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봄입니다. 잘가요 언덕에는 수많은 봄꽃들이 피어났겠지요. 아니, 백두산 칼바람이 아직 매서워서 아직 꽃을 준비하고만 있을까요? 그래도 파릇파릇한 생명들이 땅바닥에서 보슬보슬 솟아나고 있을 것입니다. 강남갔던 제비도 돌아왔을 거고요.
자연은 그렇게 언제나 다름없는 봄을 맞이하는데, 그렇게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잘가요 언덕에서 잠깐의 세월을 함께 나눈 순이와 용이, 훌쩍이입니다. <잘가요 언덕> (2009, 차인표 지음, 살림 펴냄)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순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 소식이 없고, 호랑이 마을 촌장이신 할아버지와 둘이 사는 열세 살 소녀입니다. 용이는 엄마와 여동생을 물어간 백호를 잡기 위해 아버지 황 포수와 함께 호랑이 마을에 들른 열네 살 소년입니다. 훌쩍이는 엄마 아빠를 잃고 혼자 사는, 항상 코를 훌쩍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을 받는 소년입니다.
이들은 황 포수 부자가 호랑이 마을에 들른 한 철 동안 친해지고 서로를 감싸 줍니다. 모두들 엄마가 없는 허전함 때문에 감정 표현이 서툴지만, 말없이 함께 있기만 해도 든든하고 포근합니다. 그리고 이들을 내려다보며 안아 주는 엄마별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일본에는 학도병으로 자원해서 조선에 배치된 가즈오가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지원 입대했으나 진정한 사람됨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이들 넷은 호랑이 마을에서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잘가요 언덕은 서로에 대한 헤어짐과 만남의 장소가 되면서 이들의 운명을 지켜봅니다.  

1998년 캄보디아 생활 70년 만에 우리나라로 돌아온 훈 할머니의 기사를 보고 구상하게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잔잔한 동화처럼 다가왔다가 마음을 흔들어 놓고 맙니다. 어디에도 절규나 호소, 애원이 들어있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절절하게 넘쳐서 오히려 마음이 아픕니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많이 나오고 '낮은 목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개봉되어 관심을 끌었었지만, 이 분들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버린 느낌입니다. 결국 캄보디아에서 세상을 떠나신 훈 할머니처럼 모든 증인들이 사라지고 나면, 무엇보다도 경제가 우선이며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는 더이상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차인표 작가가 참 고맙습니다. 갈수록 편해지는 그의 연기만큼이나, 실제로 신념을 현실에서 체현하는 그들 부부의 삶만큼이나 <잘가요 언덕>은 따뜻합니다.

작가는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용서는 철저한 사과와 공감이 있은 후에야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 용서는 그들에게 이른 듯합니다. 순이가 쑤니 할머니가 되어 돌아오고, 훈 할머니가 타국에서 외로이 돌아가시는 지금 같아서는 말이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잘가요 언덕에 올라, 빌지도 않은 용서를 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엄마별에게 다가가는 길이라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