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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ㅣ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평점 :
이사카 고타로는 왜 살인 청부업자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을까.
그 전에 발표한 <마리아비틀>의 주인공도 살인 청부업자다. 그 외 다른 작품에도 이런 인물은 자주 등장하는 걸로 알고 있다. 어떤 이유가 있을까. ‘인간’의 내면에 대한, 특히 도덕심과 정의가 항상 밑바닥에 깔려있는 이야기를 하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을 인간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항상 하게 만든다. 그런 작가가 주인공으로 삼은 사람이, 가장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킬러라면, 분명 아주 확실하고도 중대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낸 이유는 이렇다.
살인 청부업자의 살인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다. 살해 의도를 가진 누군가를 대신하는 일이다. 진짜 살인자는 자객 뒤에 숨어있다. 단지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자객은 누군가를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는 자다. 물론 자객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그것이 먹고 살기 위해 선택한 일이라면. 자객이 살인을 취미로 여긴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살인 청부업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자객이 된 이유를 생각해본다.
달리 돈을 버는 수단이 있었다면, 아니 더 나은 방법이 있었다면, 이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의 처지는 어떠했을까. 살인에 대한 유혹을 받을 만한 처지에 있었지 않았을까. 이미 어둠의 세계에 던져진 처지. 부모의 보호와 사랑의 울타리 밖에 있었던 처지. 그래서 교육의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한 처지. 그래서 사랑의 감정을 느껴볼 수 없었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긴 힘들 것이고, 결국 제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밖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일 중 가장 험하지만 가장 돈을 많이 주는 일이 자객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자객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 힘겨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일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되진 않겠지만 처지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이용하는 어두운 손에 대해서도. 어차피 돈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돈을 주고 의뢰하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 분명 법 밖의 일인 줄 알면서도 하게 만드는.
살해에 대한 수요가 있는 이상 공급자는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자객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리고 결국 이것은 돈의 문제로 귀결된다. 수요자는 돈으로 목숨을 빼앗고 자신의 죄도 지울 수 있는 사람이다. 돈이라면, 부자가 천국으로 가는 면죄부를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급자는 돈 때문에 대신 죄를 짓는다.
작가는,
비록 세상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자객일지라도, 마음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대변해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결과만 보지 말고 원인을 봐달라고 항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말 나쁜 사람은, 남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사주하는 의뢰인이라는 걸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는, 내 집 앞에만 쓰레기가 없으면 된다는, 나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세상을 가장 어지럽게 한다고, 그런 사고가 결국 살인 청부업자를 낳았다고, 자객도 결국 피해자라는 것을 고발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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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청부업자, 킬러명은 ‘풍뎅이’
풍뎅이는 부모한테 거친 대접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따뜻함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거칠게 자라 결국 거친 세계로 들어가 거친 일을 하고 살아간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일(살인)을 마치고 왼팔에 상처를 입은 채 길을 걷다 전단지를 돌리던 한 여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 여자의 관심어린 말 한 마디. 그는 그녀의 말에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는 아내가 되고 아들 가쓰미도 얻는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일을 그만두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세계는 결국 오직 돈이 만든 세계. 중개업자에게 엄청난 돈이 들어오는 조직이라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져나가기 힘들다. 앉아서 돈을 버는 중개업자도 앉아서 살인을 의뢰하는 의뢰인과 마찬가지로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눈에 킬러는 오직 돈벌이의 수단. 알고 보면 킬러들에 의해 유지되는 조직이기도 하니까. 더구나 솜씨 좋은 킬러라면 가치가 크다.
풍뎅이는 결국 조직을 벗어나지 못했고, ‘자살’이라는 너울을 쓰고 죽는다.
그 죽음은 아내와 아들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을 했지만, 아내에겐 공처가였고 아들에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들이 본 아버지는 언제나 엄마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는 사람. 그것이 아버지에겐 얼마나 따뜻한 행복인지 아들이 알 리가 없었다.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한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는 그 사랑을 잃을까 늘 불안했던 것이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지키고 싶은 가정이 생긴 것이다. 꿈꾸어보지 못한 생활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늘 행운이라 생각했다. 킬러인 자신이 결코 누려서는 안 되는.
조직을 벗어나려는 풍뎅이에게 결국 조직은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목을 조여 온다. 가족에 대한 위협. 가족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은 결국 자신의 죽음 밖에 없다. 죽으면서도 풍뎅이의 머리속을 채운 건,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죽으면 아내가 화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기억은 죽음도 빼앗아가지 못한다.
허공으로 몸을 날려 급강하는 동안에도 가족과의 추억으로 가슴이 따뜻했으니까.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쓰면 살인 청부업자를 이렇게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을까.
그저 감탄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