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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남용익이 효종의 밀서를 품고 막부로 향한다. 막부의 최고 실세, 호시나 마사유키와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는 어린 쇼군인 이에쓰나를 이용해 더큰 권력의 발판으로 삼으려한다. 와중에 조선통신사를 위한 연회에서 남용익은 일본무사를 살해한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앞에 일본과 조선통신사 모두 난감해하는 중, 동행한 수행 역관 박명준이 교토소사대 다나카와 함께 살인자를 추적하게 된다.
어쩐지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벚꽃 아래
아려한 비장미가 기요모리의 전신을 훑어 내리는 듯도 싶었다
박명준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도공의 아들이었으며 10년 간 일본에서 살았다. 장성 후에도 일본을 상대로 교역을 할 정도였으니 어느정도 일본 물정에 밝았다고 할 수 있다. 도공을 대우하였다고는 하나 일본인들의 부당한 처우도 적잖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위해 그가 가장 먼저 다잡은 것은 중도의 마음가짐이었다. 철저히 방외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객관인으로 수사에 임한다. 이것이 박명준에게 느끼는 내 첫 번째 호감의 이유다. 같은 조선인 입장에서 남용익을 위한 마음이 급했음에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한 직관력을 유지하는 평정심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박명준의 서정성을 놓칠 수 없다. 하이쿠에 대한 해박함이나 일본 문화에 대한 겸허한 수용은 그에게, 차가운 머리와 함께 뜨거운 가슴을 만들어준게 아닐까. 그는 분명 조선인이다. 선이 굵은 투박함과 절개 있는 선비의 기운을 담고 있으면서도 어쩔때는 섬섬옥수같은 섬세하고도 예리한 서정을 흩뿌린다. 허수정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일본사, 중국사에도 두루 해박한 팩션 작가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빚어낸 인물 박명준 역시 일본에 해박함을 보이면서 팩션 소설이 역동적이듯 박명준은 그렇게 <왕의 밀사>안에서 투박하게 혹은, 섬세하게 살아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행복해져야 하는 건 죽은 분들에 대한 부채이며 예의이기 때문입니다."
박명준은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다. 마음의 정곡을 찌르며 우회적으로 설득하는 그는 탐정으로서의 역량을 십분 발휘한다. 한때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도모에를 향해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을 감수하는, 살아남은자들에 대한 의무를 말하는 그가 왜 아프지 않았을까. 왜 그녀를 보둠고 싶지 않았을까, 마는 그는 추근대지 않고 정갈함으로 역설한다. 살아남은 서러움과 죄책감을 그녀로부터 내려놓게 하면서 그 또한 가슴에 못내 담아둔 말을 꺼낸다."용서해줘. 도모에" 가식적이지 않은 그의 사죄는 도모에뿐아니라 나에게도 예리한 칼날로 되돌아와 가슴을 베었다. 소설속 인물임에도 역동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다.
"펙트를 매개로 휘황한 픽션을 버무릴 때 나는 한없이 진지하면서도 흥분되었다" 효종이나 남용익은 물론이고 막부의 실세였던 호시나 마사유키를 비롯해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모두 실존 인물이다. 이에쓰나와 마쓰오 바쇼도 그렇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만한 인물, 바쇼는 이가 번 닌자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작가는 이 바쇼란 인물을 통해 실질적으로 <왕의 밀사>의 뼈대를 구상하게 된다. 그가 닌자 가문이었던 점을 십분 활용해 기요모리의 아들로 키워지며 이에쓰나의 쌍둥이 동생으로 둔갑시킨 작가의 상상력과 기치가 놀랍다. "가끔 내가 명준 같았다", 고 말하는 작가의 기꺼운 경험에서 얻은 가슴 벅참이 내게도 전해진다.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강력하게 일었던 책이면서,
명탐정의 예리함과 명장의 칼날이 주는 서슬처럼 주도면밀한 재미를 선사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