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투쟁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투쟁은 자본 관계가 성립된 첫날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공장제 수공업 시기 전체를 거치며 맹렬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기계가 도입된 때로부터 비로소 노동자는 자본의 물질적 존재 형태인 노동 수단 자체에 대해 투쟁하게 된다. 노동자가 노동 수단의 이 특정 형태(기계)에 도전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물질적 기초이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유럽 거의 전체는 리본 및 레이스 직조 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겪었다. 리본 직기는 독일에서 발명되었다. 이탈리아 신부 란첼로티는 1636년, 베니스에서 발간된 책(1629년에 저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치히의 안토니 뮐러는 약 50년 전에 단치히에서 한 번에 4-6필의 직물을 짜내는 매우 정교한 기계를 보았다. 그런데 그 도시의 시장은 이 발명으로 말미암아 다수의 노동자가 거지로 될 것을 우려해 그 기계의 사용을 금지하고, 발명자를 몰래 목 졸라 죽이거나, 물에 던져 죽이도록 했다.’
라이덴에서는 레이스 직공들의 저항으로 시 의회가 그 기계의 사용을 금지했기에, 1629년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복스호른은 『정치 제도, 암스텔담, 1663』에서 라이덴의 리본 직기 도입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도시에서 약 20년 전에 한 명의 직공이 다수가 동일한 시간에 생산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직물을 더욱 쉽게 생산하는 직기를 발명했다. 그러나 이는 직조공들의 불평과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시 의회는 이 직기의 사용을 금지했다.’
네덜란드 입법·행정부는 1623년, 1639년 등의 각종 법령으로 그 기계 사용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으나, 결국, 1661년 12월 15일의 법령으로 일정한 조건 아래 허가하게 된다. 이 기계는 1676년에 쾰른에서도 금지되었는데, 그때 영국에서도 그 도입으로 노동자들의 소요가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1685년 2월 19일의 칙령으로 전국적으로 사용이 금지되었다. 함부르크에서는 시 의회의 명령으로 기계가 대중 앞에서 소각되기도 했다. 칼 6세는 1719년 2월 9일에 1685년의 칙령을 갱신했고, 작센에서는 1765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 기계의 공공연한 사용이 허가되었다. 세상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든 이 기계는 사실상 방적기와 직기, 따라서 18세기 산업 혁명의 선구자였다. 그것은 직조에 전혀 경험이 없는 소년이라도 운전 자루를 밀고 당기면서 모든 방추와 함께 전체 직기를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의 개선된 형태는 한 번에 40-50필의 직물을 생산했다.
1630년경 한 네덜란드 사람이 런던 부근에 설치한 풍력 제재소는 노동자들로부터 파괴되었다. 또한 18세기 초까지, 영국에서는 수력 제재소가 의회의 지지를 받은 민중의 저항에 부딪쳤으나, 이 저항은 간신히 극복되었다.
1758년 에버레트가 최초로 수력 양털 깎는 기계를 만들었을 때, 10만 명의 실업자가 그 기계를 불태워 버렸다. 당시까지 털 빗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5만 명의 노동자는 아크라이트의 조소기와 소모기에 반대하는 진정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19세기의 첫 15년간, 영국 공장 지구들에서 대규모 기계 파괴는 주로 증기 직기의 사용 때문에 일어났으며,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는 시드머스, 캐슬레이 등의 반(反)자코뱅 정부에게 매우 반동적인 강압 수단을 취할 구실을 제공했다. 노동자가 기계와 자본으로부터 기계의 이용을 구별하고, 따라서 물질적 생산 수단 그 자체를 공격하는 것에서 그것을 이용하는 사회 형태를 공격하는 것으로 옮길 줄 알게 되기까지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공장제 수공업 내에서 임금 때문에 벌어지는 투쟁은 공장제 수공업을 전제하는 것이지, 그 존재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공장제 수공업 설립에 대한 반대는 길드의 장인과 특권 도시들에서 나왔을 뿐, 임금 노동자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장제 수공업 시기의 저술가들은 분업을 주로 노동자의 부족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이해했고, 고용된 노동자들을 쫓아내는 수단으로는 이해하지는 않았다. 이 구별은 명확하다. 예를 들어, 현재 영국에서 50만 명이 기계로 방적하는 면화를 낡은 물레로 방적하려면 1억 명의 노동자가 필요하다고 할 때, 이는 기계가 (사실상 존재한 적도 없는) 1억 명을 대신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방적 기계를 대체하는 데, 1억 명의 노동력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반대로, 영국에서 증기 직기가 80만 명의 직조공을 해고시켰다고 말한다면, 현존하는 기계를 대신하려면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기계로부터 대체되었거나, 쫓겨난 일정한 수의 노동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공장제 수공업 시기에는 비록 부분 노동으로 많이 분할되기는 했지만, 수공업적 노동이 여전히 그 기초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식민지 시장의 수요는 중세로부터 물려받은 비교적 적은 수의 도시 노동자들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다. 또한 진정한 공장제 수공업은 봉건 제도가 해체됨에 따라, 토지에서 추방된 농민들에게 새로운 생산 영역을 열어주었다.
그래서 당시 작업장들에서는 분업과 협업의 적극적인 측면, 곧 노동자들이 더욱 생산적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뚜렷이 드러났다. 그러나 대공업 시기 훨씬 이전부터 협업과 노동 수단의 소수 집중은 (특히 농업에서 발생한 많은 나라에서) 농업 생산 방식, 나아가 농촌 인구의 생활 조건과 취업 수단에 돌발적이고, 폭력적인 대혁명을 야기했다. 다만 이 투쟁은 초기에는 자본과 임금 노동이 아닌 대소 토지 소유자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노동 수단, 양, 말 등으로부터 축출될 때, 이는 산업 혁명의 전제 조건으로 폭력이 직접 동원되는 경우였다. 곧, 노동자들이 먼저 토지에서 추방되고, 그다음에 양이 등장하는 순서다. 영국과 같은 대규모 토지 약탈은 대규모 농업의 활동 무대를 마련하는는 첫 단계가 된다. 따라서 농업 생산 방식의 이러한 파괴는 그 시초에 오히려 정치 혁명의 외양을 갖춘다.
노동 수단은 기계의 형태를 취하자마자, 곧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로부터 자본의 가치 증식은, 기계로부터 생존 조건이 파괴되는 노동자 수에 정비례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 전체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한다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분업은 이 노동력을 특정 도구를 취급하는 완전히 특수화된 기능으로 전환시키면서 일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도구를 다루는 일이 기계에 맡겨지자 노동력의 사용 가치가 사라지고, 따라서 교환 가치도 사라진다. 노동자는 통용할 수 없게 된 지폐와 같이 판매될 수 없게 된다. 노동자 계급 중 기계 때문에 불필요하게 된 부분(곧 자본의 가치 증식에 더 이상 직접 필요하지 않은 인구로 전환된 부분)은 한편으로는, 종래의 수공업적 생산과 공장제 수공업적 생산에 다시 종사하나 기계제 생산과의 불평등한 투쟁에서 패배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업 부문에 몰려들어 노동 시장을 범람시키고, 따라서 노동력 가격을 그 가치 이하로 하락시킨다. 빈민화한 노동자들에게 큰 위안거리인 것처럼 거론되는 주장은, 첫째로, 그들의 고통이 일시적이라는 것(‘일시적인 불편’)이며, 둘째로, 기계가 일정한 생산 분야 전체를 오직 점차적으로 장악하기 때문에 기계의 파괴적 작용의 규모와 강도가 완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둘째의 위안은 첫째의 위안을 무효로 만든다. 기계가 어떤 생산 분야를 점차적으로 장악할 경우, 그 기계와 경쟁하는 노동자들은 만성적 빈곤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이행이 급속할 경우에는, 기계의 영향은 심각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미친다. 수십 년 계속되어 오다가 드디어 1838년에야 끝난 영국 수직공들의 점차적인 몰락보다 더 처참한 광경은 세계 역사상에 없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며, 또 많은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오랫동안 하루 2.5펜슬로 연명했다.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면방직 기계는 인도에서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인도 총독은 1834-1835년에 ‘이 재난이야말로, 무역사에 유례가 없을 것이다. 면방직공들의 해골이 인도의 벌판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고 보고했다. 물론 이 방직공들을 이 ‘일시적’인 세상(현세)에서 떠나게 한 것에, 기계는 그들에게 ‘일시적이 불편’을 끼쳤을 따름이다. 그런데 기계의 ‘일시적인’ 영향은, 기계가 새로운 생산 영역을 끊임없이 장악해가기 때문에 실제로는 항상 존재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노동 조건과 노동 생산물에 부여하는 (노동자로부터의) 독립성과 (노동자에 대한) 소외성은 기계의 출현과 함께 철저한 적대 관계로 발전한다. 따라서 노동 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폭력적인 저항은 기계가 출현하자 처음으로 나타났다. 노동 수단이 노동자를 파멸시킨다. 물론 이 둘 사이의 직접적인 대립이 가장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새로 도입된 기계가 전통적인 수공업 또는 공장제 수공업과 경쟁할 때다. 그러나 대공업 자체 내부에서도 기계의 계속적인 개량과 자동 체계의 발전은 이와 비슷한 영향을 미친다.
‘기계 개량의 목적은 손 노동을 감소시키고, 인간 장치 대신 철제 장치로부터 생산 과정에서 실적을 올리거나, 생산 연쇄의 고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종래 손으로 움직이던 기계에 증기력과 수력을 사용하는 일은 매일 일어난다. 동력의 절약, 생산물의 개선, 동일한 시간에 생산물의 증대, 또는 아동, 여성, 남성의 축출 등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의 비교적 사소한 개량은 일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언뜻 보면 그다지 대단한 것 같지 않지만,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어떤 작업이 독특한 기민성과 규칙성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그 작업은 (온갖 불규칙성에 휘말리기 쉬운) 노동자로부터 최대한 빨리 떼어 (아동이라도 능히 감시할 수 있을 만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특수한 기계 장치에 넘겨진다. 자동 체계에서는 숙련 노동자는 점점 더 축출된다. 기계 개량은 일정한 결과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성인 노동자의 수를 감소시킬 뿐 아니라, 한 부류의 인간 노동을 다른 부류의 인간 노동으로, 곧 숙련공을 미숙련공으로, 성인을 아동으로,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한다. 따라서 기계 개량은 임금 수준에 새로운 변동을 일으킨다. 보통 뮬을 자동 뮬로 대체한 결과, 성인 방적공의 대부분은 해고되고, 소년과 아동만 남았다.’
공장 제도의 경이로운 팽창력은 축적된 실제 경험, 기존의 기계적 수단, 끊임없는 기술 발전의 결과이며, 동시에 노동일 단축의 압력 아래 공장 제도가 이룩한 큰 발전 결과이다. 그러나 영국 면공업이 절정에 달했던 1860년, 과연 누가 미국 남북 전쟁의 자극 아래 그 뒤 3년 동안 일어난 기계의 비약적 개량과 이에 따르는 손 노동의 축출을 예견할 수 있었겠는가. 이 점에 관련해서는, 영국「공장 감독관 보고서」에서 몇 가지 실례를 드는 것으로 충분하다. 맨체스터의 한 공장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일한 양의 작업을 하는 데, 이전에는 75개의 소면기가 필요했으나, 지금은 불과 12대를 사용하고 있다. 노동자는 14명이 줄었고, 임금의 절약은 주당 £10이다. 낙면의 절약은 면화 소비량의 약 10%에 달한다. 맨체스터의 다른 한 세사 방적 공장에서는 운전 속도를 높이고, 각조 자동 과정을 도입하면서, 한 부문에서는 노동 인원이 1/4, 다른 한 부분에서는 1/2 이상 줄어들었다는 것과, 제2급 소면기를 대신한 정소기는 종전에 소면실에 종사하던 직공들의 수를 크게 감소시켰다는 것을, 본인은 들었다.’
또 다른 방적 공장에서는 ‘직공’의 전반적 절약을 10%로 계산한다. 맨체스터의 방적업자 길모 합명 회사의 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새 기계로부터 우리 송풍실에서 이룩한 직공과 임금의 절약은 1/3이나 된다. 권사기(실 감는 기계)실과 신장기(실을 압착하여 길게 늘이는 기계)실에서는 비용과 직공이 약 1/3 절약되었고, 정방(방적 과정의 최후 공정)실에서는 비용이 약 1/3 절약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 공장의 실이 직조 공장으로 들어가면, 종전의 기계로부터 생산되던 실에서 나온 것보다 더 많은, 더 값싼 직물을 생산한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는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생산은 증가하면서도, 노동자 수는 감소하는 일이 사실상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양모 공장에서는 직공의 새로운 감소가 시작되었는데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며칠 전 로치데일 부근의 어느 학교장이 본인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여학교에서 학생이 많이 감소한 것은 공황 때문만이 아니라 양모 공장의 기계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이로 말미암아 70명의 반일공들이 감소했다)’
다음 표는 미국 남북 전쟁으로 말미암아 영국 면공업에서 일어난 기계 개량의 총결과를 보여준다.
공장 수
잉글랜드, 웨일즈
1856년: 2,046
1861년: 2,715
1868년: 2,405
스코틀랜드
1856년: 152
1861년: 163
1868년: 131
아일랜드
1856년: 12
1861년: 9
1868년: 13
영국 전체
1856년: 2,210
1861년: 2,887
1868년: 2,549
증기 직기 수
잉글랜드, 웨일즈
1856년: 275,590
1861년: 368,125
1868년: 344,719
스코틀랜드
1856년: 21,624
1861년: 30,110
1868년: 31,864
아일랜드
1856년: 1,633
1861년: 1,757
1868년: 2,746
영국 전체
1856년: 298,847
1861년: 399,992
1868년: 379,329
방추 수
잉글랜드, 웨일즈
1856년: 25,818,576
1861년: 28,352,125
1868년: 30,478,228
스코틀랜드
1856년: 2,041,129
1861년: 1,915,398
1868년: 1,397,546
아일랜드
1856년: 150,512
1861년: 119,944
1868년: 124,240
영국 전체
1856년: 28,010,217
1861년: 30,387,467
1868년: 32,000,014
취업 인원 수
잉글랜드, 웨일즈
1856년: 341,170
1861년: 407,598
1868년: 357,052
스코틀랜드
1856년: 34,698
1861년: 41,237
1868년: 357,052
아일랜드
1856년: 3,345
1861년: 2,734
1868년: 4,203
영국 전체
1856년: 379,213
1861년: 451,569
1868년: 401,064
영국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1861년 대비 1868년에 공장 수와 증기 직기 수는 감소했다. 반면 방추 수는 30,387,467개에서 32,000,014개로 증가하며 생산 능력을 확대했다. 이처럼 생산성 증가를 이룸에도 불구하고, 취업 인원 수는 451,569명에서 401,064명으로 5만 명 이상 축소되었다. 기계 개량이 노동력을 축출하면서 생산 능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다.
1861년부터 1868년 사이에 338개의 면공장이 사라졌다. 이는 더욱 생산적이고 규모가 큰 기계들이 소수의 자본가 수중에 집중되었음을 뜻한다. 증기 직기 수는 20,663대 감소했으나, 전체 생산물은 오히려 증가했다. 이는 개량된 직기 한 대가 구식 직기보다 훨씬 더 많이 생산해낸 결과다. 최종적으로, 방추 수는 1,612,547개 증가한 반면, 취업 노동자 수는 50,505명 감소했다. 따라서 면화 공황이 노동자들에게 안겨주었던 ‘일시적’ 빈곤은 기계의 급속하고, 계속적인 발전으로 인해 격화되었고, 결국 영구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기계는 임금 노동자를 과잉으로 만들 우세한 경쟁자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기계는 노동자의 적대 세력이며, 자본은 이 사실을 소리 높이 의식적으로 선언하고 이용한다. 기계는 자본의 독재에 맞선 노동자들의 주기적 반항, 곧 파업을 진압하는 가장 유력한 무기가 된다. 가스켈에 의하면, 증기 기관은 처음부터 ‘인간력’의 적대물이었다. 이는 자본가들이 (겨우 시작된 공장 제도를 위협할 수 있었던) 노동자들의 증대하는 요구를 분쇄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 진압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출현한 발명들(1830년 이래)에 대해서만도 한 권의 책을 쓸 수 있을 정도다. 이 중 우리는 특히 자동 뮬 방적기에 주목한다. 이 방적기가 곧 자동 체계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기 때문이다.
증기 망치의 발명가 네즈미스는 노동 조합 조사 위원회 앞에서 한 진술에서, 1851년 기계 취급 노동자들의 장기간 파업 때문에 그가 도입하게 된 기계 개량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우리의 근대적 기계 개량의 특징은 자동식 작업기 도입이다. 이제 기계 취급 노동자는 자기 자신이 작업하지 않고, 기계의 훌륭한 작업을 감시하는데, 이것은 어떤 소년이라도 할 수 있다. 이제는 오로지 자기의 기능에만 의존하는 노동자 부류는 완전히 사라졌다. 종전에 본인은 기계 취급 노동자 1명당 4명의 소년을 고용했다. 새로운 기계 개량 덕택으로, 본인은 성인 남자의 수를 1,500명에서 750명으로 감소시켰다. 그 결과, 본인의 이윤은 현저히 증대했다.’
유어는 날염업에서 사용되는 날염 기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드디어 자본가들은 이 참을 수 없는 종속 상태(곧 그들로 보아서는 귀찮기 짝이 없는 노동자와의 계약 조건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과학에서 찾으려 했으며, 그래서 얼마 안 가서, 그들은 그들의 정당한 지배, 곧 저급의 구성원들에 대한 우두머리의 지배를 회복했다.’
파업이 그 직접적 계기가 되어, 날실에 풀물을 먹이는 기계를 발명하게 된 것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분업의 낡은 보루 뒤에서, 자신을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던, 불평분자들의 일당은 새로운 기계 기술로부터 측면 공격을 받아, 그들의 방패가 쓸모없게 된 것을 알았으며, 무조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동식 뮬의 발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 사이에 질서를 회복할 사명을 지닌 창조물, 이 발명은 이미 우리가 전개한 학설, 곧 자본은 과학을 자기에게 봉사하게 하면서 불온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
유어의 저작은 1835년에 나왔는데, 이는 공장 제도가 비교적 덜 발전했던 시기다. 그럼에도, 그 저작은 공장 제도를 비뚤어진 시각으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본가적 두뇌의 어리석은 모순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있기에, 여전히 공장 정신의 고전적 표현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자본은 자기가 고용한 과학의 도움으로 ‘불온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언제나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위에서 언급한 ‘학설’을 전개한 뒤, 그는 ‘기계 물리학은 빈민들의 억압 수단으로, 부유한 자본가들에게 봉사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점에 대해 분개한다. 그는 기계의 급속한 발전이 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유익한가를 길게 설교한 뒤,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저항과 파업이 기계의 발달을 촉진시킨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의 폭력적인 저항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경멸할 만한 근시안적 성격을 폭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 쪽 앞에서는 이와 상반되게,
‘노동자들의 그릇된 견해로 말미암은 격렬한 충돌과 중단이 없었더라면, 공장 제도는 훨씬 더 빨리 발전했을 것이며, 모든 당사자들에게 훨씬 더 유익했을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다음으로 그는 다시 외치기를,
‘영국 면공업 지대의 주민들에게는 다행하게도, 기계 개량은 점차적으로만 일어난다.’고 말한다. 나아가, 기계 개량 도입이 성인 노동자를 축출하여 그들의 임금 수준을 낮춘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사실은 기계가 아동 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켜, 아동 노동의 임금 수준을 높인다.’고 반박한다.
이처럼 위로를 베푸는 저자는, 다른 한편으로, 아동 임금이 낮기 때문에 부모들은 자식들을 너무 어려서부터 공장에 보내는 일을 삼가게 된다면서, 낮은 아동 임금을 변호하고 있다. 그의 저서 전체는 무제한의 노동일을 옹호하며, 의회가 13세 아동을 하루에 12시간 이상 혹사하는 일을 금지하는 것은 중세의 암흑 시대를 다시 불러오는 것과 같다고 그의 자유주의적 정신은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하느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기계로부터 노동자들에게 자기들의 ‘불멸의 이익’에 관해 생각할 여가를 주었기 때문이다.
15-6. 기계가 쫓아내는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 이론
제임스 밀, 매컬록, 토렌즈,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 다수는 노동자를 축출하는 모든 기계가 동시에,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 쫓겨난 노동자들을 취업시킬 자본을 방출한다고 주장한다.
양탄자 공장 자본가가 노동자 100명에게 연 3000원의 가변 자본(노동자당 30원)을 지출한다고 가정하자. 그가 노동자 50명을 해고하고, 나머지 50명에게 1,500원짜리 기계를 도입하면(건물, 석탄 등은 무시하고, 원료 비용은 이전과 같이 3,000원이라 가정) 자본의 구성이 변한다. 종전에는 총 6,000원의 자본이 불변 자본 3,000원과 가변 자본 3,000원으로 나뉘었다. 이제 총 6,000원 중 불변 자본은 원료 3,000원과 기계 1,500원을 합한 4,500원이 되고, 가변 자본은 1,500원에 불과하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의 일부가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동력과 교환되지 않는 형태로 묶이는 것을 의미하며, 곧 가변 자본이 불변 자본으로 전환된 것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이 6,000원의 자본은 5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다.
기계가 개량될 때마다, 자본은 더욱 적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게 된다. 새로 도입되는 기계의 가치가 쫓아내는 노동력 및 노동 도구 가치의 총액보다 적다면(예: 1,500원이 아닌 1,000원), 1,000원의 가변 자본은 불변 자본으로 전환되어 묶이고, 500원의 자본은 풀려난다. 이 풀려난 500원은, 연간 임금 수준이 이전과 같다 해도, 해고된 50명 중 약 16명보다 적은 수의 노동자만을 고용할 수 있는 기금을 이룬다. 이는 풀려난 500원 자본으로 전환될 때, 그 일부가 다시 불변 자본으로 전환되어야 하므로, 나머지 부분만이 노동력(가변 자본)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계 생산이 더 많은 기계 제작 노동자를 취업시킨다 해도, 이는 길거리로 내쫓긴 양탄자 제조공들을 보상하지 못한다. 기계 제작에 고용되는 노동자 수는 기계 사용으로 인해 축출되는 노동자보다 적을 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전에는 해고된 양탄자 제조공들의 임금만을 대변했던 1,500원이, 이제는 기계의 형태로 세 가지 요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1. 기계 제작에 쓰인 생산 수단의 가치
2. 기계를 생산한 기계 제작 노동자들의 임금
3. 이들의 ‘고용주’에게 돌아가는 잉여 가치
게다가 기계는 한 번 제작되면 마멸될 때까지 갱신이 필요 없다. 따라서 추가적인 기계 제작 노동자들이 계속 취업하려면, 양탄자 공장주들은 차례로 노동자를 기계로 대체해야만 한다.
사실 기계 옹호론자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자본 풀림이 아니며, 해고된 노동자들의 생활 수단이다. 위의 예시에서, 기계는 노동자 50명을 해고하며, 그들을 다른 자본가들의 처분에 맡길 뿐 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소비로부터 1,500원어치의 생활 수단을 빼앗아 ‘풀려나게’ 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기계가 노동자로부터 생활 수단을 빼앗는 단순하고, 전혀 새롭지 않은 사실이, 경제학자들의 언어로는, 기계가 생활 수단을 노동자를 위해 풀려나게 한다거나, 또는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한 자본으로 전환시킨다고 표현된다. 결국 모든 것은 표현 방식에 달렸다. 나쁜 것도 좋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1,500원어치의 생활 수단은 해고된 양탄자 제조공 50명의 노동으로 가치 증식되던 자본이다. 따라서 이 자본은 50명이 해고되자마자 할 일이 없어지며, 이 50명이 다시 그것을 생산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새로운 ‘투자처’가 발견될 때까지는 정착할 수 없다. 결국, 자본과 노동자는 조만간 다시 결합되며, 그때 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로부터 쫓겨나는 노동자들의 고통은 이 세상의 부와 마찬가지로 일시적이다. 그러나 그 1,500원어치의 생활 수단은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결코 자본으로 대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으로 그들에게 대립했던 것은 지금 기계로 전환된 1,500원이다. 더 자세히 고찰하면, 최초의 1,500원은 50명의 해고된 노동자들이 1년간 생산한 양탄자의 일부를 대변했을 뿐이며, 노동자들은 이것을 고용주로부터 임금(화폐 형태)으로 받았다. 그들은 이 양탄자의 전환 형태인 1,500원으로 동일한 금액의 생활 수단을 구매했다. 결론적으로, 이 생활 수단은 그들에 대해 자본이 아니라 상품으로 존재했으며, 노동자들 자신은 이 상품에 대해 임금 노동자가 아니라 구매자였다.
기계가 그들을 구매 수단으로부터 ‘풀려나게’ 했다는 사실로 인해(기계 때문에 해고되어 임금을 받지 못하므로), 그들은 구매자에서 비(非)구매자로 전환된다. 따라서 해당 상품들에 대한 수요가 감소한다. 이것이 전부다. 이 수요 감소가 다른 방면의 수요 증대로 보상되지 않는다면, 수요가 감소된 상품의 시장 가격은 하락한다. 이러한 상태가 비교적 오래, 그리고 상당한 규모로 지속되면, 그 상품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 또한 해고된다. 종전에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던 자본의 일부는 이제 다른 형태로 재상산된다. 시장 가격이 떨어지고, 자본이 이동하는 동안, 생활 필수품 생산 노동자들도 임금의 일부로부터 ‘풀려날’ 것이다(임금의 일부를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변호론자들은 기계가 노동자들을 생활 수단에서 풀려나게 하면서 동시에 이 생활 수단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자본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수요 공급 법칙으로부터 기계가 도입된 생산 부문뿐 아니라 도입되지 않은 생산 부문들에서도 노동자들을 해고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실은, 기계가 작업장에서 쫓아내는 노동자들이 노동 시장으로 내몰리며, 따라서 자본가가 착취할 수 있는 노동력의 수가 증가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보상으로 묘사되는 기계의 영향은 사실상 노동자들에게 매우 무서운 재난이 된다(이에 대해서는 제7편에서 다룬다).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지적해 둔다. 한 산업 부문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다른 부문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도 있다. 그들이 일자리를 발견하고, 생활 수단과의 결합이 회복된다 해도, 이것은 투자할 곳을 찾는 새로운 추가 자본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 이미 기능했고, 지금은 기계로 전환된 자본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발견하더라도, 그들의 전망은 암담하다. 분업으로 인해 불구자가 된 이 가련한 친구들은 종래 활동 분야 외에서는 거의 가치가 없으므로, (저임금이고, 노동 공급이 과잉인) 일부 저급 부문에서만 고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산업 부문은 매년 새로운 인원을 흡수하며, 이들이 빈자리와 확장에 필요한 인원을 제공한다. 기계가 특정 산업 부문의 노동자 일부를 해고할 때, 위의 새로운 인원들이 빈자리를 찾아 흡수되지만, 최초의 희생자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는 과도기에 그 대부분이 굶어죽고 사라진다.
노동자들을 생활 수단에서 ‘풀려나게 하는’ 원인은 기계 자체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기계는 도입된 부문에서 생산물을 싸게 하고 증가시키지만, (다른 산업 부문에서 생산되는) 생활 수단의 양을 당분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연간 생산물 중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낭비하는 막대한 부분을 무시하더라도, 사회에는 기계 도입 전과 마찬가지로 쫓겨난 노동자들을 위한 생활 수단이 동일하거나 더 많은 양으로 존재한다.
경제학적 변호론자들이 근거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그들은 다음과 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한다.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에 달라붙어 있는 모순과 적대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모순과 적대 관계가 기계 자체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기계 그 자체는 노동 시간을 단축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시간을 연장 시킨다.
· 기계 그 자체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 강도를 높인다.
· 기계 그 자체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노예로 만든다.
· 기계 그 자체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으로 만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기계 그 자체를 고찰해 보면, 이 모든 명백한 모순들은 일상적 현실의 단순한 겉모양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고 간단하게 단언한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몰두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대자가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아닌 기계 그 자체를 반대해 싸운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으로부터 일시적인 불편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 이외의 다른 사용은 있을 수 없으므로, 기계로부터 노동자의 착취는 노동자로부터 기계의 착취와 동일하다. 따라서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처한 실제 상황을 폭로하는 사람은 기계 사용을 전혀 원하지 않는 사회적 발전의 적이 된다. 이는 사람의 목을 자르기로 유명한 빌 사이크스, (디킨스,『올리버 트위스트』의 도둑 수령)의 논법과 정확히 같다.
“배심원 여러분, 이 행상인의 목이 잘린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라 칼의 죄입니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불쾌한 일 때문에 우리가 과연 칼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칼이 없다면, 농업과 공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외과 수술에서 치료에 도움을 주며, 해부학에서는 과학의 도구로 쓰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즐거운 연회석상에서는 아주 좋은 조수가 아닙니까. 칼을 없애 버린다는 것은 우리를 야만 상태로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기계는 도입되는 산업 부문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내쫓지만, 다른 산업 부문에서는 일자리를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기계의 이러한 효과는 이른바 보상 이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기계로 생산되는 온갖 생산물은 손으로 생산되는 같은 종류의 생산물보다 싸기 때문에, 기계가 생산한 상품 총량이 이전의 수공업이나 공장제 수공업이 생산한 상품 총량과 같다면, 노동 지출 총량은 감소한다는 절대적 법칙이 성립한다. 노동 수단(기계, 석탄 등) 자체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 증가는 기계를 사용하면서 절약되는 노동보다 적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계 생산물은 손 노동 생산물만큼 비싸거나, 더 비쌀 것이다. 그러나 감소된 수의 노동자들이 기계를 사용해 생산한 상품 총량은 (기계로 대체된) 수공업 제품 총량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상 훨씬 더 많다. 예를 들어, 기계로 짠 400,000야드의 직물이 손으로 짠 100,000야드의 직물보다 더 적은 노동자들로 생산된다고 가정하자. 4배의 생산물에는 4배의 원료가 필요하므로, 원료의 생산은 4배로 증가해야 한다. 하지만 건물, 석탄, 기계 등과 같은 노동 수단의 경우,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추가적 노동이 증대할 수 있는 한계는, 동일한 수의 노동자가 기계로 생산할 수 있는 제품량과 손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품량 사이의 차이에 따라 결정된다.
기계는 그것이 도입되는 산업 부문에서 필연적으로 노동자들을 내쫓지만, 다른 산업 부문에서는 일자리를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효과는 소위 보상 이론과는 무관하다. 한 산업 부문에서 기계 사용이 확대됨에 따라, 먼저 이 부문에 생산 수단을 공급하는 다른 부문들에서 생산이 증대한다. 이로 인해, 취업 노동자의 수가 어느 정도 증가하는지는, 노동일의 길이와 강도가 일정한 경우, 사용되는 자본의 구성, 곧 불변적 부분과 가변적 부분 사이의 비율에 좌우된다. 또한 취업 노동자 수의 증가는 기계가 그 산업 부문에 이미 어느 정도 침투했는지에 따라서도 현저하게 달라진다. 영국에서 기계 사용이 발전함에 따라 탄광과 광산에서 노동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자 수는 크게 증가했다. 이 증가는 최근 수십 년 동안 광업에 새로운 기계들이 도입되면서 완만해지고 있지만, 기계와 함께 새로운 종류의 노동자, 곧 기계의 생산자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미 기계제 생산이 기계 생산 부문 자체를 더욱 대규모로 장악해 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원료의 경우, 예를 들어, 면방적업의 질풍 같은발전은 미국의 면화 재배와 더불어 아프리카 노예 무역을 크게 부추겼을 뿐 아니라, 노예 증식을 이른바 경계 노예주들의 주요한 사업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790년 미국 제1차 노예 인구 조사에서 노예 수는 697,000명이었으나, 1861년에는 거의 400만 명에 달했다. 다른 한편으로, 기계제 양모 공장의 번영이 경지를 더욱 목양지로 전환시켰으며, 이로 인해, 농업 노동자들의 대량 추방과 그들의 ‘과잉화’가 발생했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아일랜드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감소했으며, 그 인구를 아일랜드 지주와 잉글랜드 양모 공장주들의 요구에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더욱 감소시키는 과정이 오늘날에도 아직 진행 중이다.
기계가 노동 대상의 최종 형태(완성 제품)를 취하기까지 통과해야 할 예비적 또는 중간적 단계들을 장악한다면, 각 단계에서 원료의 생산이 증가하며, 동시에 이 기계 생산 원료를 가공하는 수공업 또는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대한다. 예를 들어, 기계 방적이 실을 아주 싸고 풍부하게 제공했기 때문에 수직조공들은 처음에는 지출을 조금도 늘리지 않으면서 하루 종일 작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수입은 증대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면방직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는 영국에서 제니, 스로슬, 뮬 방적기로 인해 탄생한 800,000명의 면직조공들이 마침내 증기 방직기로부터 파멸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또한 기계로부터 생산되는 의복 재료가 풍부해짐에 따라 남녀 재봉공, 바느질 여공 등이 재봉기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증가했다.
기계제 생산이 비교적 소수의 노동자로 원료, 반제품, 노동 수단 등의 양을 증대시킴에 따라, 이러한 원료와 반제품의 가공은 수많은 분야로 분화된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 부문의 다양성이 증가한다. 기계제 생산은 그것이 장악한 산업 부문들의 생산력을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증대시키기 때문에, 공장제 수공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사회적 분업을 촉진한다. 기계 도입의 직접적인 결과는 잉여 가치와 (잉여 가치가 포함된) 생산물의 양을 증대시킨 것이다. 기계는 자본가들과 그 부속 인력이 소비하는 물건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며, 이 사회층 자체를 증대시킨다. 이들 부의 증가와 (생활 필수품 생산에 필요한) 노동자 수의 상대적 감소는 새로운 사치욕과 이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수단을 낳는다.
사회적 생산물의 더 큰 부분이 잉여 생산물로 전환되며, 이 잉여 생산물의 더 큰 부분은 더욱 섬세하고 다양한 형태로 재생산되고 소비된다. 곧, 사치품의 생산이 증대한다. 생산물들의 섬세성과 다양성은 또한 대공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 시장과의 연관성 때문이기도 하다. 더 많은 외국산 사치품이 국내 생산물과 교환될 뿐 아니라, 더 많은 외국산 원료, 재료, 반제품 등이 국내 산업에서 생산 수단으로 사용된다. 세계 시장에서 이러한 관계들이 발달함에 따라, 운수업에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며, 운수업 또한 많은 새로운 부문들로 세분된다.
노동자 수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생산 수단과 생활 수단이 증대함에 따라, 운하, 부두, 터널, 교량 등과 같이 먼 장래에야 성과를 가져오는 사업들의 확장이 촉진된다. 기계 도입의 직접적인 결과로, 또는 기계가 일으킨 일반적인 산업상 변혁의 직접적 결과로, 전혀 새로운 생산 부문들, 따라서 새로운 노동 분야들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부문들이 전체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가장 발달한 나라들에서도 그다지 크지 않다. 이 생산 분야들에 취업하는 노동자들의 수는 이 분야들이 얼마나 많은 저급 육체 노동을 요구하는가에 정비례하여 증가한다. 현재 이런 종류의 주요한 산업 부문은 가스 제조업, 전신업, 사진업, 항해업, 철도업이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5개 산업 부문의 취업자 총수는 94,145명이다.
· 가스 공업(제조업, 기계 장치 생산, 대리점 등): 15,211명
· 전신업: 2,399명
· 사진업: 2,366명
· 항해업: 3,570명
· 철도업: 70,599명 (이 중 약 28,000명은 주로 미숙련 인부, 관리 사원, 영업 사원 등)
대공업 분야에서 생산력의 비상한 증대는 다른 모든 생산 부문에서 노동력에 대한 내포적, 외연적 착취의 강화를 수반한다. 그 결과, 노동자 계급의 더 많은 부분이 비생산적으로 고용된다. 이에 따라, 과거의 가내 노예는 하인, 하녀, 심부름꾼 등을 포함하는 ‘봉사자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큰 규모로 재생산된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인구 20,066,224명 중 남성은 9,776,259명, 여성은 10,289,965명이다. 이 수치에서 노동 능력이 없는 노약자, 모든 ‘비생산적인’ 부녀자, 소년, 소녀, 아동, 행정 관리, 목사, 법률가, 군인 등 ‘이데올로기적’ 신분, 지대나 이자 형태로 타인의 노동을 소비하는 모든 사람, 그리고 구빈법의 적용을 받는 극빈자, 부랑자, 범죄자 등을 제외하면, 각종 연령대의 남녀 약 800만 명이 남는다. 이 800만 명에는 공업, 상업, 금융 등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모든 자본가들도 또한 포함된다. 이 800만 명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861년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800만 취업 인구 중 분류된 주요 집단은 다음과 같다.
· 농업 노동자(양치기 및 농장 하인 포함): 1,098,261명
· 섬유 공장(면, 양모, 아마, 비단 등) 및 양말, 레이스 제조 취업자: 642,607명
· 탄광 및 금속 광산의 취업자: 565,835명
· 각종 금속 공장 및 금속 공장제 수공업 취업자: 396,998명
· 봉사자 계급: 1,208,648명
섬유 공장과 광산 취업자를 합한 수는 1,208,442명이며, 섬유 공장과 금속 공장 취업자를 합한 총수는 1,039,605명이다. 두 경우, 모두 그 합계는 현대의 가내 노예라 할 봉사자 계급 1,208,648명의 수보다 적다. 이것이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낳은 훌륭한 결과인 셈이다.
15-7. 기계제 생산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의 축출과 흡수. 면공업의 공황
대부분의 분별 있는 경제학자들은 기계의 도입이 기존 수공업 및 공장제 수공업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들은 공장 노동자들의 노예적 상태를 개탄하면서도, 결국 기계가 임금 노예의 수를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킨다는 주장을 최후의 논거로 내세운다. 심지어 기계제 생산에 기반을 둔 공장에서도 일정 기간의 성장기와 과도기를 거치면, 공장 제도가 처음 축출했던 것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혹사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영원성과 운명적인 필연성을 신봉하는 모든 ‘박애가’들이 혐오하는 이 끔찍한 학설을 내세우며, 경제학은 환호한다.
사실상 일부 사례, 예컨대, 영국의 소모사 공장이나 비단 공장에서 보듯, 공장 제도의 급격한 확대는 특정 발전 단계에서 취업 노동자 수의 상대적 감소는 물론 절대적 감소까지 초래할 수 있다. 1860년 의회 명령으로 실시된 영국 전체 공장 특별 조사 결과를 보면, 랭커셔, 체셔, 요크셔의 공장 지구 중 베이커 감독관 관할 구역 652개 공장 중 570개 공장의 현황이 드러난다. 1860년 이 공장들은 증기 직기 85,622대, 방추 6,819,146추, 증기 기관 마력 27,439, 물레방아 마력 1,390, 취업자 94,119명을 보유했다. 그러나 1865년에는 동일한 공장들이 직기 95,163대, 방추 7,025,031추, 증기 기관 마력 28,925, 물레방아 마력 1,445를 가졌으나, 취업자는 88,913명으로 감소했다. 이는 1860년부터 1865년 사이에 증기 직기는 11%, 방추는 3%, 증기 마력은 5% 증가했음에도, 취업자 수는 5.5% 감소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1852년부터 1862년 사이 영국의 양모 공업이 현저하게 확장되었으나, 취업 노동자 수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이는 새로 도입된 기계들이, 이전 시기의 노동을 그만큼 많이 축출했음을 명확히 입증한다’.
공장 노동자 수의 증가는 종종 외관상에 불과하다. 이는 이미 기계제 생산을 하는 공장의 확장이 아닌, 인접 부문들의 점진적인 통합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838년부터 1856년까지 역직기 수와 이에 고용된 노동자 수의 증가는, 면 공장에서는 단순 부문 확대로 이루어졌으나, 다른 공장들에서는 양탄자 직기, 리본 직기, 아마 직기 등 종래 사람의 근육 힘으로 운전되던 기계에 증기력을 작용하면서 나타났다. 따라서 후자에서 공장 노동자 수의 증대는 오히려 수공업과 공장제 수공업의 파멸, 곧 전체 취업 노동자 수의 감소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금속 공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장 종업원이 미성년자, 부녀자, 아동이었다는 사실은 별도로 언급하지 않는다.
기계로 인해 실제로 축출되거나, 잠재적으로 대체될 수 있는 노동자가 많더라도, 공장 노동자 수가 공장제 수공업이나 수공업 노동자의 수보다 많아지는 것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특정 산업에서 공장을 더 많이 짓거나, 기존 공장을 확대하는 경우, 공장 노동자 수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매주 사용하는 자본금 500원 중 이전 생산 방식에서는 불변적 구성 부분이 2/5(200원), 가변적 구성 부분이 3/5(300원)이라고 가정해보자. 곧, 생산 수단에 200원이, 노동력에 300원(노동자 1인당 1원)이 투하된다. 기계가 도입되면 총자본의 이러한 구성은 변화한다.
이제 구성이 예를 들어, 불변 자본 4/5, 가변 자본 1/5로 바뀐다고 가정해보자. 곧, 노동력에는 100원만 투하된다. 이로 인해, 이전에 고용되었던 노동자의 2/3가 해고된다. 다른 생산 조건은 그대로 두고, 공장의 생산 규모가 확대되어 투하된 총자본이 500원에서 1,500원으로 증가하면, 이제 기계 도입 이전과 동일한 300명의 노동자가 취업하게 된다. 사용되는 자본이 더 커져 2,000명이 된다면, 400명의 노동자가 취업하여 이전 생산 방식에서보다 1/3만큼 더 많이 고용된다. 취업 노동자 수는 절대적으로는 100명이 증가했지만, 상대적으로는 (투하된 총자본의 크기에 비해서는) 800명이 감소한다. 왜냐하면, 이전 생산 방식에서는 2,000원의 자본이 400명이 아닌 1,200명의 노동자를 취업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취업 노동자 수의 상대적 감소는 그 절대적 증가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총자본이 증가해도 생산 조건이 변하지 않아 자본 구성이 불변하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기계 사용이 확대될 때마다, 기계, 원료 등으로 구성되는 불변 자본 부분은 증대하고, 노동력에 투하되는 가변 자본 부분은 감소한다. 또한 공장 제도처럼 개선이 끊임없이 이어져 총자본 구성이 그토록 변화하는 생산 방식은 달리 없다. 하지만 이 지속적인 변화는, 이에 못지않게 지속적인 휴식기로 중단된다. 이 기간에는 기존의 기술적 토대 위에서 공장의 양적 확대만이 일어나며, 취업 노동자 수는 증가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면 공장, 양모 공장, 소모사 공장, 아마 공장, 비단 공장에서 노동자 총수는 1835년에 354,684명에 불과했으나, 1861년에는 증기 직기를 사용하는 직조공(남녀 8세 이상)의 수만 230,654명에 달했다. 물론 이 증가는, 1838년 당시 면직물 수직조공(공장 노동자가 아님)이 가족을 합해 이미 800,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대단한 수치는 아니다. 더 나아가, 아시아와 유럽 대륙에서 축출된 수직조공들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논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실제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론적 해명은 추후에 다룬다. 그것은 순전히 공장 제도가 특정 산업 부문에서 기존 수공업이나 공장제 수공업을 희생시키며, 확장하는 동안, 그 성공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대와 화살로 무장한 군대 간 싸움의 결과만큼이나 확실하다. 기계가 활동 영역을 정복하는, 이 첫 시기에는 기계 생산으로 발생하는 엄청난 이윤이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이윤은 그 자체로 자본의 가속도적 축적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 형성되어 투자 분야를 찾는 추가적 사회 자본의 상당 부분을 이 유리한 생산 부문으로 끌어들인다. 이러한 질풍노도와 같은 첫 시기의 특별한 이점은 기계가 처음 도입되는 생산 부문들에서 모두 나타난다. 그러나 공장 제도가 충분히 보급되어 일정 성숙 단계에 도달하고, 특히 공장 제도 고유의 기술적 기초인 기계 자체가 다른 기계로부터 생산되기 시작할 때, 석탄과 철의 생산, 금속 가공, 수송 수단의 혁명이 발생했을 때, 곧 대공업에 상응하는 일반적 생산 조건이 성립되었을 때, 기계제 대공업은 탄력성 (돌발적·비약적 확대 능력)을 획득한다. 이때 이 확대 능력의 한계는 원료의 공급과 판매 시장의 규모만이 설정한다. 한편으로, 기계는 원료의 공급 증대를 직접 촉진한다. 예를 들어, 조면기가 면화 생산을 증가시킨 것처럼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기계 제품의 저렴한 가격과 운수·교통 수단의 변혁은 해외 시장을 정복하는 무기가 된다.
기계제 생산은 타국의 수공업적 생산을 파멸시키면서, 그 나라를 강제적으로 자기의 원료 생산지로 만든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도는 영국을 위해 면화, 양모, 대마, 황마, 남색 원료 등을 생산하도록 강요받았다. 대공업은 자신이 확립된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과잉 인구’로 전환시키며 해외 이민을 강화하고, 타국의 식민지화를 촉진한다. 이 식민지들은 예를 들어, 호주가 양모 생산지로 전환되듯, 종주국을 위한 원료 생산지로 변모한다. 주요 공업국들의 필요에 적합한 새로운 국제적 분업이 탄생하며, 이에 따라 지구의 일부는 (주로 공업을 하는 다른 지역을 위해) 농업을 주로 하는 지역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혁명은 (세계) 농업에 폭넓은 변혁을 가져왔으며, 이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자세히 논의하지 않는다.
1867년 2월 18일, 하원은 글래드스턴의 제의로, 1831년부터 1866년까지 각종 식량(곡물 및 곡분)에 대한 영국의 수출입 통계 자료를 지시했다. 곡분은 곡물 쿼터(Qr.)로 환산되었다.
영국의 연평균 식량 수출입 현황
1831-1835
· 수입(쿼터): 1,096,373
· 수출(쿼터): 225,263
· 수입 초과: 871,110
· 인구(명): 2,462,1107
·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036
1836-1840
· 수입(쿼터): 2,389,729
· 수출(쿼터): 251,770
· 수입 초과: 2,137,959
· 인구(명): 25,929,507
·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082
1841-1845
· 수입(쿼터): 2,843,865
· 수출(쿼터): 139,056
· 수입 초과: 2,704,809
· 인구(명): 27,262,569
·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099
1846-1850
· 수입(쿼터): 8,776,552
· 수출(쿼터): 155,461
· 수입 초과: 8,621,091
· 인구(명): 27,797,598
·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310
미국에서 영국으로 면화 수출량 (단위: lb.)
1846: 401,949,393
1852: 765,630,544
1859: 961,707,264
1860: 1,115,890,608
미국에서 영국으로 곡물 수출량 (단위: cwt = 112 lb.)
1850년
밀: 16,202,312
보리: 3,669,653
귀밀: 3,174,801
호밀: 388,749
밀가루: 3,819,440
메밀: 1,054
옥수수: 5,473,161
비어, 빅(보리의 일종): 2,039
완두: 811,620
콩: 1,822,972
총수출: 35,365,801
1862년
밀: 41,033,503
보리: 6,624,800
귀밀: 4,426,994
호밀: 7,108
밀가루: 7,207,113
메밀: 19,571
옥수수: 11,694,818
비어, 빅(보리의 일종): 7,675
완두: 1,024,722
콩: 2,037,137
총수출: 74,083,441
1851-1855
수입(쿼터): 8,345,237
수출(쿼터): 307,491
수입 초과: 8,037,746
인구: 27,572,923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291
1856-1860
수입(쿼터): 10,913,612
수출(쿼터): 341,150
수입 초과: 10,572,462
인구: 28,391,544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372
1861-1865
수입(쿼터): 15,009,871
수출(쿼터): 302,754
수입 초과: 14,707,117
인구: 29,381,460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501
1866
수입(쿼터): 16,457,340
수출(쿼터): 216,218
수입 초과: 16,241,122
인구: 29,935,404
국내 생산을 초과하는 인구 1인당 소비량(쿼터): 0.543
공장제 생산의 방대한 비약적 확장력과 세계 시장에 대한 의존성은 필연적으로 특정 순환을 야기한다. 이는 열병적인 생산에 뒤따르는 시장에 대한 과잉 공급, 그리고 시장의 축소와 이에 따른 생산의 마비로 이어진다. 산업의 생애는 중간 정도의 활황, 번영, 과잉 생산, 공황, 침체라는 일련의 시기들로 구성된다. 기계가 노동자의 고용과 생활 형편에 가하는 불확실성과 불안전성은 이러한 산업 순환의 주기적 교체로 인해 일상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이다. 번영기를 제외한 시기에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시장 점유율을 둘러싼 맹렬한 투쟁이 벌어진다. 각자의 시장 몫은 생산물이 얼마나 싼가에 정비례한다. 이 때문에 노동력을 대체하는 개량된 기계 사용과 새로운 생산 방식 도입을 위한 경쟁이 일어날 뿐 아니라, 어느 산업 순환에서든 상품 가격을 낮추고자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강제적으로 삭감하려는 국면이 나타나게 된다. 공장 노동자 수가 증가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은 공장에 투하된 총자본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급속하게 증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자 수의 증가 과정은 산업 순환의 호황과 불황으로부터 규정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잠재적으로 대체하거나, 실제로 축출하는 기술적 발전으로부터 끊임없이 중단된다.
기계제 생산의 이러한 질적 변화는 한편으로,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지속적으로 쫓아내고, 새로 들어오려는 인원에 대해 공장 문을 닫아버린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장의 단순한 양적 확대는 내쫓긴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 인력까지 흡수한다.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흡수되고, 축출되며, 배제되고, 재편입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는 산업 노동자들의 구성이 성별, 연령, 숙련도 측면에서 끊임없이 변동함을 의미한다.
공장 노동자의 운명은 영국 면공업의 발달 과정으로부터 가장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다.
1770년부터 1815년까지 45년간 면공업은 불과 5년간의 불황 또는 침체를 겪었으며, 이 기간 동안 영국 공장주들은 기계와 세계 시장을 독점했다.
주요 경제 및 사회 현상
· 1815–1821: 불황 지속
· 1822–1823: 번영
· 1824: 단결 금지법 폐지, 공장의 전반적 대확장
· 1825: 공황 발생
· 1826: 공장 노동자들의 큰 궁핍과 폭동
· 1827: 약간의 호전
· 1828: 증기 직조기와 수출의 큰 증가
· 1829: 인도에 대한 수출 포함, 수출량 역대 최대 기록
· 1830: 과잉 공급된 시장과 심각한 판매 부진
· 1831–1833: 불황 지속, 동인도 회사로부터 인도·중국 무역 독점권 박탈
· 1834: 공장과 기계의 대폭 증가, 노동자 부족, 새로운 구빈법이 농촌 노동자의 공장 지구 이주 촉진, 농촌 지역 아동 실종, 백인 노예 매매 성행
· 1835: 큰 번영, 동시에 면직물 수직조공들의 굶어죽음
· 1836: 큰 번영
· 1837–1838: 불황과 공황
· 1839: 회복세
· 1840: 큰 불황, 폭동, 군대 개입
· 1841–1842: 공장 노동자들의 심각한 궁핍
· 1842: 공장주들이 곡물법 철폐를 강요하고자 공장 폐쇄 및 노동자 해고, 노동자들이 랭커셔와 요크셔 도시로 몰려갔으나 군대에 의해 축출, 지도자들은 랭커스터에서 재판 회부
· 1843: 심각한 궁핍 지속
· 1844: 회복세
· 1845: 큰 번영
· 1846: 초기 호황 지속 후 반동, 곡물법 철폐
· 1847: 공황, '더 큰 빵덩이' (곡물법 폐지 후 약속) 이행 대신 임금 10% 이상 전반적 삭감
· 1848: 불황 지속, 맨체스터 군대 경비
· 1849: 회복세
· 1850: 번영
· 1851: 상품 가격 하락, 낮은 임금, 빈번한 파업
· 1852: 회복 시작, 파업 지속, 공장주들의 외국 노동자 수입 위협
· 1853: 수출 증가, 프레스턴에서 3개월 파업과 큰 궁핍
· 1854: 번영, 시장에 대한 과잉 공급
· 1855: 미국, 캐나다, 극동 아시아 시장으로부터 파산 보도 쇄도
· 1856: 큰 번영
· 1857: 공황
· 1858: 회복세
· 1859: 큰 번영, 공장 증가
· 1860: 영국 면공업 절정에 도달, 인도·호주 등 시장 공급 과잉으로 1863년까지 재고 흡수 불가, 프랑스와의 통상 조약, 공장과 기계의 거대한 증가
· 1861: 호황 얼마간 지속 후 반동, 미국 남북 전쟁, 면화 기근
· 1862–1863: 완전한 붕괴
면화 기근의 특징
면화 기근의 역사는 매우 특징적이어서 간과할 수 없다. 1860년에서 1861년 사이의 세계 시장 상황이 간략히 보여주듯, 면화 기근은 공장주들이 바라던 때에 정확히 닥쳐왔으며, 어느 정도 그들에게 유익했다. 이 사실은 맨체스터 상공 회의소 보고에서 인정되었고, 의회에서 파머스턴과 더비로부터 공표되었으며, 여러 사건들로 확증되었다. 1861년 당시 영국의 면 공장 2,887개 중에는 다수으 소공장이 존재했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보고(그가 관할하는 2,109개 공장 기준)에 따르면, 이 중 392개(19%)는 10 증기 마력 미만을, 345개(16%)는 10-20마력 미만을, 그리고 1.372개(65%)만이 20마력 이상을 사용했다. 이러한 소공장들의 대다수는 1858년 이래의 번영기에 투기업자들(실, 기계, 건물을 제공한 이들)이 창설한 직물 공장으로, 이전의 노동 감독인이나 소자본가들이 운영했다. 이들 소공장주 대다수는 결국 몰락했다. 그들은 설령 면화 기근이 없었더라도 상업 공황(면화 기근으로 인해 지연되었던)으로부터 동일한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조업 중단의 규모를 보면, 1862년 10월에는 60.3%의 방추와 58%의 직기가 멈췄다. 이는 면공업 전체 수치이며 지역별 편차는 심했다. 완전한 시간(주 60시간)을 조업한 공장은 극소수였고, 나머지는 불규칙하게 조업했다.
완전한 시간을 노동한 소수 노동자들의 경우에도, 원면의 교체로 인해 주당 임금 감소가 불가피했다. 좋은 면화가 나쁜 면화로 대체되고(예: 순수한 면화가 솜 찌꺼기와 수라트 면화 혼합물로 대체), 섬유가 잘고 불결한 수라트 면화를 사용하면서 실이 잘 끊어지고, 기계 속도나 직조공 1인이 관리할 수 있는 직기 수가 감소했다. 기계 결함을 시정하는 데 더 많은 노동이 들면서 생산량 감소에 따라 성과급이 저하했다. 수라트 면화를 사용하는 경우, 노동자가 완전한 시간을 노동하더라도, 임금 손실은 20%, 30% 또는 그 이상에 달했다. 게다가 대다수 공장주들은 성과급 수준을 5%, 7.5% 내지 10% 추가로 삭감했다. 따라서 1주일에 3일, 3.5일, 4일 또는 하루에 6시간씩만 일한 노동자들의 형편은 극도로 비참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1863년 상황이 비굦적 개선되었음에도, 직조공, 방적공 등의 주간 임금은 3실링 4펜스, 3실링 10펜스, 4실링 6펜스, 5실링 1펜스 수준에 그쳤다. 이처럼 극도로 고통스러운 형편 속에서도 임금 인하를 위한 공장주들의 기발한 착취 방식은 지속적으로 발휘되었다. 면화 불량이나 기계 결함으로 발생한 제품 하자에 대해서도 처벌 명목으로 임금이 삭감되었다. 공장주가 노동자 거주 오두막의 소유자일 경우, 집세는 임금에서 공제하는 징수되었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보고서는 구체적인 실태를 제시한다.
‘각각 두 대의 자동 뮬 방적기를 담당한 노동자들은 14일간의 노동을 완료하고, 8실링 11펜스를 벌었으나, 이 금액에서 집세가 공제되었다. 공장주가 집세의 반액을 선물로 되돌려주어, 노동자들이 실제로 수령한 금액은 6실링 11펜스에 불과했다. 1862년 하반기에는 자동 뮬 방적기 노동자의 주급이 5실링 내지 9실링이었고, 직조공의 주급은 최저 2실링 6펜스로부터 등급이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만 작업한 경우에도 집세 공제가 임금에서 흔히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랭커셔의 일부 지역에서 일종의 굶주림 병이 발생하는 일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생산 과정에서 혁신이 노동자의 희생 위에서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공장 감독관 레드그레이브의 언급처럼, 이는 해부학자들이 개구리를 대상으로 하듯, ‘무가치한 생물체에 대해 행하는 실험’이 사실상 인간에게 자행된 일과 다름없었다.
‘일부 공장 노동자들의 실제 소득을 언급했지만, 이 금액을 매주 일벙하게 받는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의 소득은 공장주가 행하는 끊임없는 실험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들의 소득은 면화 혼합의 질에 따라 증감했으며, 때로는 이전 소득과 15%까지 차이를 보였다. 심지어 1, 2주 동안에는 50-60%나 폭락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러한 실험은 노동자들의 생활 수단만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오감마저 희생시켜야만 했다.
‘수라트 면화를 다루는 종업원들은 참을 수 없는 악취 때문에 면화 짐을 풀 때, 구역질이 난다고 불평했다. 혼면실, 조소실, 소정실에서 날리는 먼지는 노동자들의 입, 코, 눈, 귀로 침투해 기침을 유발하고, 호흡을 곤란하게 만든다. 또한, 수라트 면화 속의 불결한 물질로 인해 피부병이 만연했다. 섬유가 짧아지면서 식물성 및 동물성 풀의 사용량이 증가했다. 이 먼지로 인해 기관지염과 후두염이 확산되는 실정이었다. 특히 씨실이 자주 끊어질 때, 풀 먹인 씨실을 잇기 위해 빨아들이는 직조공들은 구토와 소화 불량에 시달렸다. 다른 한편, 곡분 대용품은 실의 무게를 늘려 공장주들에게 훌륭한 돈벌이 원천이 되었다. 이 대용품을 사용하면 15파운드의 원료가 직물로 완성된 후 20파운드의 무게를 갖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864년 4월 30일자,「공장 감독관 보고서」에 따르면,
‘산업계는 이 수단(풀 첨가)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용하고 있다. 권위 있는 인물로부터 8파운드의 천이 5.25파운드의 면화와 2.75파운드의 풀로 제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예로, 5.25파운드의 보통 수출용 셔츠감에는 2파운드의 풀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종류의 천에는 때로 50%의 풀이 첨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공장주들은 천을 포함된 실 값보다 싸게 팔면서도,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자랑할 수 있었고, 실제로 자랑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내의 공장주 실험과 더불어, 공장 밖에서는 지방 정부의 실험으로부터 고통받았다. 또한 임금 인하, 실업, 궁핍, 자선, 상하 양원 의원들의 찬사까지 견뎌야 하는 처지였다.
‘면화 기근의 결과로, 실직한 불행한 여성들은 사회의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산업이 회복되고, 일자리가 많아진 지금도, 그들은 불행한 계급으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현재 도시의 젊은 매춘부 수는 지난 25년간 알려진 숫자보다 훨씬 많아졌다.’
1770년부터 1815년, 곧 영국 면공업 최초 45년간 동안 공황과 침체는 5년간에 불과했다. 이 시기는 영국 면공업이 세계 시장을 독점한 시기였다. 그러나 1815년부터 1863년까지 48년간의 기간에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불황과 침체가 28년간 지속된 데 비해, 회복과 번영은 겨우 20년간에 그쳤다.
1815-1830년: 유럽 대륙 및 미국과의 경쟁이 시작되었다.
1833년 이래: ‘인류의 파괴’(중국과의 아편 거래)로부터 아시아 시장 확장이 강행되었다.
1846년-1863년 (곡물법의 철폐 이래): 중간 정도의 호황과 번영은 8년간이었으나, 불황과 침체는 9년간으로 더 길었다.
번영기에도 면공업에 종사하는 성인 남성 노동자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는,「공장 감독관 보고서, 1863년 4월 30일」로부터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