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은,

  아마도 내가 두고두고 평생 후회할, 때로는 눈물 없인 못 떠올릴 말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멀쩡한 게 아니고 정말 바보일지 모른다.

  바보라서 바보인지도 모르는지 모른다.

  엄마가 멀쩡한 나를 바보로 만든 게 아니라 내가 바보라서 걱정을 한 건지도 모른다.

  나는 동생댁이 만삭이 되어 오늘내일 할 즈음 독립을 했다.

  어머니가 그나마 나의 독립 투쟁에 그쯤에서 승복한 것도 출산문제가 코앞에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생댁의 출산으로 내가 겪을 마음을 고려했는지, 산바라지가 어머니에게 과중하게 느껴졌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동생댁의 출산이 어머니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여 다른 생각을 뒤로 밀쳐두게 한 건 사실이었다.

**

 

  울다 잠이 들었나 보았다.

  우는 건 사람을 꽤 지치게 만든다. 악을 쓰고 울던 아이들이 그 다음 하는 일은 잠자기가 아닌가. 나는 깊게 잠을 잤다. 눈을 뜨는 순간 알았다. 꿈도 없이 잤으니까. 그리고 깨는 순간 놀랐다. 다른 세상에 갑자기 날아온 기분이었으니까. 깊이 못 자는 날은 깨어나는 것도 시름시름 깨어난다. 잠과 깨어남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래서 자면서도 깨어있고 깨어나면서도 잠을 자는 기분이다.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밤, 혼자 우두커니 누워 있는 걸 괜히 측은히 여기며 눈물을 뽑고, 그런 다음엔 쉽게 잠이 드는 수가 종종 있다. 그런 날은 아침까지 푹 잘도 자버려 눈이 떠지면 어리둥절하곤 했다. 여기는 어떤 세상인가? 내가 뭘 하던 사람이지? 하면서 한참동안 세상을 탐색한다. 그러나 밤새 틈틈이 잠이 깨어 내가 어디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일어나서는 어디를 가야하는지를 의식하며 잔 날은, 일어나는 순간 시계를 확인하고 출근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돌아눕다 잠이 깼다. 눈이 맑게 떠졌다. 공연히 혼자 울다 잠들었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픽 난다. 시계는 거의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가슴을 누르고 있던 이불을 밀치고 몸을 일으켰다. 가벼운 현기증, 앉은 채로 잠시 앉아 있었다.

 

  냉장고로 가는 동안 토스트를 먹을까, 포스트를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토스트로 결정을 보았다. 머리에 흘렀던 땀이 식어서인지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한기를 느꼈고 그러자 뜨거운 커피가 먹고 싶었다. 커피를 마시려면 토스트가 궁합이 맞기 때문이다. 냉장고 문을 닫고 갈아놓은 커피를 꺼내려고 냉동실 문을 여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커피 통에 닿은 손이 커피를 꺼내 놓고 전화를 받을까 전화부터 받을까 고민을 하다가 빈손으로 빠져나왔다.

  <여보세요.>

  <단비야, , 소형이. 일어났니? 잠 깨운 거 아냐?>

  <깨웠으면 어쩔래, 도로 물려줄래?>

  <그래, 물려줄게, 전화 끊고 다시 자라.>

  <와하하!>

  나는 크게 웃었다. 소형이를 고수로 창을 했다면 아마 장단이 기가 막히게 맞았을 것이다.

  <근데, 무슨 일?>

  <우리 집에 아침 먹으러 오라고. 설마 벌써 아침을 드신 건 아니겠지?>

  <어머니는? 어디 가셨니?>

  <눈치는 백단이로고. 그래, 혼자 있어. 준비 다 됐으니까 후딱 와.>

  <어디 가셨는데?>

  <, 와서 얘기 해. 끊어.>

  매정하기는.

  난 화장실로 들어가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도대체 어머니가 어딜 가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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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게 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도 그 중 하나이다. 어떤 것이 변화하려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주변의 작용이 필요하다. 싹이 나서 어린 나무가 되고 거목이 자라는데 물과 흙, .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듯. 마음이 열리고 닫히고 그리고 변화하는 데도 그런 작용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억지로, 말로써 모든 게 되는 게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관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고, 결국 서로 의미가 되지 못하는 관계도 있겠지만.

  어쨌든 당시엔 다양한 작용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피곤했다.

  피곤한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다.

  내 인내심을 나무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하찮은 체력을 나무라야 하는지도.

 

  휴일 아침이면 어머니는 아침을 차려놓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단비야, 니 동생댁도 일어났고 아침 다 됐다.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자거라.’

  짜증이 났다. 도대체 누구도 편하지 못한 이 생활을 누구를 위해 해야 되는가. 편치 않은 혼잣소리로 궁시렁거렸지만 내뱉지는 못했다.

  그 달콤하던 일요일 늦잠은 추억이 돼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다른 삶 속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습관에 젖어 살던 사람과 자연스럽게 섞이기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른이 훨씬 넘도록 결혼을 안 하는 여자, 아니 결혼 생각도 없는 여자와 그 여자를 다그치지 않는 어머니. 동생댁이 보기에 나와 어머니는 매우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동생댁은 가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사람 소개도 하고 번번이 그걸 거절해야 하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속이 상했다. 상식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생댁의 사고로는 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상식선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말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어디가 모자란 것도 아닌 멀쩡한 딸을 두고 그런 상상을 하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대놓고 나무랄 수도, 그리고 설득을 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도 조금씩 변했는지 모르겠다. 며느리의 상식이 어머니의 상식과 연결되었는지도. 아니 며느리 덕분에 감추어두었던 본심이 드러났는지도.

  독립을 하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단비, 너 정말 결혼할 생각 없니. 사람 없어?>

  너무도 당연히, 내 마음을 알고 생각을 존중하고 있으려니 믿고 있었던 어머니가 던진 질문. 새삼스런 그 물음이 얼마나 생소하게 느껴졌던지. 그리고 그 순간 어머니께 느꼈던 거리감은 얼마나 낯설고 기막힌 것이었던가.

  이해를 하자면 못하겠는가. 자식을 가진 부모의 일반적인 마음만 헤아려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남들과 같이, 남들 하는 대로 살았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모든 자식은 그들의 부모에겐 특별한 존재이듯 나에게도 어머닌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세상과 다른 잣대로 과분한 사랑을 내려도 당연했고 나도 세상과 다른 잣대로 어머닐 대하며 마음껏 편함을 누렸다. 오직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맹목적 믿음.

  그랬으니, 어머니의 정색한 질문에, 얼음을 삼킨 것처럼 서늘해지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어머닌 내 결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친지들이, 동네 사람들이 결혼 문제로 많은 말들을 해도, 나한테 그 말을 전하지 않았다. 당신 선에서 듣고 잘랐다. 쉽지 않은 결단이라고 생각은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머니는 백 명의 군사 부럽지 않은 든든한 한 사람의 아군이었다. 분명히 그 때까진 그랬다.

 

  <엄마까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진작 독립 한다 그랬잖아요. 괜히 엉뚱한 소리나 듣게 하고. 본래 자식은 그렇게 오래 끼고 사는 거 아니래. 그리고 제발 내 걱정 좀 하지 마. 엄마가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든다는 거 알아요? 자주 오면 되잖아.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데. .>

  결국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된 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께 그런 말까지 하면서 나오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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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까지도 난 유별난 어머니 덕분에 설거지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닌 닥치면 할 수 없이 하게 될 집안일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살림하는 연습은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결국은 여자가 평생에 걸쳐 해야 되는 일이니 일찍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그건 일찍부터 배워야 할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부지런함과 참을성이 차라리 더 필요한 일이라고도 했다.

   하여튼 여태 지극히 당연했던 손 하나 까딱 안 하던내 생활 방식이 동생댁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눈치를 보게 되는 행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자랑도 자책도 아닌 그저 사실보도이다.

이렇게 있는 대로의 내 과거 생활 습성을 전달하는 까닭은 변화된 환경에서 달라져버린 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함일 뿐이다.

 

   저녁을 먹고 동생댁이 설거지를 할 때,

  일요일에 어머니와 동생댁이 대청소를 할 때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공연히 서성거리게 되었다.

  어머니도 며느리를 본 후로 일이 더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산수적으로 보면 며느리가 하는 일만큼 줄어야 되지만 아니었다. 더 이상 마음 편하게 나를 공주놀이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며느리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멀쩡한 장롱에 윤을 내기도 하고 서랍을 엎어 정리하기도 했다. 며느리가 서 있으면 어머니도 앉아 있지 않았다. 나를 앉혀놓아도 그 몫의 일을 어머니가 한다는 걸, 며느리가 알아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랬을 것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휴일에 하루 종일 잠옷 바람으로 뒹굴던 걸 포기했다.

  저녁 먹은 후 식탁을 그대로 둔 채 반쯤 졸며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던 여유도 사라졌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거지가 끝난 며느리와 같이 과일을 챙겨들고 비로소 마음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물론 나도 얼마 동안은 반듯하게 앉아 과일을 먹는 단란함에 끼어들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내 체력은 그런 체면까지 차릴 처지가 못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눕거나 기대어 빈둥거릴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피로가 풀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우리들은 그렇게 가깝지 못했고 상대의 허물이나 행동에 오해가 없을 만큼 서로를 잘 알지도 못했다. 동생댁도 그랬겠지만 나도 체면을 차려야 했다. 그래서 난 저녁을 먹고는 바로 내 방으로 건너오는 걸로 방식을 바꾸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고역을 피하는 방법은 그 길 밖에 없었다.

 

  밥 먹은 뒤 금방 일어나 설거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를 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어머니의 습관은 그게 아니었다. 밥 먹은 자리를 그대로 밀쳐두고 과일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오기 바빴다. 과일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더러는 초저녁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실컷 쉬다가 내가 씻으러 일어나면 어머니도 설거지를 하러 나가거나 아니면 대충 덮어놓고 아침에 하기도 했다.

  그랬던 어머니의 습관을 며느리가 알 리가 없고, 며느리 또한 시집 와서 바뀐 습관인지 어머니도 몰랐다. 어쨌든 구성원이 달라졌으니 새로운 관계 방식이 만들어져야 했다. 허물없이 가까워지기 전까진 서로 조심하고 눈치를 보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해서 마음을 알아 가면 되지 않느냐고?

  대화란 것이 만능은 아니다. 대화를 해서 마음을 안다기보다 마음을 알기 때문에 대화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 그 대화도 진실한 것이다. 마음의 문의 열쇠는 각자의 손에 들어있고 자신만이 열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닫은 채로도 얼마든지 대화는 가능하다. 진실하지 않은 대화가. 그래서 말로써 사람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단순하거나 아님 교만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는 단순함 혹은 자기의 설득력을 너무 과신하는 교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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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독립을 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제일 걱정한 것도 밥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과한 걱정이 독립을 힘들게 한 것도 사실이다.

 

  난 남동생이 결혼을 하면 바로 독립을 하려고 했다.

 

  동생이 결혼 날짜를 받은 날.

  처음으로 독립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닌 펄쩍 뛰었다. 안 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오직 밥! 자식에게 밥을 먹이는 일이 어머니에겐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인 것 같았다. 아니 다른 목표는 애초에 없는 사람 같았다. 물론 나는 수천 번 더 밥을 잘 해 먹겠다는 약속과 다짐을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은 다른 이유를 들이대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굳이 그런 감정을 어머니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머니껜 내가 딸이지만 새사람에게는 시누이고, 요즘 시부모와 같이 산다고 하는 사람도 흔치 않은데 시누이까지 말이 되냐고, 입장을 바꿔 보라고. 내가 시집갈 곳에 결혼 안한 시누이가 같이 산다면 좋겠냐고.’

  그래도 막무가내였다.

  ‘며느리가 들어와도 살림은 내가 한다. 그건 며느리가 살림할 때나 해당된다.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일 많다고 싫어한다는 말 아니더냐. 하지만 살림은 내가 맡아 할 텐데 무슨 쓸데없는 걱정이냐. 너는 엄마 밥 얻어먹는 거지 동생댁 밥 얻어먹는 거 아니니 하나도 어려울 거 없다.’

강력했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일단 주저앉았다.

 

  그러나 며느리를 맞이한 우리집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일은 예상했던 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었다.

  남동생과 나의 출근 시간은 비슷했다.

  어머니는 마음 놓고 나의 아침 뒷바라지를 할 욕심으로 서둘러 부엌을 차지하려 했고 동생댁은 동생댁대로 시집살이라는 게 이렇다.’고 들은 대로 잘해보려고 아침을 서둘렀다.

  두 사람이 부엌으로 들어갔지만 손에 익은 어머니가 주도권을 잡게 돼 있었다. 그래서 동생댁은 그저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수저를 놓고 반찬 접시를 날랐다.

  남동생과 내가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계속 반찬을 만들고 우리가 숟가락을 놓을 때까지 분주했다. 시어머니가 그러고 있으니 며느리도 앉을 수가 없고 참 묘하게도 나는 서 있는 동생댁에게 미안한 신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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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이 피곤한 날은 꼭 몸도 피곤하다.

 피곤한 꿈 때문에 몸이 고단한 건지 고단했기 때문에 꿈이 피곤한 건지, 어느 게 먼저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정말 먼 거리를 뛴 것처럼 다리가 무거웠다.

       

  '소리를 내며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다시 잠들 때를 대비해서 미리 돌아누워 있는 것이다. 같은 자세는 꾸던 꿈을 계속 꾸게 한다는 속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벽이다. 벽을 보고 있으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어서 덜 성가시다.

  스님들이 그래서 벽을 보고 앉아서 수행을 하는 건가?

  눈이라는 게 워낙 사교성이 좋아서 보이는 것마다 꼭 생각을 하나씩 물어낸다. 그래서 보이는 게 많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잠들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벽 쪽으로 누우면 금방 잠이 드는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벽을 보고 누워 두 세 시간씩 시간을 보내며 잠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굳이 잠을 청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다음날 출근이 기다리고 있는 한밤중도 아니고, 자고 싶으면 하루종일이라도 잘 수 있는 일요일이다. 그냥 잠자리를 떠나기 싫어서 뒹굴 뿐이다.

     

  혼자 살면서 좋다고 느낄 때가 이런 때이다.

  내 기분에 충실할 수 있으니까.

  입 떼기도 싫은 날 아침에 대꾸해줘야 할 상대가 없어 좋고, 울고 싶을 때 울음을 참느라 목이 아플 필요가 없어 좋다. 그냥 한없이 앉아 있고 싶은 날, 내 얼굴 쳐다보며 무슨 걱정 있냐고 물어 맥 빠지게 하는 사람 없어 좋고, 내 표정보고 내 마음 멋대로 추측하는 사람 없어 좋다. 상대 기분 맞추느라 표정 관리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오늘 같은 날,

 혼자 산다는 게 정말 좋다.

  그런데 왜 눈물이 나지?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좋은 걸 이렇게 많이 나열하면서 눈물을 흘리다니.

**

 

  집에서 독립하여 나오기 전,

  일요일 아침마다 어머니는 잔칫상을 차렸다.

  ‘평소엔 네가 바빠서 옳게 먹을 시간 없고, 일요일 하루라도 골고루 먹어야지.’

  잔칫상 앞에서 어머니가 노래삼아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리하여,

  아홉 시는 넘어야 먹을 아침을 위해 새벽부터 부엌에서 덜그럭거렸다.

  그 때 나는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을 보고 부담부터 느꼈다.

  그 가짓수 많은 반찬들을 한 번씩만 먹어도 배는 찰 것인데, 한 번씩 들어내서는 표도 안날 정도로 어머니는 손이 컸다. 안보는 척 하면서 내가 먹는 걸 보고 있다는 걸 아는 나로서는, 특히 아침에 밥 먹기가 괴로운 나로서는 일요일마다의 잔칫상 식사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그 고역도 동생이 결혼을 하고부턴 동생댁 눈치 보는 고역이 되어버렸지만.

      

  많이 먹지도 않는데 제발 한 두 가지씩만 하라고 당부하면,

  ‘그런 소리 마라. 안 그래도 양 적은데 골고루라도 먹어야지. 한 번씩만 먹어도 열 가지면 열 번 먹잖냐.’

가 내 말문을 막아버리는 어머니의 주장이다.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이 한데 섞여 슬프기까지 했다.

  한 공기 소복하게 뜬 밥을 먹다가 먹다가 다 못 먹고 숟가락을 놓으면 어머니는 내 먹던 밥을 당겨다 드셨다.

 다 안 먹을 줄 알면서 왜 그렇게 많이 푸느냐고 하면,

 ‘사람 밥은 그렇게 뜨는 게 아니다. 남기더라도 복스럽게 담아야 나중에 잘 살지. 그래야 또 니가 밥 한 술이라도 더 먹을 거 아니냐. 혹시 아냐? 더 먹을 수 있는데도, 밥 적어 그냥 있는 대로만 먹고 숟가락을 놓을지.’

  그 말에 내가 어떤 대꾸를 할 수 있겠는가.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결국엔 아무리 반찬을 많이 하고 밥을 수북하게 담아 놓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먹고 도저히 못 먹겠다 싶으면 숟가락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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