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까지도 난 유별난 어머니 덕분에 설거지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닌 닥치면 할 수 없이 하게 될 집안일을 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살림하는 연습은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결국은 여자가 평생에 걸쳐 해야 되는 일이니 일찍 시작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그건 일찍부터 배워야 할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부지런함과 참을성이 차라리 더 필요한 일이라고도 했다.

   하여튼 여태 지극히 당연했던 손 하나 까딱 안 하던내 생활 방식이 동생댁이 들어오고 난 뒤에는 눈치를 보게 되는 행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자랑도 자책도 아닌 그저 사실보도이다.

이렇게 있는 대로의 내 과거 생활 습성을 전달하는 까닭은 변화된 환경에서 달라져버린 내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함일 뿐이다.

 

   저녁을 먹고 동생댁이 설거지를 할 때,

  일요일에 어머니와 동생댁이 대청소를 할 때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공연히 서성거리게 되었다.

  어머니도 며느리를 본 후로 일이 더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산수적으로 보면 며느리가 하는 일만큼 줄어야 되지만 아니었다. 더 이상 마음 편하게 나를 공주놀이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며느리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멀쩡한 장롱에 윤을 내기도 하고 서랍을 엎어 정리하기도 했다. 며느리가 서 있으면 어머니도 앉아 있지 않았다. 나를 앉혀놓아도 그 몫의 일을 어머니가 한다는 걸, 며느리가 알아줬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랬을 것이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휴일에 하루 종일 잠옷 바람으로 뒹굴던 걸 포기했다.

  저녁 먹은 후 식탁을 그대로 둔 채 반쯤 졸며 안방에서 드라마를 보던 여유도 사라졌다.

  어머니는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설거지가 끝난 며느리와 같이 과일을 챙겨들고 비로소 마음 놓고 방으로 들어왔다. 물론 나도 얼마 동안은 반듯하게 앉아 과일을 먹는 단란함에 끼어들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내 체력은 그런 체면까지 차릴 처지가 못 되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눕거나 기대어 빈둥거릴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피로가 풀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그런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우리들은 그렇게 가깝지 못했고 상대의 허물이나 행동에 오해가 없을 만큼 서로를 잘 알지도 못했다. 동생댁도 그랬겠지만 나도 체면을 차려야 했다. 그래서 난 저녁을 먹고는 바로 내 방으로 건너오는 걸로 방식을 바꾸었다. 반듯하게 앉아 있어야 하는 고역을 피하는 방법은 그 길 밖에 없었다.

 

  밥 먹은 뒤 금방 일어나 설거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며느리를 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래 어머니의 습관은 그게 아니었다. 밥 먹은 자리를 그대로 밀쳐두고 과일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오기 바빴다. 과일을 먹으며 드라마를 보고 더러는 초저녁잠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실컷 쉬다가 내가 씻으러 일어나면 어머니도 설거지를 하러 나가거나 아니면 대충 덮어놓고 아침에 하기도 했다.

  그랬던 어머니의 습관을 며느리가 알 리가 없고, 며느리 또한 시집 와서 바뀐 습관인지 어머니도 몰랐다. 어쨌든 구성원이 달라졌으니 새로운 관계 방식이 만들어져야 했다. 허물없이 가까워지기 전까진 서로 조심하고 눈치를 보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왔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를 해서 마음을 알아 가면 되지 않느냐고?

  대화란 것이 만능은 아니다. 대화를 해서 마음을 안다기보다 마음을 알기 때문에 대화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 그 대화도 진실한 것이다. 마음의 문의 열쇠는 각자의 손에 들어있고 자신만이 열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닫은 채로도 얼마든지 대화는 가능하다. 진실하지 않은 대화가. 그래서 말로써 사람을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단순하거나 아님 교만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믿는 단순함 혹은 자기의 설득력을 너무 과신하는 교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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