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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스투어 - 세상에서 제일 발칙한 요리사 앤서니 보뎅의 엽기발랄 세계음식기행
앤서니 보뎅 지음, 장성주 옮김 / 컬처그라퍼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만약 내가 내일 당장 목숨을 잃을 처지의 사형수라면, 그래서 최후의 만찬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음식을 최후의 만찬으로 선택할까? 극단적인 예이기도 하고 책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숱하게 많이 들어본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나 재미없고 뻔한 상황에 대한 내 답변은? 글쎄 현실감이 없어서 인지, 체감이 되지 않아서 인지 약간 머뭇거리게 된다. 과연 나는 어떤 음식을 최후의 만찬으로 선택하게 될까? 뭐 이건 바뀔 수 도 있을거 같긴 하지만 지금 당장의 내 대답은 이거다. 적당히 잘 익은 배추김치를 적당한 크기로 숭덩숭덩 썰어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은 후, 비계를 적당히 발라낸 돼지고기 덩어리와 육수를 함께 넣어 보글보글 한참을 장하게 끓여낸 짭짤하고 입에 짝짝 붙는 김치찌개에 완두콩을 섞어 지은 하얀 쌀밥! 와우.. 생각만으로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그야말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대한민국 어느 백반 집에 가도 제일 싼 값에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김치찌개라니! 그저 상상일 뿐인데도 웬지 아쉽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의 최후의 만찬인데 태어나서 한 번도 맛보지 못했던 비싼 고급요리를 떠올려도 될 법한데, 겨우 칼칼하게 끓인 김치찌개라니... 하다 못해 비싼 중국요리쯤이라도 떠올릴 법 한데 말이다.
갈비찜, 저민 푸아그라 한 조각,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 식은 미트로프 샌드위치....인생 최후의 고민 앞에서 세계 유명한 레스토랑의 주방스텝들이 떠올리는 메뉴들도 나의 '김치 찌개'에 못지 않게 수수한 메뉴였다니 이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까? '키친 컨피덴셜'의 엄청난 흥행 이후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던 앤서니 보뎅은 자기 주방의 스텝들에게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할 '완벽한 한 끼'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과감히! 방송국을 꼬셔서! 세계를 대상으로 '완벽한 한 끼'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화장실을 갈 때에도 마이크를 착용해야 하고(물론 소리가 함께 녹음되는 걸 피하기 위해 잠시 전원을 끄는 귀찮은! 행위를 반복해야 한다.) 잠시잠깐 피로를 이기기 위해 눈을 감거나, 아파서 배를 잡고 데굴데굴 방바닥을 굴러댈 때에도 감정없이 차가운 카메라 렌즈가 항상 자신을 응시하고 있음을 자각해야했다. 매우 귀찮고 짜증나는 상황이긴 하지만 세계를 다니면서 내 돈을 쓰지 않고 숙박을 (그것도 요리는 아마 그 나라 최고가 될 것인데!) 남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일정기간의 자유를 팔아먹을 정도로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앤서니 보뎅은 그 길로 레스토랑 <레알>의 보스, 주제의 고향인 포르투갈로 날아가 요리의 기본이자 음식의 기본인 '돼지 도축'의 페스티벌로 뛰어든다. 포르투갈도 과거의 한국처럼 돼지를 잡는 날이 동네 잔칫날이 되고, 모든 부위를 골고루 온 마을 사람이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무려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 축구공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마저도 닮아있다. 그렇게 앤서니 보뎅은 여행의 첫 시작을 자신과 관련이 아주 깊은 사람의 가족과 그들의 전통음식과 함께한다. 앤서니 보뎅이 찾으려 떠난 '완벽한 한 끼'.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한끼'가 정답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앤서니 보뎅이 그렇게나 찾고 싶어했던 '완벽한 한끼'란 그것이 소울푸드와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 했다. 동생 크리스와 함께 돌아간 프랑스, 그 곳에서 어린시절 먹었던 찐득찐득한 페스트리와 싱싱한 굴. 그리고 베트남 시장통에서 먹었던 매콤하고 구수한 쌀국수, 모로코의 타진과 러시아의 보드카. 일본의 가이세키 요리 까지. 그가 맛을 본 것은 모두 그 나라의 오래되고 특별날 것 없는 로컬푸드들이었다. 물론 굉장히 이름 높은 쉐프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그 유명하고 운이 좋은(!) 토머스 캘러가 운영하는 <프렌치 론드리>에 가서 먹은 그 최고급 코스요리 보다 더 기억에 남았던 것은 베트남 시장통 길거리 지저분한 식당에서 끓여먹었던 쌀국수였다.
영국, 미국, 포르투갈, 일본, 베트남, 캄보디아... 그야말로 동서를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그는 정말 쉬지 않고 먹어댄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부인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 현지 레스토랑(이라고 하기보다는 매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오너 겸 쉐프인 거스의 특제 소스를 듬뿍 발라 구운 돼지갈비와 치즈버거, 그리고 눅눅한 감자튀김을 차게 내온 맥주와 함께 마무리 한다. 그가 그렇게나 싫어해서 무려 '텔레비전 촬영 따위 개나 줘버려야 하는 이유'까지 만들어 냈던 TV맛기행을 떠나게 했던 이유인 '완벽한 한 끼'는 끝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해가며 찾았던 그가 만난 세계 최고의 '완벽한 한 끼'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가 발의 감각마저 잃어가며 맛보았던 가이세키 요리가 그 '완벽한 한 끼'일 수도 있고, <레알>의 부주방장인 에디의 가족과 함께 했던 왁자지껄한 잔치가 그 '완벽한 한 끼 '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개나 줘버릴' 촬영팀과 함께 한 고생덩어리, 좌충우돌 맛기행에서 세계 최고의 맛있는, 그래서 누구나 공감할만한 '완벽한 한 끼'를 찾으려 했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인생 최고의 '완벽한 한 끼'를 경험하려고 했었다는 편이 더 어울릴 것같다. '완벽한 한 끼'와 '모험'을 꿈꿨던 그의 여행은, 그 빌어먹을 촬영 탓에 귀찮기는 했지만, 완벽히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