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의 감정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 걸까.
초점이 도대체 어딜 향해 있는 걸까.
뒤집어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지적들을 두고 섬세하다고 칭찬한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 자세히도 보셨네, 하고.
자세히 본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게 눈에 뜨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전력질주하는 사람을 보고 있었다면, 더구나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면 볼살이 심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도 그 상황에 그런 말이 정상적인 감정의 표현인가.
적어도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표현하는 것에다 도저히 ‘섬세’라는 말을 붙여줄 수가 없다. 정말 섬세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표현’이 상황과 상대 ‘기분’에도 맞을까,고려하며 표현할 것이라 생각한다. 보이는 대로, 내 감정대로 말하는 건, 어린아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상대가 처한 현실과 심리까지 꿰뚫는 눈치가 없다. 눈치 없는 어른을 ‘섬세’로 포장해야 하겠는가 말이지.
내 주장이 맞다면, 수자는 결코 섬세한 편이 못 된다.
분명히 상대도 인정하고 있는 상대의 약점을, 그것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어려운 자리에서 생긴 일을, 상대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짚고 넘어가는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밖을 향하고 있는, 나의 냉정해진 얼굴을 눈치 챘는지 수자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창 쪽으로 돌렸던 얼굴을 다시 커피잔으로 옮겼다. 분위기가 어색해져 있었다. 소형을 위로한답시고 끌고 나와서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형이 병실을 오래 비워둘 수도 없는데, 이렇게 편치 못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어떤 말로 이 어색함을 깨뜨려야 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난 수자처럼 감정을 빨리 털어버리는 재주가 없다.
죄 없는 커피 잔만 뱅뱅 돌렸다.
거의 그대로 남아 있던 커피가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단비, 너 커피 더 마실 거 아니지?>
소형이가 우리 사이의 어색한 침묵을 깼다.
잘못한 일로 기죽어 있던 아이가 말붙여주는 어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난 기회가 지나갈세라 얼른 대답했다.
<응, 너 더 마실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잔을 들어 소형에게 내밀고 있었다.
소형에게 커피잔을 이미 내밀었을 때야 ‘좀 더 마시고 싶은데’ 하는 욕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커피 한 모금 때문에 한 입으로 두 말 하랴. 더구나 그다지 간절한 것도 아니고. 아직도 커피 한 잔을 온전히 마셔본 적도 없는 내가 말이다.
커피에 있어선 나와 소형은 정 반대다. 소형은 커피 남아 있는 꼴을 두 눈뜨고 못 보는 반면, 나는 남은 커피를 한 점 거리낌도 없이 버릴 수 있다.
잔을 들어 소형의 혀로 핥은 듯 깨끗한 잔에 나의 아깝지 않은 커피를 남김없이 부었다.
<단비 너 참 웃겨.>
자기 잔으로 부어지는 커피를 보며 소형이 말했다.
<뭐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길 거면서 꼭 네 몫 시키는 거 말이야.>
<조금은 먹고 싶거든. 많이 먹는 사람 입만 입인가? 그리고 좀 얻어먹고 싶어도 이 중에 남기는 사람이 있어야지.>
<듣고 보니 미안하네. 남겨줄 사람이 없었다 이거지? 하긴..... 그러고 보니 내가 늘 2인분이었다. 그지? 말하자면 넌 대식가인 나의 희생양?>
<소형이 너만 그러냐. 불쌍한 애 피 빤 사람 여기도 한 명 더 있다.>
겨울에도 얼음 찾는 수자가 얼음만 남은 유리잔을 흔들며 웃었다.
맞는 말이다. 내가 시원한 음료를 시킬 경우 그건 또 수자 차지였다.
<그건 농담이고. 찻집이야 어차피 자리 값이잖아. 자리 값은 해야지.>
커피를 두 잔째 마시고 있던 소형이 피곤한 눈자위에 주름이 잡히도록 활짝 웃었다. 웃으면 분위기가 참 달라진다. 뼈도 없이 순한 인상이 된다. ‘나쁜 것’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듯한, 위험해보일 정도로 착한 얼굴이 된다. 웃지 않을 때도 딱딱한 인상은 아니다. 그런데 웃으면 완전히 또 다른 얼굴이다. 소형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어쩌면 저 인상이 소형의 본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울고 웃을 때 바탕이 드러나는 지도 모른다고.
<농담이라도 어째 좀 걸린다.>
<왜?>
<먹지도 않을 걸 왜 시키냐고, 하기만 했지, 남겨 준다고 한 적은 없네?>
<남길 자신은 있고?>
<절대 없지. 농담이라도 그 말은 못하겠다.>
<그럼 걸리지도 말아야지. 마음에도 없구만.>
<항복!>
소형이 두 손을 들며 웃었다.
<미경이 너는 뭐 할 말 없어? 넌 단비 꺼 탐낸 적 없단 말이지?>
수자가 듣기만 하면서 웃고 있는 미경을 향해 화살을 날린다. 화살을 맞은 미경이 화살이 너무 작아 간지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자세를 바로 잡으며
<왜 갑자기 나보고 그래?>
하면서 대답을 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