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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론도 ㅣ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1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미스터리의 여러 기법 중 '서술트릭'이 구사된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었다. 당시는 '해문판' 여사의 전집을 잔뜩 사 놓고 집중적으로 파고들 때였는데, 사전지식 없이 단지 여사의 수많은 작품 중 Best 10에 꼽히는 걸작이라는 것만 알고 읽었다. 과연 名不虛傳이라는 말 그대로 상당히 흥미롭긴 했지만, 이런 식의 '기만'이 과연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었다. 후에 이런 저런 책들을 읽게 되면서, 이 작품에 대한 '공정성' 논란이 추리작가들 사이에서도 있었고, 이런 식의 기법을 '서술트릭'이라고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서술트릭'이란 서술에 의한 트릭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는데, 트릭이 소설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향한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즉, 작가가 '서술'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오해나 잘못된 인식을 유발하여 사건의 진상을 혼미에 빠뜨리고, 진실이 밝혀지는 대반전을 통해 독자의 머리 속을 확 뒤엎어 버린다. 추리소설을 '작가'와 '독자'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게임'이라고 바라본다면 서술트릭이 구사된 작품이야말로 이러한 추리소설의 본령에 가장 충실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속았다!"는 느낌이 크면 클수록, "감쪽같이 몰랐다!"는 탄식이 높으면 높을수록 독자들이 받는 쾌감의 강도도 커지고 추리소설 자체의 작품성도 우수하다고 여겨진다.
스토리 라인은, 한 잡지의 추리소설 공모를 둘러싸고 '원작자'와 '도작자' 사이에 벌어지는 집착과 광기, 그리고 복수가 이리저리 얽힌 미스터리적인 장치 속에서 한 바탕 노닐다가 마지막에 놀라운 진상으로 치 닿는다. 추리작가를 지망하는 '야마모토 야스오'는 심혈을 기울여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고는 당선을 확신하지만, 응모를 얼마 앞 두고 그만 원고를 잃어버리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원고를 찾아 가까스로 잡지사로 우송하지만, 결과는 자신의 원고와 동일한 내용의 작품으로 '시라토리 쇼'라는 인물이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다. 그는 자신의 원고가 도둑 맞았다고 확신하여 '시라토리 쇼'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눈다.
이 소설은 실제로 작가 '오리하라 이치'가 1988년에 '에도가와 란포상'에 응모한 작품이었지만, 당선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종 후보에 오른 낙선작 중 상을 받았어야 마땅한 다섯 편의 하나로 꼽혔고, 단행본으로 출판되어서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받아, 198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랭킹에 10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위는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뽑혔다) 이 작품 이후 '오리하라 이치'는 '도착의 사각', '도착의 귀결'로 이어지는 이른바 도착(倒錯) 3부작을 내 놓으며 추리소설계의 기린아로 떠올랐으며 '서술트릭의 1인자'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작가는 노골적으로 '서술트릭'을 명시하고 독자들에게 이 소설의 트릭을 풀어 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도전장을 외면할 미스터리 매니아가 몇 이나 될까? 작가의 초대에 즐겁게 응하여 재기 발랄한 이 소설을 즐기기 바란다. 별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