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게 있다.

  세상에는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많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마음도 그 중 하나이다. 어떤 것이 변화하려면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주변의 작용이 필요하다. 싹이 나서 어린 나무가 되고 거목이 자라는데 물과 흙, . 그리고 보이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듯. 마음이 열리고 닫히고 그리고 변화하는 데도 그런 작용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억지로, 말로써 모든 게 되는 게 아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관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고, 결국 서로 의미가 되지 못하는 관계도 있겠지만.

  어쨌든 당시엔 다양한 작용이 필요했던 시간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피곤했다.

  피곤한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다.

  내 인내심을 나무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님 하찮은 체력을 나무라야 하는지도.

 

  휴일 아침이면 어머니는 아침을 차려놓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단비야, 니 동생댁도 일어났고 아침 다 됐다. 일어나서 밥 먹고 다시 자거라.’

  짜증이 났다. 도대체 누구도 편하지 못한 이 생활을 누구를 위해 해야 되는가. 편치 않은 혼잣소리로 궁시렁거렸지만 내뱉지는 못했다.

  그 달콤하던 일요일 늦잠은 추억이 돼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다른 삶 속에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습관에 젖어 살던 사람과 자연스럽게 섞이기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서른이 훨씬 넘도록 결혼을 안 하는 여자, 아니 결혼 생각도 없는 여자와 그 여자를 다그치지 않는 어머니. 동생댁이 보기에 나와 어머니는 매우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동생댁은 가끔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사람 소개도 하고 번번이 그걸 거절해야 하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속이 상했다. 상식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동생댁의 사고로는 내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상식선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말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어디가 모자란 것도 아닌 멀쩡한 딸을 두고 그런 상상을 하는 며느리를 어머니는 대놓고 나무랄 수도, 그리고 설득을 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면서 어머니도 조금씩 변했는지 모르겠다. 며느리의 상식이 어머니의 상식과 연결되었는지도. 아니 며느리 덕분에 감추어두었던 본심이 드러났는지도.

  독립을 하기 며칠 전에 어머니가 정색을 하고 내게 물었다.

  <단비, 너 정말 결혼할 생각 없니. 사람 없어?>

  너무도 당연히, 내 마음을 알고 생각을 존중하고 있으려니 믿고 있었던 어머니가 던진 질문. 새삼스런 그 물음이 얼마나 생소하게 느껴졌던지. 그리고 그 순간 어머니께 느꼈던 거리감은 얼마나 낯설고 기막힌 것이었던가.

  이해를 하자면 못하겠는가. 자식을 가진 부모의 일반적인 마음만 헤아려도 이해는 할 수 있다. 남들과 같이, 남들 하는 대로 살았으면 하는 마음.

  하지만, 모든 자식은 그들의 부모에겐 특별한 존재이듯 나에게도 어머닌 특별한 존재였다. 그래서 세상과 다른 잣대로 과분한 사랑을 내려도 당연했고 나도 세상과 다른 잣대로 어머닐 대하며 마음껏 편함을 누렸다. 오직 어머니와 나 사이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맹목적 믿음.

  그랬으니, 어머니의 정색한 질문에, 얼음을 삼킨 것처럼 서늘해지는 가슴을 어쩔 수는 없었다.

 

  어머닌 내 결심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친지들이, 동네 사람들이 결혼 문제로 많은 말들을 해도, 나한테 그 말을 전하지 않았다. 당신 선에서 듣고 잘랐다. 쉽지 않은 결단이라고 생각은 했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어머니는 백 명의 군사 부럽지 않은 든든한 한 사람의 아군이었다. 분명히 그 때까진 그랬다.

 

  <엄마까지 그래? 그러니까 내가 진작 독립 한다 그랬잖아요. 괜히 엉뚱한 소리나 듣게 하고. 본래 자식은 그렇게 오래 끼고 사는 거 아니래. 그리고 제발 내 걱정 좀 하지 마. 엄마가 멀쩡한 사람 바보 만든다는 거 알아요? 자주 오면 되잖아.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는데. .>

  결국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된 나.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어머니께 그런 말까지 하면서 나오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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