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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는 임꺽정은 대부분이 알고 있는 ’꺽정’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부패 비리의 탐관 오리들과 맞서 싸운 의적 두령이자 조선시대 서슬 퍼런 사회계급에 반기를 든 궐기자의 우두머리였으며 그의 직업은 백정이었다는 것 정도이다. 그가 홍길동과는 색이 다른 인물로 평가되는 것중 하나는, 그의 행보에서 신출귀몰함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홍길동처럼 현실에서 도망하지 않고 현실을 바꾸려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드라마, 소설, 만화책까지 통틀어 내가 읽은 임꺽정을 꼬장꼬장 따져봐도 이게 전부다. 홍명희 작가의 원작은 읽지 못한 탓으로 돌리기에, 나의 고전읽기는 실로 꺽정스런 수준이다.
마이너리그에서 뭘 하며 놀았나? 배우며 놀았지.
임꺽정을 포함한 칠두령,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 황천왕동, 노밤이 등은 거진 놀고 먹는 백수의 지존들이다. ’그럭저럭’ 놀면서도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배움에 열심이었던 자발적 의지와 인복이라 할 만한 타의적 도움이 바탕이 된다. 부모 복 없는 여자는 자식복, 남편복도 없다는데 남자의 경우는 다른가 보다. 스승복, 친구복이 터진 사내들이다. 남자들이 목숨과도 맞바꾼다는 ’의리’의 산물인가? 보릿섬 한 말만 있어도 데릴사위는 안 한다는데, "불안한 정규직"에 충실했던 댓가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그들이 타복에 의해서만 살았던 건 결코 아니다. 표창 던지기, 뜀박질 하기, 주워듣기 등 자신에게 맞는 무언가를 연마하고 배우기를 즐겼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직업적 소명을 다하며 지적인 인물로 나오는 갖바치는 조광조, 심의 등과 같은 조정 세력과도 친분이 깊다. 한낱 천민의 신분으로 심의의 앞날을 조언하는 그가 마이너리그에서 당당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박식함이 이유이다. 한 마디로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놀면서도 한 가지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 그것은 배움이다.
무엇에 써 먹을 재주인고?
"소설 임꺽정은 달인들의 이야기다"라는 고미숙의 한 마디. 신출귀몰한 도인의 경지가 아닌, 그야말로 생활의 달인들이다. 어찌 보면 써 먹을데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어 보이는 재주를 갈고 닦았더니 적당한 때에 그 빛을 발하더라는 것이다. 골리앗을 돌멩이 몇 개로 쓰러뜨린 다윗왕의 기록도 있지 않은가. 기껏 양을 치며 늑대 조무래기를 겁주려고 배웠던 돌팔매가 그를 왕으로 만들었듯이, 한 우물을 주구장창 파고 들었던 칠두령에게도 쓰잘데 있는 기량들이다. "황천왕둥이는 장기에 미쳐버렸다. 전국 어디든 찾아가서 겨루는 게 그가 하는 일이다. 겨뤄서 뭐하나? 아무 이유없다. 그냥 한다. 그 덕에 봉산 백이방의 데릴사위가 되었다. 봉산 읍내에서 최고로 이쁜 색시를 얻었다. 장기로 인생역전한 셈이다." (p.77) 역시 뭐든 열심히 배워야 한다.
원초적 해학, 우리 고전의 깊은 맛
숲의 검객이 꺽정이에게 ’검의 도’를 가르치는 장면이 있다. 지금의 내노라 하는 독설가들도 이정도면 이들 앞에서 명함 도루 집어 넣어야겠다. 내가 고전, 특히 임꺽정에서 놓치고 있던것이 바로 이것이다.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를 통해 새로 발견한 것. 칼로 덤비는 핏빛 복수가 아닌, 독설과 해학과 무식하고 우직한 맛, 원초적 토속미.
그리고 사랑 하였네라.
곰같은 사내들이 놀고 먹는다고 해서 여자들 등이나 치는게 아니다. 오히려 마누라님들에게 순정과 충성을 바친다. 그러니 여자들이 그 순정을 몰라주겠느냔 말이다. 칠두령에 버금가는 드센 여자들이었지만,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머리 쳐들고 맞짱 뜨는 저력은 그녀들의 남편들에게서 받은 氣이자 사랑의 힘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천명처럼 받들라. 자동차 광택 내는것 보다 아내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도록 힘쓸것이며, 신상 컴퓨터 부품에 대한 빠른 입수 보다 아내의 장점을 나날이 찾아내기에 촉각을 곤두세우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정이 평안하리라.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을 읽고 난 후에 쓴, 평론가 고미숙의 입담도 만만찮게 걸죽하다.
간만에 고전 읽기의 재미 속으로 밀어 넣는 그녀가 앙큼하다. 유쾌함을 넘어선 즐거운 고전 읽기..
그리고 세상 읽기. 이 시대가 원하는 진짜 임꺽정이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