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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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갓 입학해서 국어시간이었다. 그때 우리 국어선생님은 젊으신 여자분이셨는데, 아마 대학을 졸업 하신지 얼마 안되어 보였다. 그러나 여자의 나이를 그 누가 알랴. 어쩌면 서른이 훨씬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선생님이 어떤 내용을 가르치시다 꺼내신 책이름이 있었는데 바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그런데 그 이후로 그 책이름은 나에게 “이반 소데비치의 하루”로 기억이 돼왔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공부내용 보다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책의 이름을 더 잘 기억하는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왜 그렇게 기억됐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읽은 민음사 판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라는 제목을 달고 나왔다.

러시아 쪽 소설을 읽다 보면 굉장히 힘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름이다. 김아무개, 박아무개 등의 우리나라식의 짧고 간결한 이름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겐 표도르비치 어쩌구저쩌구 하는 식의 긴 러시아 이름, 거기에 소리 내어 읽기엔 잠시 쉬어가야하는 그런 러시아 이름은 영 익숙해 지지가 않는다. 더구나 이반이란 이름은 너무 많아서 이 이반이 톨스토이의 이반인지, 누구의 이반인지도 헷깔리는 경우가 속출한다. 하지만 이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이반은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이반과는 달랐다.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이름보다는 슈호프라는 간결한 이름으로 불리는 수용자다.

사람들이 모이면 어쨌든 법이 만들어지고, 계급이 만들어지고 또 그 안에서 무리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수용소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수용소이기 때문에 조금(실은 좀더 많이) 거칠 뿐이다. 슈호프의 경우는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쳐 나왔지만 적군의 포로였다는 점 하나 때문에 10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비단 슈호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불쌍하다. 전시가 아니라면 일반인으로서 평안하게 살아갔을 사람들이지만 전시기 때문에 수용소에서 복역중이다. 그리고 출소할 날이 되어도 이것저것 꼬투리를 잡는 사람 때문에 10년도! 몇 년 더 복역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솔제니친은 이 작품에서 제목 그대로, 수용소의 하루를 보여준다. 죄가 없어 보이는 어린아이까지 단지 반군에게 우유를 건네주었다는 이유로 끌고 와 복역시키는 권력층과 실제로 형사법을 어긴 살인자들이면서도 일반 복역자 위에 군림하며 또 다른 권력을 행사하는 죄수들, 멀건 죽 하나 쑤어주면서 단지 식량배급에 관련하여 일을 한다는 이유로 또 다른 권력을 형성하는 죄수들. 수 백 여명이 넘는 명이 복역하고 있는 이 수용소 안은 또 하나의 부조리한 사회를 축소해 놓은 듯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삭막하고 고된 수용생활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안에서 생활하는 죄수들의 모습이다. 누군가가 행사하는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폭력에 길들여져 가는 사람이 아닐까? 슈호프를 비롯한 사람들은 인권적 대우를 기대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에 반감을 가지기 보다는 적응을 해 나간다. 물론 그것이 살아가는 방법이겠지만 읽는 사람은 괴롭다.
배급자를 속여 죽 한 그릇을 더 챙기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뇌물을 먹이고, 좀더 편하기 위해 동료를 밀고한다. 그런 것과 자의적으로 타의적으로 멀어 보이는 슈호프마저 빵부스러기 하나 더 얻어먹을까 눈에 불을 켠다.

솔제니친은 이 소설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국에서 외면을 받게 된다. 이 소설은 권력자들의 모순적인 행위와 정상적이지 못한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읽으면서 마음이 즐겁지 못하다. 때가 때이니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아마도 북한 어딘가의 정치범 수용소의 수용자들이 이런 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소설이라고 치부해버리기엔 슈호프와 그 수용소의 모습이 너무 마음이 아픈 현실로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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