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스페셜 꽃의 비밀 - 꽃에게로 가는 향기로운 여행
KBS 스페셜 <꽃의 비밀> 제작팀 지음, 신동환 엮음 / 가치창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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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봄을 맞아서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튤립 축제가 한창인 그곳에는 꽃 반 사람 반이라고 할 정도로 봄과 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형색색의 꽃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웃음이 가득했다. 꽃들도 눈부시고 사람들도 눈부신 한바탕 꽃밭이었다.
축하할 때 빠지지 않는 꽃, <꽃의 비밀> (2009, KBS 스페셜 <꽃의 비밀> 제작팀 지음, 가치창조 펴냄)을 통해 좀더 알아보기로 한다. 이 책은 올해 KBS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인기를 모은 <꽃의 비밀>을 좀더 보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TV 프로그램을 놓쳤지만 책으로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다. 

이 책에서는 꽃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다. 역사적으로는 20만 년 된 한국의 두루봉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진달래 꽃가루를 통해, 인간이 꽃을 의식이나 장식에 사용한 오랜 흔적을 이야기한다. 많이 들어본 튤립 공황, 그를 극복하고 다시 꽃 수출국으로 태어난 네덜란드를 보며 꽃의 흥망성쇠와 경쟁력을 알 수 있다.
꽃은 선물로 많이 쓰이는데, 꽃이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과학적인 실험과 분석으로 알아보았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꽃을 좋아하는 것은 본능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린다.
다음은 꽃의 여왕으로 불리는 장미를 다루었다. 장미의 나라 불가리아에서 장미 향수의 원액인 장미 오일을 만드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금보다 비싸고 귀중한 장미오일을 다시 보게 된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꽃의 향기 편으로 넘어간다. 여성호르몬과 비슷한 화학 구조를 가짐으로써 피토에스트로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장미 향기, 학습 능력을 향상시키는 나리 향기 등 꽃은 인체에 유용한 효과를 주는 것을 과학적으로 명시하였다.
다음은 꽃의 색깔 편이다. 플라보노이드, 카로티노이드, 베타레인, 클로로필과 같은 꽃 색소들에는 생존과 종족 번식을 위해 매개자를 부르는 그들의 유혹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꽃의 형태로 채택된 좌우대칭과 피보나치 수열은, 하나도 쉬이 보아넘길 것이 없게 한다.
그리고 꽃의 섭취와 원예 치료는 아로마 테라피와 관련하여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꽃은 진달래처럼 화전으로 부쳐서 먹을 수도 있고, 창포처럼 물을 우려서 머리를 감을 수도 있고, 국화처럼 말려서 베개에 넣을 수도 있고 차로 마실 수도 있고, 옛날 창호지 문에 장식으로 넣을 수도 있다. 참 다양하게 꽃을 적용했던 예전에 비해, 요즘은 꽃이 장식품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꽃의 비밀>에는 아주 새로운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지만, 꽃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다룸으로써 종합적으로 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앞으로 꽃을 보게 되면 꽃잎이 몇 장인지, 어떤 색을 띠고 있는지, 어떤 향기를 품고 있는지 한번 더 들여다보아야겠다. 꽃을 가까이 하는 향기로운 삶을 꿈꾸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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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 빛과 어둠의 대가 마로니에북스 Art Book 8
로사 조르지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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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카라바조를 처음 만난 것은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님이 쓰신 <꽃미남과 여전사>(2006, 이명옥 지음, 노마드북스) 1편에서였다.  '남성과 여성의 미를 칵테일한 카라바조'라는 소제목으로 카라바조의 그림이 아홉 점이나 실려 있었다. 다양한 그림들 중에서도 카라바조를 기억하게 했던 것은 비슷하게 생긴 소년들이었으니,쌍꺼풀이 진하게 지고 머리에 꽃을 꽂고 둥글고 짙은 눈썹과 교태스러운 몸짓으로 각인되었다.
그런 카라바조를 이제 한 책의 주인공으로, 그가 살았던 삶과 사회와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만난 시간이 <카라바조 : 빛과 어둠의 대가> (2008, 로사 조르지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이다. 이탈리아 몬다도리 출판사의 'Art Book' 시리즈를 번역 출판하고 있는 이 시리즈는 카라바조로 8권째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 빛의 대가라고 하면 렘브란트를 기계적으로 떠올렸는데, 이 책에서 카라바조의 빛과 어둠을 보았다.

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만이 아니라 작품이 제작되던 당시의 사회 상황과 작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카라바조에 대해 아주 충실하다. 1572년에 태어났고, 5살에 페스트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여읜 카라바조는 열세 살부터 밀라노에서 시모네 페테르차노에게서 미술을 배운다. 르네상스에서 마니에리스모로, 다시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방식으로 바뀌던 미술 사조들은, 카라바조가 여행했던 밀라노와 로마와 안트워르펜 등에따라서도 많이 달랐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과, 그가 영향을 준 화가들이 각자의 작품들과 함께 등장하여 설명을 돕는다.  

한 사람의 생애를 정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이 많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와 삶, 작품을 연계하기 위해 정보를 많이 실음으로써 우리에게 도달하는 정보량은 꽤 많지만, 보통 책보다도 약간 작은 도판에 그림을 한 페이지에도 여러 개씩을 싣다 보니 그림 각각의 질이 떨어지고 특히 페이지가 겹치는 가운데에 실린 그림은 알아보기조차 어려워서 아쉽다.
그리고 카라바조의 생애 또는 화풍에 따라 1592년까지, 1600년까지, 1606년까지, 1610년까지의 네 시기로 나누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각 시기 안에서도 삶과 작품, 역사, 문화적 배경, 주요 작품 분석이 여러 편씩 혼재되어 있어서 일렬로 줄을 세우기가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다. 모두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에 어렵게 읽은 것일 게다.

내게 처음 각인되었던 짙은 쌍꺼풀과 교태스러운 몸짓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화와 정물화들을 만나게 되어서, 이제야 카라바조의 일부를 알았다는 생각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된 작품과 삶이 상세하게 전해지는 기록에 대한 부러움을 또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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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뱅이의 역습 - 무일푼 하류인생의 통쾌한 반란!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김경원 옮김, 최규석 삽화 / 이루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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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단단히 착각했다. 이번에 수원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한 것을, 그것도 절반 가량 대출을 끼고 산 것을, 내심 중산층에 도입했거니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갑자기 부자라도 된 양 퇴근하면서 베이커리에 들러 종이 봉투 가득 빵을 사 가기도 하고, 그간 자제했던 배달음식도 까짓것 못 사 주겠냐며 호기를 부렸었다. 만약 지금 당장 회사에서 잘린다면 당장 몇 달 못 가서 관리비며 대출금 이자를 낼 것이 막막한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난뱅이의 역습> (2009, 마쓰모토 하지메 지음, 이루 펴냄)을 읽으면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져버리는 자전거 같은 우리 인생은 자타 공인 가난뱅이란 말씀', 동감한다. 남 이야기 같지 않은 기발한 가난뱅이, 마쓰모토 하지메가 이야기하는 가난뱅이의 생존 기술과 그간의 투쟁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기는 사람도 없는 경쟁사회'에 휘둘리는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좀 곤란한 일에 부딪히고 그 결과 몸부림을 치지만 무슨 수든 써서 어떻게든 되는' 인간답고 즐거운 방식, 그것이 바로 가난뱅이의 자세이다. 주류에서 떨려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적극적인 가난뱅이는 마음까지 가난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일단 자기 자신부터 구원하는 제1장, '여차할 때 써봄직한 가난뱅이 생활 기술'은 집 얻기, 밥값 절약하기, 이동 수단, 옷, 미디어 만들기까지 절약할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말한다. 진지하지 않으면서 궁색하지도 않은 그 말투는 중독성이 있다.
2장은 이제 가난뱅이들의 연대를 꿈꾸면서 '거리를 휩쓰는 무적의 대작전'을 펼친다. 저자가 고엔지 기타나카 거리에 '아마추어의 반란'이라는 재활용 가게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된 재활용과 연대는 꽤 독특하고 활기차다. 여러 작전들을 함께 수행하고 나면 정말 무적이 되어 있을 것 같다.
3장은 저자의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활약상을 이야기한다. 회사를 다니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소설을 쓰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이혼하고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으로 생활하시는 어머니 등 가정 환경부터 범상치 않았던 그는, 대학 시절부터 가난뱅이와 관련된 수많은 투쟁을 선도하며 자타 공인 가난뱅이의 수장이 되었다. 그런 기질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영화로, 이벤트로, 가게 주인으로, 책의 저자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4장은 가난뱅이들이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가게들을 소개했고, 5장은 아마미야 가린이라는 저널리스트와 함께 '가난뱅이를 위한 작전 회의'라는 제목으로 한 대담을 실었다.

가난뱅이에게서는 벌써부터 주눅듦과 자괴감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부터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괜히 기가 죽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들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면서 가난뱅이의 입지를 굳히고자 노력하는 저자의 시도들을 보면서, 그래, 어쩌면 가난뱅이들도 당당하고 서로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 나온 것들 중에서 당장 몇 개를 실천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중고품 기증과 판매를 하는 '아름다운 가게'를 이용하고, 마음부터 자발적인 가난뱅이로 재무장하자고 다짐한다.
유쾌하면서 기발한 <가난뱅이의 역습>을 흥미롭게 읽었다.
세계의 가난뱅이들이여, 대동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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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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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입니다. 잘가요 언덕에는 수많은 봄꽃들이 피어났겠지요. 아니, 백두산 칼바람이 아직 매서워서 아직 꽃을 준비하고만 있을까요? 그래도 파릇파릇한 생명들이 땅바닥에서 보슬보슬 솟아나고 있을 것입니다. 강남갔던 제비도 돌아왔을 거고요.
자연은 그렇게 언제나 다름없는 봄을 맞이하는데, 그렇게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잘가요 언덕에서 잠깐의 세월을 함께 나눈 순이와 용이, 훌쩍이입니다. <잘가요 언덕> (2009, 차인표 지음, 살림 펴냄)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순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 소식이 없고, 호랑이 마을 촌장이신 할아버지와 둘이 사는 열세 살 소녀입니다. 용이는 엄마와 여동생을 물어간 백호를 잡기 위해 아버지 황 포수와 함께 호랑이 마을에 들른 열네 살 소년입니다. 훌쩍이는 엄마 아빠를 잃고 혼자 사는, 항상 코를 훌쩍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소년입니다.
이들은 황 포수 부자가 호랑이 마을에 들른 한 철 동안 친해지고 서로를 감싸 줍니다. 모두들 엄마가 없는 허전함 때문에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말없이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포근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내려다보며 안아 주는 엄마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일본에는 학도병으로 자원해서 조선에 배치된 가즈오가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지원 입대했으나 진정한 사람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이들 넷은 호랑이 마을에서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잘가요 언덕은 서로에 대한 헤어짐과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이들의 운명을 지켜봅니다.  

1998년 캄보디아 생활 70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훈 할머니의 기사를 보고 구상하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잔잔한 동화처럼 다가왔다가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맙니다. 어디에도 절규나 호소, 애원이 들어있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게 넘쳐서 오히려 마음이 아픕니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많이 나오고 '낮은 목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개봉되어 관심을 끌었었지만, 이 분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느낌입니다. 결국 캄보디아에서 세상을 떠나신 훈 할머니처럼 모든 증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보다도 경제가 우선이며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이상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차인표 작가가 참 고맙습니다. 갈수록 편해지는 그의 연기만큼이나, 실제로 신념을 현실에서 체현하는 그들 부부의 삶만큼이나 <잘가요 언덕>은 따뜻합니다.

작가는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용서는 철저한 사과와 공감이 있은 후에야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 용서는 그들에게 이른 듯합니다. 순이가 쑤니 할머니가 되어 돌아오고, 훈 할머니가 타국에서 외로이 돌아가시는 지금 같아서는 말이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잘가요 언덕에 올라, 빌지도 않은 용서를 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엄마별에게 다가가는 길이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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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 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 Nobless Club 11
김정률 외 지음 / 로크미디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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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걷다> (2009, 조진행 외 지음, 로크미디어 펴냄)는 '2009 경계문학 베스트 컬렉션'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아직은 생소한 경계문학이라는 단어,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를 뜻하는 것일까. 문학에 문외한이라서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내게, 경계문학은 새로운 경계를 만들며 다가왔다. 제목인 '꿈을 걷다'는 꿈 위를 걷는 것인지, 꿈을 거두어들이는 것인지도 명확치 않으면서, 어느 뜻으로든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하얀 표지에 올록볼록 돋을새김된 저자 12인의 이름 중에서 전민희님과 좌백님, 진산님의 이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으니, <룬의 아이들>과 <대도오>, <마님 되는 법>을 읽었던 기억 때문이리라.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책들이라서, 2009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기대하며 책을 펼쳤다.

책은 아주 두툼하다. 9쪽부터 471쪽까지 460쪽을 꽉 채웠다. 글씨도 작고 줄 간격도 빽빽하다. 활자 중독증에 걸린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흐뭇하다. 이 안에 꽉 찬 내용들은 하나하나 다른 맛을 가진 종합선물세트처럼 나를 즐겁게 해 주겠지.
김정률 작가의 <이계의 구원자>로 책이 시작된다. 무림인들이 판치는 중원에 나타난 드래건의 현신, 그리고 또다른 세계인 마계로부터의 침입. 이 세 세계를 구원할 한 남자가 있었으니, 열화무극수에 통달한 구양무극이었다. 한 작품 안에서 무협과 SF의 만남을 난생 처음 만나는 것이라 약간은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그 또한 색다른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 네 편만 들어 본다. 문영 작가의 <구도>는 정통 무협과 비슷한 비장미를 주기에 충분했고, 이재일 작가의 <삼휘도에 관한 열두 가지 이야기>는 중심인물인 삼휘도를 가운데에 배치하고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열두 명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짐으로써 활동적이고 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지금까지 읽었던 무협지들과 가장 비슷한 이야기이면서, 책의 1/5 가량으로 분량이 많았으나 재미있게 읽혔다. 좌백 작가의 <느미에르의 새벽>은 지금껏 무협지 작가로만 알았던 내 고정관념을 깨는 SF 소설이었고, 진산 작가의 <두 왕자와 시인 이야기>, <그릇과 시인 이야기>는 독일의 메르헨처럼 부드럽게 읽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이 이루는 경계는 넓어서, 본격 무협 소설도 있었고 SF 소설도 있었다. 우연히 들른 동굴에서 천하무공비급을 손에 얻어 육십갑자의 내공을 얻는 황당무계함도, 모든 여인들의 사랑을 받는 남자 주인공도 없다. 짧은 분량의 글에서도 기승전결이 뚜렷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존재하는 열두 편의 이야기들은, 문학의 경계가 어디인지 새삼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무협지가 아니라, 아주 황당하기만 한 도서대여점용 퓨전 판타지가 아니라, 문학의 경계에 선 수준 있는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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