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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수능이 끝나고, 학교에서는 더 이상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 그리고 가르칠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고 3 수험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다. 아침 늦게 등교해서 영화 한편보고 하교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본 영화 중에 “메멘토” 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살아가는 남자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남자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은 24시간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그 하루의 모든 일들을 밤이 되어 잠이 들어 그 다음 날 깨어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이야기였는데, 굉장히 충격적인 반전을 가진 영화였다.
그렇게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5년이 지나서 한 일본 영화의 팜플렛을 보게 됐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영화였다. 왠지 제목부터 풍기는 필이 이과적인 냄새가 났다. 무려 박사님께서 사랑하시는 수식이라니…… 혹시 “뷰티플 마인드” 같은 영화 이려나? 하는 생각에 무심히 지나쳤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서 내가 가는 커뮤니티에서 이 영화를 다시 소개 받았다. 과연 어떤 영화이길래? 하는 생각에 원작이 책을 먼저 찾아 읽게 되었다.
무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제목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이 책. 그러나 뭔가 심오해 보일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책은 작고 얇고 또 가벼웠다. 여기엔 메멘토의 남자 주인공보다도 더 절박해 보이는 박사가 나온다. 젊은 시절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해 낼 수 잇는 과거는 젊은 시절의 일뿐이고, 현재라고는 자신이 기억해 낼 수 있는 80분이 전부인 그런 노인이다. 하루의 일과 대부분을 수학문제 푸는 것에 소일하는 박사는 극히 한정된 사람을 만나고 수학문제에 파묻혀 살아간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어떤 잘나신 분이 한 말씀이 있었다. ‘수학은 언제나 답이 존재하기 때문에 좋아. 수학은 노력한 사람을 배반하는 법이 결코 없거든? 언젠가 답은 나오게 돼있어. 수학보다 더 솔직한 학문은 없어’ 굉장히 살의를 품게 하는 말이었지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 또한 이러한 류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신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언제나 답은 나온다는 생각을 가진 그는 수학을 사랑한다.
자신이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박사는 옷에 종이를 클립으로 끼워서 매일 아침마다 보며 현실을 이해해 나간다. 마치 “메멘토” 의 주인공이 잊지 않기 위해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처럼 박사는 자신이 기억해야 할 모든 것을 쓴 종이를 클립으로 끼워 옷 여기저기에 붙이고 다닌다.
걸을 때마다 옷에서는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나고, 80분 마다 현실을 다시 인식해야 하는 박사는 타인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뿐이다. 하지만 오직 열 번째로 그의 집을 찾게 된 가정부와 그 가정부의 아들에게만은 그렇지 않다.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스스로가 미혼모가 된 가정부, 그리고 미혼모의 아들인 그녀의 아들. 사랑과 사람, 그리고 관심이 부족한 그들은 박사를 이해한다. 비록 기억을 하지 못해 이미 했던 이야기를 수 십 번, 수 백 번을 다시 이야기하는 박사이지만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은 지루한 내색도 없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또 비록 80분이 지나면 기억하지 못할 경험이지만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도 만들어준다.
사실 굉장히 유식이 철철 넘쳐나는 박사와 고등학교를 중퇴한 미혼모, 겨우 초등학생일 뿐인 그녀의 아들이 유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박사의 하나의 버릇으로 해결된다. 박사는 가정부의 아들을 루트라고 부르고, 가정부의 생일에서 완전수를 찾아낸다. 숫자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가정부와 초등학생인 그녀의 아들은 학교에서 배우는 수학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수학을 박사의 생활에서 배우게 된다.
가정부와 그녀의 아들이 박사에게서 배운 것은 비단 수학만이 아니다. 답을 찾기 위해 정해진 방법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도대체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수학을 통해서 연대감을 느끼고 그들만의 방식을 찾아간다.
미혼모와 미혼모의 자식, 그리고 평범하지 못한 장애자. 이들은 박사와 가정부와 그의 아들이다. 사회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 받기도 한다. 그들이 타인에게 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피한다. 그래서 혼자로는 세상에 나설 수 없었다. 하지만 박사와의 만남으로 박사는 처음으로 라디오를 통해 야구경기를 듣고, 치과에 가고, 야구장에 갔다. 세상과의 소통을 한 것이다. 가정부 또한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사랑과 사람에 굶주렸던 자신을 깨닫는다. 박사가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을 때 느끼던 그녀의 부러움과 질투. 그리고 그녀의 아들 또한 별 것 아닌 자신의 상처에 자신을 들춰 매고 병원으로 뛰었던 박사를 더 이상 창피해 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자 책을 올리고 얼굴을 당당히 들고 박사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다. 왠지 모르게 위축되어있던 그들이 힘을 가지고 세상에 맞서는 방법을 알아가게 된 것이다.
80분만 기억한다는 설정은 이 이야기를 극적이게 만들어 주긴 하지만 현실성을 앗아갔다.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마치 로봇처럼 80분을 기록하고 지워버리고 다시 기록하는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간을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설정은 이야기에 신비함과 동시에 환상적인 느낌을 부여해준다. 서로에게 의지해 한 보 전진해 나가는 그들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마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나도 그들의 동지가 된 듯했다.
나는 수학을 싫어한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만 있으면 이세상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박사처럼 나에게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다면, 나도 가정부처럼 그렇게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