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김주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따윈 개나 줘 버릴 것처럼 아랑곳하지 않는 한 여자가 정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부엌 구석에서 솥째 밥을 꾸역대며 입에 퍼넣고 있다. 볼따구에 말라붙은 눈물자국이 선명한 채로. 
이런 느낌을 붙들고 내내 읽힌 <빈집>은  가슴에 한웅큼 체기를 머금고 있었다. 
무능한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어머니의 상처를 고스란히 떠안고 왜곡된 감정으로 자라가는 어진은 바다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아슬하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없이 지독스런 감정의 응어리를 쏟아내지만 ’어진’만은 그 이유조차 가늠 할수도 물을 수도 없다. 유령처럼, 그렇게 빈집을 지키면서 말이다.

 
빈집에서 비롯한 공간적 의미를 먼저 들여다보게 된다. 오동나무 그네, 안방의 벽장과 안성댁의 수족관은 인물들의 성격을 그대로 담아내는 공간이다. 어진에게 오동나무 그네는 처음 어머니에게서 비롯한 의도와는 달리 한없는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공간이 된다.  땅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는 그녀, 자체이기도 하다. 안성댁의 수족관도 그녀를 붙드는 공간이 된다. 겨우 달아나던 게가 뒷걸음질쳐 결국은 되돌아 와 스스로 갇히기를 선택한 것처럼 그녀는 바다로의 길을 주저한다. 또한, 김주영 작가의 또 다른 작품 <고래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에서처럼 어머니의 벽장은 집안에서 그녀만이 소유할수 있는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유일하게 소유하고 싶은 남편의 온기를 은밀히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편에게 은신처를 제공함으로써, 남편으로 하여금 귀소본능을 잠재시키도록 만드는 방편이기도 하다.    


어머니 최씨와 전처, 이 두 인물이 가지는 전혀 새롭지 않은 관계에도 독특한 변이가 생겨나는데, 전반적으로 갈등구조를 부추기면서도 말 그대로 ’사람 人’자의 형상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미한 남편의 존재를 놓고 어머니 최씨와 전처 사이에서 벌어지는 숨바꼭질은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몸부림이 된다. 情이란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묘한 기류를 안고 있다. 빈집을 지키면서 어쩌다 한 번 보게되는 남편을  끝없이 기다리는 일이 전부가 되어버린 어머니 최씨나 남편을 찾아내라는 득달에도 오히려 그녀를 기다리는 전처, 두 사람의 지독한 기다림은 개도 안 물어 간다는 그놈의 정때문이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왁자지껄한 무리 속에서도 불현듯 외로움에 묶일 때가 있다. 마음의 허기가 좀처럼 채워지지 않을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항상이 아니어서 건재할 수 있는 거겠지. 비교적 좁은 사막을 건넜던 때문만은 아니리라. 철저하게 외롭지 않도록 붙들었던 갖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드넓은 사막을 만나더라도 어쩌면 견딜 수도 있을 것같은 야릇하고 가녀린 희망을 붙든 느낌이다. 외로움도 살아갈 충분한 이유일테니까. 


"엄마, 누가 와요." 라는 이 한 마디가 누구에게는 겉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실낱같은 반가움이면서, 어진과 배 다른 언니 수진을 연결짓게 된다. 기막히다. 임기응변이 아닌, 조작된 줄 모르는 조작처럼 치밀한 연결이다. 나는 이 한 문장으로도 김주영 작가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왜곡되고 지독스런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모멸감이 묻어나지 않는것과 언 맥주를 나눠 마시는 어촌의 두 노인네를 내세워,  여타의 인물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달관한 인생관을 보여주며 ’다 지나간다’는 인생의 해답을 전해주는 등, 작가의 의도가 옴팡지다. 이렇듯 김주영 작가의 활어活語들은 쓸개즙을 핧는듯 쓰디쓰면서도 톡 쏘는 알싸함이 일품이다. 그의 문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초라하지도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