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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피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1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한국어판 발행에 즈음하여'라는 제목으로 들어있는 지은이 '사사키 조'의 짧은 인사말이 반가웠다. 소설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직접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는 점도 유익했지만, 무엇보다도 독자를 대하는 출판사나 작가의 성의가 느껴져서 좋았다. 지은이는 이 소설이 비록 가공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가상의 드라마이지만, 소설 속 경관 3대가 경험하는 상황들은 2차대전 이후 일본의 사회현실과 결코 유리되지 않는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는 일본 현대사의 격변 속을 살아 온 평범한 한 일가의 삶을 그리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경관의 피'라는 제목에서 여러 가지 연상이 가능하다. 단순하게, 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경찰관을 직업으로 택한 '안조' 일가의 년대기를 의미할 수도 있고,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제복을 입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수도 있으며, 정의의 수호자로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희생'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과연 바람직한 '경찰상'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작가가 던지는 화두를 상징할 수도 있다.
소설의 구성은 '세이지'에서 '다미오'와 '가즈야'에 이르는 인물의 연대기를 기본 바탕으로 '세이지'가 의문을 품고 해결하려고 하였던 두 건의 살인사건과 '세이지'와 '다미오'의 죽음에 얽힌 의혹을 미스터리적인 장치로 배치하고 있다. 1948년부터 60년에 이르는 '안조' 일가의 개인사와 그에 투영된 일본 경찰의 역사를 유장한 필치로 그려 내고 있다. 60년이란 긴 시간적 배경과 미스터리적 장치가 복잡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놀라울 정도의 흡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의미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안조' 일가가 만나는 주변인물들을 적절하게 배치한 짜임새있는 구성력과 일체의 곁가지는 쳐 내고 꼭 필요한 부분만을 묘사하는 작가의 필력에 힘 입은 바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은 것은 작가에 의해 탄생된 '인간 드라마' 그 자체이다.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안조' 일가가 엮어 가는 인생 드라마는 격변의 시대상과 맞물려 유장하게 펼쳐진다.
전후의 혼란이 극에 달한 1948년, 군대에서 복귀한 '세이지'는 생계를 위해 경찰에 입문한다. 비슷한 처지의 경찰학교 동기들과 우정을 나누며 경찰관으로서의 인생을 착실하게 살아가던 그는 소망하던 '주재경관'으로 임명되던 그 해,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남겨 놓은 채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근무 중에 죽음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순직으로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자살로 처리된다.
'세이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자랐던 장남 '다미오'는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고교 졸업후 경찰학교에 입교한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그런 경찰관을 꿈꾸지만, 경시청 공안부의 필요에 의해 '잠입요원'으로 선발된다. 그리하여, 경찰관이란 신분을 비밀로 하고 대학에 입학하여 학내 운동권의 정보를 캐어 내는 임무를 수행하고 졸업 후에도 유사한 공안수사에 투입되어 공을 세우지만, 피 말리는 잠입요원으로서의 임무는 그에게 심각한 신경질환을 안기고 끝을 맺는다. 주위의 도움으로 아버지가 근무했고 자신의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주재소로 부임하면서 정상적인 생활인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불행은 그를 피해가지 않는다.
'가즈야'에게 경찰관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동료 경찰을 비밀리에 감찰하는 임무로 경찰관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딘 가즈야는 자신과 관계를 맺은 인물을 배신하여야만 하는 임무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게 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했던 두 건의 살인사건의 진상에 다가선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 앞에 서게 된다.
일본의 경찰 미스터리 중 기억에 남는 소설은 '오사와 아리마사'의 '신주쿠 상어'시리즈와 '요코야먀 히데오'의 소설들이다. 전자는 이른바 출세가 보장되는 '캐리어'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신주쿠'라는 정글을 무대로 홀로 고독하게 범죄와 대결하는 '사메지마'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인 시리즈이고, 후자는 경찰이라는 조직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들의 갈등과 역학관계, 조직논리 등이 미스터리와 잘 조화된 수작들이 많다. 그리고, '다카무라 가오루'가 '마크스의 산'에서 보여준 바 있는 집요할 정도로 세밀한 디테일도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경찰 미스터리의 최고봉으로 평가하는 것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분명 '사사키 조'의 작가적 역량이 충분히 발휘된 '인간 드라마'의 걸작임은 대부분이 수긍하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