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코의 지름길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3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후라코코'라는 서양 앤티크 전문점에 새로운 점원으로 한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가게에 진열되지 않은 여분의 골동품 가구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어, 겨우 한 몸 정도 누울 수 있는 반 창고 같은 방에서 기거하며 가게를 지킨다. 그는 결코 가난하지도 사회 부적응자도 아닌 것 같은데, 살기 좋은 넓은 집을 구하러 다니는 것부터, 난방도 되지 않는 방안에 온기를 불어 넣기 위한 뭔가를 사러 나가는 것까지 마치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듯 하루 하루를 보낸다. 이 연작 단편집은 의문에 쌓인 한 남자가 반 년 남짓한 시간 동안 후라코코에서 보낸 일상과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분명 어렵지 않게 읽힌다. 작위적인 사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들이 잔잔하고 담백한 문체로 이어지지만 심심하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어렵지도 심심하지도 않지만 웬지 애매하다. 인물의 성격도, 사건도, 갈등구조도 어떤 명확한 인상이 없이 묘하게 浮遊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작가 나름의 작중 의도와 작법으로 소설을 끌고 나가지만, 소설 속 세계는 마치 유리병 속의 담겨져 있을 공기와도 같이 '존재는 하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다른 소설과는 차별화된 이 작품만의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도 묘하다.
가령, 소설의 화자인 '나'라는 인물은 나이도 이름도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심지어 이야기가 한참 진행될 때까지 성별까지도 아리송하다. 도대체 과거에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살아가는지, 후라코코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거의 투명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어제와 다르지 않는 소소한 일상의 묘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 선생님을 연인으로 둔 '유코'의 임신과 같은 평범하지 않는 사건에 있어서도 작가는 절대 독자의 감정을 고조시키지 않는다. 이는 작가가 현실 속에 내재된 인간관계의 지저분함, 감정의 치열함이나 거친 찌꺼기 등에 대한 묘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에 '괭이 갈매기' 울음과 같은 소리에 눈을 뜨고, 혼자 가게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손님에게 드릴 차를 끓이는 것과 같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과 같은 느낌으로 '유코'의 사건도 다가온다.
작가는 플롯을 미리 생각하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장면부터 쓰기 시작하여 각각의 장면들을 연결하는데, 다 쓰고 난 다음에 장면을 바꾸거나 새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인과관계가 생겨난다고 창작과정을 밝히고 있다. 각 단편은 '미즈에', '유코', '미키오', '아사코', '프랑수아즈' 등 주인공이 후라코코에서 알게 된 인물을 타이틀로 올리고, 주인공과 그들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여섯 번째 에피소드는 '내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마침내, 주인공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듯 했으나, 여전히 여운을 남긴 채 불현듯 후라코코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원래 '미즈에씨의 오토바이'에서 '내 얼굴'까지 여섯 편으로 발표되었던 단편을 연작 소설집으로 묶으면서 후일담 형식으로 한 편을 더 추가했는데, 홀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의 서늘한 묘사가 주는 여운을 생각하면 그냥 여섯 편으로 가는 것도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