다!
[협회의 선언문: 「플랑드르사람들이여 앞으로!」브뤼셀, 1860, 13-14면].
전체 벨기에 세대수는 930,000세대이며, 공식 통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부유한 세대 (선거권자): 90,000세대 (인원수는 450,000명).
· 하층 중간 계급 (도시와 농촌): 390,000세대 (인원수는 1,950,000명).
이들 대부분은 끊임없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로 떨어지고 있다.
· 노동자: 450,000세대 (인원수는 2,250,000명).
이들 중 전형적인 세대가 뒤크페티오가 서술한 행복을 누린다.
노동자 세대 450,000세대 중 200,000세대 이상이 구호 빈민 명단에 올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