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이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마음이 복잡하다는 증거다. 걱정이 있거나 불안할 때 노래를 부르는 건 소형의 습관이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도 노랠 부르긴 하지만 느낌이 분명 다르다. 조금만 신경 쓰면 그건 금방 알 수 있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친구라 할 수 없다. 알고 싶지 않은 경우가 아니라면. 그런데 수자는 오늘 그걸 알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을 보고 앉아있는데 가라앉으려던 화가 다시 끓어오른다.

  나쁜 버릇이란 걸 안다.

  무슨 좋은 일이라고 되새김질을 할까.

  끓어오르는 화를 단박에 식힐 재주를 아직 익히진 못했다.

  내가 그렇지.

  똥을 밟았으니 똥 밟은 신을 신고 또 한참을 걸어가겠지. 역한 냄새에 기분 나빠 하면서. 왜 툭툭 털어 내질 못하는 걸까. 이성으로 아무리 타일러도 감정은 제멋대로 갈 길을 간다. 언제 끓고 있는 화가 가라앉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되는 대로 두고 볼 순 없었다. 그건 친구로서 책임 회피이기도 하다. 예측이 되는 데도 그대로 두는 건 고의보다 나을 것도 없다. 침묵이 대단한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누군가 위험하면 소리라도 질러 주어야 되는 것 아닌가.

  나의 침묵의 결과는 너무도 분명하다. 소형의 제안은 분명히 제안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겪어온 일이다. 수자의 대응방식은 불을 보듯 훤히 그려진다.

집 도착이 코앞에 이르면 그때야 정말 갈래?’ 할 테고, ‘왜 새삼스럽게 다시 묻냐고 하면 확실하게 물어보려고 그랬지할테고, 수자의 마음을 꿰뚫은 우리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집에 가까워지고, 노래방 못 가 환장한 사람 없으니까 어정어정 각자의 집으로 가게 된다.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러면 노래방 건은 자기가 거절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의견이 되는 것이다. 수자는 의향이 분명할 땐 절대 두 번 묻지 않는다. 아까 칼국수집 갈 때처럼.

  수자의 오늘 대답은 흔쾌하지 않았다.

  집에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이유를 대고 산뜻하게 거절하면 어디가 덧나나?’

  수자가 늦으면 수자 어머니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신다. 물론 마흔이 다 된 나이에 통금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어머니는 어머니 마음으로 딸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고, 수자는 그게 불편한 것이다. 전화를 하면 물론 오케이다. 걱정하지 않고 볼일을 보거나 주무실 것이다. 근데 이상하게 수자는 병적으로 그런 전화 하는 걸 꺼린다. 늦는 날은 그것 때문에 불안해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정말 전화하기 싫어하는 티가 역력한 날은 수자의 입장에 맞춰주었다. 이유를 말하지 않을 땐,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우린 알아서 계획을 취소한다. 그냥 눈치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수자는 아마도 그걸 의견 수렴이라 생각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오늘은 수자의 마음을 알아서 헤아려 줌으로써 이 판을 깨고 싶지는 않다. 벌써 보름이나 학교와 병원만 오갔을 소형의 제안이 더 긴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번번이 그랬다. 불분명한 반응만 보고도 소형이든 누구든 선수 치듯 이유를 대서 수자 너 때문에라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아무도 탓하지 않을 책임을, 수자는 큰 명예나 지키듯 지키려고 혼자 꿍꿍 애를 썼다.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냉기를 느끼는지 수자가 헛기침을 했다. 생각을 바꿔먹었다는 증거다. 상황 판단이 이제 되었나 보았다. 운전을 하면서 자꾸만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려 내 안색을 살폈다. 난 아직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수자의 눈길을 피해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려버렸다.

마음이 정해진 수자의 운전은 부드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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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어두워졌다.

  바람이 제법 일었다. 사방은 깜깜하고, 아기 숨결같이 여리고 은은한 연등 불빛만이 절 마당에 가득 흔들렸다. 간간이 들리는 학승들의 조용한 말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자꾸만 짙어 가는 어둠에 빨려 들어갈 듯 흔들리는 아득한 불빛이 시선을 한없이 끌어들였다.

  우리는 대웅전 앞 계단에 엉덩이가 시려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갈 때가 되었다.

  나는 절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우리만 나가면 절에는 주인들과 연등만 남을 것이다. 내가 이 고적하고 아름다운 곳의 주인이 아니고 떠나야 할 손님이라는 게 섭섭했다. 섭섭함을 떨쳐내 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발딱 일어났다. 나는 우리 팀의 결정맨이다. 뭐든 결정하는 덴 선수다. 밥을 먹을 시간이든, 헤어질 시간이든. 아무튼 사소한 것까지도 이상하게 내가 결정을 하게 된다. 나는 결정맨답게 솔선수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만 가볼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더니, 아무리 연등불빛이 예뻐도 몸은 춥네. 안 그래도 으슬으슬해서 일어나고 싶은 참이었다.>

  수자가 일어나며 털 고르는 개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고, 미경은 아함, 기지개를 켰다.

  <뭐 먹고 갈래? 저녁을 먹긴 먹어야 되겠지?>

  소형은 덩치에 어울리는 큰 가방을 어깨에 메며 물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나는 칼국수 꼭 먹고 가야 된다.>

  수자가 벌써 상상 속에서 칼국수 한 뭉텅이를 후루룩 끌어넣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눈빛이 그렇다. 빛나고 있다.

 

  운문사엘 오면 꼭 들르는 음식점이 있다. 그 집을 드나든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소형이 커피 자판기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듯이 수자가 점 찍어놓은 음식점을 그냥 지나치는 법도 없다. 소형이 그걸 알고 수자를 염두에 두고 한 소리였다.

  우린 한 사람이라도 원하면 원하는 쪽의 기호에 맞춰준다. 여러 명이 다니면서 의견의 통일을 봐서 행동을 한다는 게 무척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건 오래 사귀다 터득한 매우 중요한 결론이다. 누군가 강력히 원하는 게 있을 땐 그의 소원에 따른다. 특별히 싫은 사람이 없을 땐 이 방법이 매우 적절하다. 어떤 일에 매우 즐거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보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통일을 본다는 건 어쩌면 누구도 즐겁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 우린 과감히 한 사람을 밀어주고 나머지 각자의 작은 소원들을 웃으면서 포기한다. 양보할 줄 모르는 권리 주장은 탄력을 잃은 고무줄과 같다. 쓰임새도 없고 모양새도 좋지 않다. 우리들의 야단스럽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결속력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칼국수에 부추전까지 먹은 수자의 운전은 느긋했다.

  배가 비면 모든 일에 짜증이 나는 수자. 아무리 고고한 진리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진리 때문에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 일은 없단다. 위장이 있고 입이 있는 한, 자기의 선택은 망설일 것도 없이 배부른 돼지라고, 나는 먹기 위해 태어났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쏘는 불빛 속에 들어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깜깜이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나간 느낌이 이럴까. 자동차가 내는 소리조차 어둠 속에 까맣게 사라져가는 것 같다. 보이는 게 없을 땐 귀가 예민해진다.

  음악이나 들을까.

  조수석 앞의 서랍을 열었다. 어두워서 서랍에 얼굴을 들이대는 데 수자가 실내등을 켰다. 둔한 것 같다가도 이럴 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씨름 선수에서 갑자기 연예계로 진출한 강호동이 생각난다. 강호동을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했다간 큰 코 다친다. 얼마나 순발력이 있고 빠른지 모른다. 머리 회전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한 눈에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속에서 C.D첩을 꺼냈다. 조용필의 골든 디스크를 골랐다. 수자 차에 있는 조용필 음반은 물론 모두 소형이 하사한 것이다. 하나씩 늘어난 조용필 음반이 이제 대부분의 음반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젠 다른 걸 즐기고 싶어도 선택의 폭이 너무 빈약해졌다. 이러니 우리도 편식을 하게 되고 점점 마니아 아닌 마니아가 될 수밖에.

  달리는 차안이라든가 소음이 있는 곳에선 고전 음악은 어울리지 않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보다 작은 소리에서 천둥 치는 소리까지 섞여있는 고전은 아주 조용한 장소에서 듣지 않으면 제 맛을 즐길 수 없다. 소음 속에서 피아니시모로 연주되는 소리는 또 다른 소음일 뿐이다.

  경험상, 달리는 차 안에선 카랑한 목소리가 악기 소리까지 제압하는 조용필 노래가 으뜸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시험해볼 일이다. 번지 점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소형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에는 중얼거리듯이 부르다 차츰 신이 나는지 노래자랑 대회라도 나온 듯 도로지도를 말아 입에 대고 큰 소리로 감정을 잡는다. 물론 감정에 몰입해 박자를 놓치기도 하면서. 옆에 앉은 미경이가 소형을 보고 자꾸 웃었다. 자주 보는 모습인데도 볼 때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미경은 노래방에 가서도 노래를 잘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너 곡씩 부르면 양념 삼아 부추김에 못 이겨 겨우 한 곡을 부르곤 했다. 그조차도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도 않는다. 옆에서 생으로 부르는 수자 목소리가 더 크다. 수자 별명이 마이크가 된 건 미경의 탓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소리로 겨우 한 곡을 때우곤 또 한없이 앉아서 듣고만 있다. 소형의 과장된 열창과 수자의 어설픈 춤 솜씨에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언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니, 난 듣는 게 더 좋아. 노래하는 거 보는 것도 재밌고.’

  순전히 인사치레의 대답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느낌도 느낌이지만 대답이 바로 나왔고 강력하게 부정의 몸짓을 보였다. 준비된 거짓말이 아니라면 거짓말은 머뭇거림이 있다. 아무리 짧은 머뭇거림이라도 느낌이 전달되는 덴 충분한 시간이다. 적어도 우리가 미안해 할까봐 그렇게 대답해 준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때론 지루할 때도 있을 거라는 것도 배제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장피를 먹다보면 겨자 덩어리가 더러 코를 찌르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라고 모든 게 기꺼워서 하는 건 아니니까. 수자도 소형도 조금씩 불편함을 안고 나름대로 소화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렇지 않겠는가. 인간사에 완전이란 없는 거니까. 완전한 행복이니 완전한 기쁨이니 하는 건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아님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거나.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소형이 갑자기 노래를 멈추더니

  <우리 노래방 안 갈래?>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제안을 했다. 수자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

  <그러지 뭐.>

  그러나 짧은 대답만으론 정말 그러자는 것인지 단순히 기분을 맞춰주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호쾌한 대답을 멋으로 아는 수자의 대답을 그대로 믿었다가 어색해진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수자의 호쾌한 듯한 어투 속에 그런 찜찜함이 들어있었다. 대답이 지나치게 빨리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빨리 판단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다. 빠른 대답 중 어떤 건 생각 없이 나온 것이고 어떤 건 생각과 동시에 나온 것이다. 뒤에 설명이 따르지 않는 대답은 생각 없이 나온 거라고 보면 거의 맞다.

  오늘 같은 날은 욕을 좀 먹더라도 나서서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영화가 재미있게 완성되려면 악역도 필요한 법이니까.

  <도착하면 열 시쯤 될 텐데, 너 그렇게 늦어도 괜찮아? 노래방을 가게 되면 열 두 시는 돼야 집에 들어갈 걸? 집에 전화해야 되잖아. 전화하는 거 싫어하면서.>

  어투가 딱딱했는지 미경이가 왜 그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수자도 기분이 상했다.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전화 하면 되지. 그게 뭐 어렵다고.>

  돌아오는 대답이 부드럽지 않았다.

  ‘네가 평소에 분명했어봐. 내가 이런 말을 하나. 되는대로 내버려둘 걸 그랬나?’

  속으로 욕을 했다. 그 말을 내뱉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기분 나빠질 각오도 돼 있었다. 악역을 자처했으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욕먹고 기분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기로 했으니 참을 뿐이다. 참자. 애써 감정을 누르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알았어. 혹시 싶어서. 미경이는 괜찮니?>

  미경이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는 걸로 하자.>

  나는 정면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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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형은 절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담장 곁에 있는 커피 자판기로 갔다.

  그녀는 차가 멈추어 서는 곳마다 자판기부터 찾는다.

  소형이 때문에,

  누가 뭘 먹을 때 빠지는 법이 없는 수자는 나날이 커피 실력이 늘고 미경도 제법 마시는 것 같았다.

  커피에 관심이 없는 나는 연등이 죽 늘어선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예불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양 쪽엔 연등 불사를 받는 스님과 청년 신도들이 탁자 뒤에서 열심히 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접수가 다 된 신도들에게 연등과 함께 비닐봉지에 든 떡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주말이나 일요일보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잠시 후 예불이 끝나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거의 돌아갈 것이다.

  나는 복잡한 길을 지나 범종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종은 절 출입구 문 위에 있었다. 범종과 법고와 목어 위 기와지붕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담담히 앉아있다.

  사람들을 뚫고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씩 내 쪽으로 오고 있다.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그녀들의 얼굴만 유달리 또렷하다. 사진 찍을 때, 찍고 싶은 대상만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은 흐리게 놔두는, 그들이 그런 사진 속의 초점 대상처럼 느껴졌다. 모습은 눈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망막 속에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을 위치에 있어도 가까운 사람은 온 몸으로 느껴지는 뭔가 있다.

  여태 차를 같이 타고 왔으면서도 얼굴들을 보는 순간 무척 반가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았다. 맨 먼저 다가온 미경이 뭘 보고 웃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옆에 있는 큰 돌을 가리켰다. 미경이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커피 든 손을 조심하며 넓적한 돌에 앉았다.

  설명을 하기가 왠지 간지러웠다. 생각으로 있을 땐 그렇지 않은 내용도 말로 하면 유치해지거나 쑥스러워 지는 경우가 있다. 수자와 소형이 다가올 때까지 몇 번이나 설명을 하려 하다가 결국 그만둬 버리는 쪽을 택했다. 말로 해버리면 간지러울 게 분명했다.

  수자가 커피를 들고 부들부들 떨며 미경이 옆에 앉고 소형이 내 옆에 앉았다. 수자는 절대로 차를 나르거나 하는 일은 못할 것이다. 손이 문제인지 걸음걸이가 문제인지 액체가 든 그릇을 옮길 땐 웃겨서 볼 수가 없다. 고양이 걸음을 하는데도 왜 그렇게 출렁거리는지. 오늘도 커피 한 잔에 어쭙잖은 색시가 되어 나를 웃긴다.

  커피 향이 좋았다. 물론 향기만.

  소형이 양 손에 든 컵 중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마실래?>

  <아니.>

  소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내밀었던 컵의 커피를 자기가 마시던 컵에 부었다. 다시 가득 채워진 커피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이 된 소형을 본 미경이가 웃는다.

  나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지만 묻지도 않고 커피는 항상 넉 잔이다. ‘너 안 마시면 소형이가 마신다하는 게 우리들 사이의 말없는 약속이다. 아니 습관이다. 나는 마신다 하더라도 한 모금이면 충분하고 소형이 커피를 마다하는 법은 없으니까.

 

  언젠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를 거절했다가 소형에게 타박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주문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에게 저는 됐어요.’했고, 아주머니가 그럼 세 잔만하고 돌아섰다. 순간 소형이 무서운 얼굴로 목소리는 낮췄지만 악마 같은 속삭임으로 외쳤다.

  ‘받아서 나 주면 되잖아, 이 바보야.’

  그 때 그 일이 두고두고 왜 그렇게 미안했던지.

  세심하지 못 했다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자책감에 얼굴이 화끈 달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늘 밖에서 사 먹는 커피는 양에 안 찬다고 노래를 불렀고, 다 식어버린, 내가 남긴 커피도 마다 않고 달게 마셨던 게 어디 한 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잊을 걸 잊어야지 그걸 잊었으니, 소형의 핀잔에 죄책감이 드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소형은 그런 무심한 일을 절대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날도 소형이 표현을 했기 때문에 나의 무신경을 알아챘던 것이고, 그것 말고도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가 많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무신경해서 미안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많다기보다 도저히 소형의 배려심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같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펴 그 원하는 걸 미리 해주고 있다는 뜻도 될 테니까. 그런 사람이 그리 흔할 리도 없고 난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짙어 가는 산에 둘러싸인 운문사.

  스님 한 분이 북을 마주 하고 섰다.

  키보다 큰 법고를 마주하고 선 스님과 그 위를 덮은 날아갈 듯한 기와. 햇살이 스러져간 차분한 하늘이 스님과 법고와 날아갈 듯한 기와를 그림 같은 정적으로 감쌌다. 웅성이던 사람들의 소리도 끊기고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두둥.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에 다시 세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영혼을 깨우고,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북을 두드리는 스님의 넓은 소맷자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엔 그 장엄한 소리도 담겨 있을까. 소맷자락을 벗어난 북소리는 둘러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멀리 사라져갔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깨어나게도 했던,

  고요하고도 설레던 시간.

  이 세상 시간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범종 치는 소리와 함께 대웅전에선 예불이 시작되었다.

  독경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대웅전으로 바삐 향하는 행렬과 절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행렬로. 신도와 구경꾼은 그렇게 분명히 가는 길을 달리 했다.

  우린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냥 머물렀다.

  그 자리에서, 절을 빠져나가고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길 기다렸다. 흩어지는 발길에 흙먼지가 조금 일었다. 햇빛은 힘을 잃었고 그 빛은 이제 땅에서 이는 먼지까지 보여주진 못했다. 코가 재채기를 하면서 먼지의 존재를 알렸다. 소형이 불평을 하면서 코를 풀었다. 마당 있는 전원주택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하면서.

  흙먼지가 가라앉을 즈음 절은 다시 정적에 싸였다.

  해가 완전히 졌다

  절 마당을 가득 채운 연등 사이를 돌며 스님들이 점등을 하기 시작했다. 북적이던 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젊은 학승들이 연등 사이를 가만가만 돌며 계속 불을 붙였다. 속가에 속해있는 사람이나 승가에 속해있는 사람이나 마음은 같은지, 학승들은 몰려다니면서 불을 붙인다고 노스님께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그렇게 몰려다니면서 언제 그 많은 불을 다 밝히겠냐고. 흩어져서 빨리빨리 점등을 하라고 재촉하셨다. 아무리 절제와 침묵의 단련을 받는 스님들이지만 젊음이 갖는 밝음과 들뜸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지, 꾸중을 듣고도 웃으며 몰래몰래 모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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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4시가 다 되어 운문사로 향했다.

  오늘은 석가 탄신일, 그리고 휴일이다.

  불명도 없는 엉터리 신도인 우리는 오늘 같이 절이 붐비는 날은 조용한 저녁 때 절에 간다. 작년에도 그랬다. 남들이 돌아오는 저녁 무렵에 절에 가는 정말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저녁 예불 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다. 설마 엉터리 신도인 우리가 예불에 참석하기 위해서? 물론 그것도 아니다. 법고 치는 의식이 우릴 이끄는 진짜 이유다.

  그 시간에 가야만 짙어 가는 산그늘을 배경으로 범종을 울리고 법고를 치는 스님들의, 그야말로 정중동의 장엄함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거름에 고요한 숲으로, 하늘로, 두둥두둥 퍼지는 법고 소리는 가슴을 울리고 영혼을 흔드는 마력이 있다.

  그리고 초파일에 꼭 절에 가야하는 또 다른 이유.

  바로 연등 점등식.

  어두워지는 절 마당에 아른아른 새벽꽃처럼 피어나는 연등.

  그 불빛엔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조용하지만 찬란한 슬픔과 기쁨이 있다.

  병원 앞에서 소형을 마지막 손님으로 싣고 수자는 본격적으로 속력을 낸다. 경산쯤만 가도 공기가 다르고 운문댐 건설로 산중턱으로 난 도로를 달릴 땐 열린 창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산골의 물처럼 달콤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소형이 코가 시원해졌다고 소리쳤다. 늙으면 전원주택에서 살아야한다고, 늘 하던 소리도 잊지 않고 덧붙인다.

  운문댐 물은 엄청나게 줄어 있었다.

  물이 찰랑이던 산기슭이, 낮아진 수위로 바리캉으로 밀어버린 머리처럼 허연 흙을 띠처럼 드러내고 있었다. 비가 너무 오래 동안 오지 않았다. 지난겨울에도 눈다운 눈을 구경하지 못했다. 비가 적은 지역에는 눈도 적은지, 눈이 풍성하게 내리는 곳은 아니지만 지난겨울처럼 그렇게 눈이 오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물이 말라버린 댐 바닥에 아직도 경계가 선명한 논밭과 집터, 그리고 차가 달리던 도로가 드러나 보이는 곳도 있었다. 그 도로는 전에 우리가 운문사를 갈 때 달리던 도로의 한 부분일 것이다.

 

  운문댐이 만들어지기 전,

  지금은 수몰된 그 마을은 참 아름다웠다.

  산굽이를 돌고 돌아 닦여진 도로를 따라 달리면, 감나무에 둘러싸인 마을들이 그림처럼 다가왔다 사라졌고, 구획정리가 안 된 구불구불한 흙두덩이로 경계를 둔 논과 밭에는 정성과 땀으로 가꿔진 채소와 곡물이 철따라 다른 색으로 곱게 자랐다. 조용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 마을의 처마와 감나무 가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스쳤다. 댐이 없었을 땐, 운문사보다 운문사로 가던 그 길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산이 깎이고 어느 날 마을로 연결되던 길이 끊겼을 때의 그 당혹감.

  늘 말끔하던 까만 콜타르 도로는 흙과 먼지로 더럽혀진 채 잘려 있었다. 길 저쪽으로 보이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는 그 마을을 멀리서 보기만 하고 차를 돌려야했다. 산 중턱까지 높아진 도로를 따라 달리며 마을을 내려다보던 난, 친구들 몰래 눈물을 좀 흘렸었다.

 

  그 마을이 완전히 물에 잠기기 전까지,

  차츰 폐허로 변해가는 과정을 난 보았다.

  빈집이 생기고,

  더 이상 차가 달리지 않는 도로엔,

  도로를 가로지른 진흙 묻은 경운기 바퀴 자국과 발자국이 덮여갔고,

  채소와 곡물이 자라지 않는 논밭이 늘었고,

  마을을 덮었던 초록이 줄었다.

  벼 수확기 때쯤 되어서 그 해 마지막으로 운문사엘 갔을 때였다.

  덩그렇게 올라앉은 도로를 달리며 처참하게 무너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은 폭격을 맞은 것 같았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저렇게 폐허가 될 수 있구나.

  마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내려앉은 지붕이며 얽혀있는 기둥들.

  잡초로 뒤덮인 경계가 모호한 논밭과 마당.

  마을은 죽어 있었다.

  그런데,

  텅 빈 줄 알았던 그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순간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보았다. 분명 사람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어지러운 주변과 너무나 다른, 사람의 손길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웅변하는 듯한, 잘 자란 누런 벼 속에서 낫질을 하고 있었다. 폐허 속의 낫질, 가슴이 콱 막혔다. 쓰레기 더미 속에 핀 장미를 보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할아버지가 거두어들이는 저 곳에서의 마지막 양식. 늘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상이 지겹다 하지만, 일상의 단절이 던져줄 공포감과 허무함에 비하면 지겨움은 가벼운 감정일 것 같았다. 저 할아버지는 추수가 끝나면 그 곳을 떠날 것이다. 할아버지의 심정이 어떨까. 나는 창문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멀어지는 논을 돌아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망망대해 속의 한 점 섬 같은 논을.

 운문댐을 지날 때마다 그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드러난 댐 바닥엔 할아버지도 없고, 잡초도 없고, 집의 형태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호미로 파고 쟁기질을 하던 논밭과, 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오갔을 길의 흔적은, 곧바로 마을 사람들을 되살리고 감나무들을 자라게 하고 밭에는 푸릇푸릇 채소를 가꿔냈다. 나는 그 땅이, 공기가, 마을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오랫동안 생명이 머무르던 자리가 갑자기 로 돌아가는 덴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병으로 오래 자리 보존했던 아버지가 누워있던 자리를, 항상 아버지가 누워있다는 착각에 그 곳을 선뜻 밟고 다니게 되지 않았었다. 키우던 개가 어느 날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누가 봐도 죽었음이 분명할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도, 드나들 땐 개 집 쪽을 돌아보게 되고 개가 잘 앉아 있던 자리를 피해 디디고 다녔다. 처마를 덮던 나뭇가지가 베어지고 난 뒤에도 상상 속에 그 가지를 달아주고, 감나무에서 감을 다 따고 난 뒤에도 자꾸 가지 끝에서 감을 찾게 된다.

  저수지의 드러난 바닥과 도로의 높이가 비슷해지면서 마을의 흔적은 끝났다. 내 상상도 끝을 맺는다. 나는 옆 창에서 눈을 떼고 앞을 바라보았다. 길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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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은 가을단풍을 알 수 없는가

 

 

   

 

  상처 난 나알개를 접어야하는, 외로운 사아람아.

  당신은 내 사랑, 영원한 내 사람, 외에로워 마아세요.

  이제는 내 품에서 다시 태어날, 바람 같은 여어어어자.

 

  마이크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소형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휘었다.

 

  우린 소형을 김운도라 부른다.

  눈을 감고 마이크를 삼킬 듯이 입술에 갖다댄 채 부르는 소형의 노래는 구성지다. 지나치게 감정에 젖어 있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지만 듣고 있으면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트로트를 잘 부른다고 성만 바꿔 김운도라 별명을 붙였지만 소형은 그 별칭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트로트를 제일 맛있게 부르는 가수는 조용필이라고, 자기는 조용필 창법을 추구하므로 차라리 조용팔이라 불러 달라 한다. 물론 조용필이 트로트만 잘 부르는 게 아니라 트로트까지 잘 부르는 가수라고.

  조용필 이야기만 나오면 소형이 할 말이 많아진다.

  조용필 외에 어느 가수의 음반도 그 한 장을 다 듣는 건 몹시 지루한 일이라고, 노래가 괜찮아서 사보면 한두 개 외엔 들을 게 없다고 했다. 예찬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다른 가수가 불렀다면 차마 끝까지 들어주기도 힘들었을 노래를 그나마 그가 부르면 들어줄만한 노래로 변한다고도 했다. 참 한심하다 싶은 곡도 들어줄만한 노래로 부를 수 있어야 진짜 가수라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진짜 가수는 조용필 뿐이란다.

  잊어버리지도 않고 했던 말을 한다. 오죽하면 우리가 레퍼토리를 다 욀 정도다. 소형이 얘기를 시작하면 수자는 오냐 네 팔뚝 굵다는 표정이고 미경은 웃기만 한다. 어쨌든 노래 고문을 당하고 핀잔주고 비웃고 하는 동안 우리도 준 마니아 정도는 되어버렸다.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그 많은 노래를 다 알고 있으니.

  자식에게 눈멀지 않은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팬이 스타에게 빠져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 그래, 네 사랑 네가 지켜라. 소형이 열을 뿜을 때마다 그렇게 웃고 만다.

 

  소형의 노래가 끝났다.

  그녀는 자기 노래에 자기가 취해 흐뭇한 웃음을 흘리며 마이크를 탁자 위에 놓았다. 팡파르를 울리며 화면에 점수가 나왔다. 요란한 팡파르 소리가 아깝게 점수는 76. 소형은 실망한 표정으로 의자에 털썩 앉는다.

  <하여튼 기계하고는 상대 못 하겠어. 왜 감정 점수는 안 주느냐 말이야.>

역시 불만을 터뜨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노래는 어떤 감정으로 어떤 맛이 나게 부르느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소형의 노래는, 넘치는 감정 때문에 늘 박자가 늦거나 빠르다. 특히 트로트를 부를 땐 더욱 감각적이고 구성지게 불러 우릴 즐겁게 하지만 노래방 기계는 그걸 알아주지 못한다. 그래서 노래방 올 때마다 하는 불평을 오늘도 했다.

  기계는 인간의 불평 따위에 기죽지 않는다.

  화면엔 다음 예약 노래가 떠올랐다. ‘실연이라는 제목 밑에 작곡 김종서, 작사 김종서, 노래 김종서라는 글자가 나란히 적혀 나왔다. 참 재주도 많은 가수다. 저런 멋진 노래 작곡에, 직접 가사를 붙이고, 타고난 목소리까지 갖췄으니.

 

  김종서 공연에 간 적이 있다. 가사를 다 따라 부르던 팬들의 기억력과 열정 속에서 약간 주눅이 들었던 기억도 난다. 늘 목이 말썽인 내가 공연 끝까지 생생했던 그의 목소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선생을 하려면 목소리도 타고 나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음반과 다름없이 터져 나오던 아름다운 목소리와 섬세한 감정 표현. 직접 본 이후론 음반을 들을 때마다 공연이 떠올라 노래가 더 생생하다. 자꾸 그 날의 감동으로 노래를 듣게 된다.

  수자가 마이크를 들고 일어선다.

  유행하는 노래치고 수자가 집적이지 않은 노래는 없다. 인기 가요 순위에 올라 방송을 탄 노래는, 수자에게 한 번씩 유린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야 수자의 기차 화통 소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자가 즐겨 듣는 노래는 정해져 있다. 은은한 해바라기노래에서 시작하여 한창 활동하던 때의 정태춘 박은옥의 들꽃같은 고요한 노래들. 그 다음엔 왠지 중년의 사랑이 느껴지는 조성모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소형이 수자에게 붙여준 별명이 발라드의 여왕이다. 그리고 또 발라드를 부를 때 수자의 노래가 제일 들을만하기도 하다.

  그러나 노래방에서는 취미고 뭐고가 따로 없다. 장르 불문, 능력 불문하고 떴다 하는 노래는 다 섭렵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수자가 새로운 노래를 골라 그 노래를 망칠 때마다 우리는 그 노래를 수자의 금지곡 목록에 추가시킨다. 금지곡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수자의 노래 편력은 심해진다.

오늘 수자가 망칠 노래는 실연이다. 김종서의 매력적인 고음은 화통이 폭발하는 것 같은 째지는 소리로, 그 빠른 박자에 맞춰 불러내야 할 가사는 입술을 제대로 간추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튀어나와 죽 끓는 소리로 바뀌었다. 수자는 음이 높아질수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녀의 고음은 高音이 아니라 굉음이었다. 그 빠르게 계속되는 환상적인 고음 부분에서 우린 전부 귀를 막아야 했다. 신나는 건 수자 혼자였다.

  드디어 그 목청 좋은 수자의 목소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참고 있던 미경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차마 못 웃고 있던 소형이가 미경의 웃음에 용기를 얻어 손뼉까지 치면서 큰소리로 웃어댔다. 악을 쓰던 수자도 결국 웃고 만다. 웃느라 마이크에 콧김을 킁킁 불어넣어 가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끝까지 불렀다. 김종서의 멋진 노래 실연은 수자에 의해 완벽하게 유린당한 채 우리들의 야유를 받으며 금지곡 명단에 첨가되었다.

  그러나 가해자인 수자는, 정작 우리들의 비난에는 끄떡도 않은 채 기계의 심판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로 화면만 바라보았다. 충실한 하인처럼 기계는 수자의 기대에 답을 보냈다. 팡파르가 울리며 떠오른 점수는 84, 가수의 소질이 있네요, 였다. 소형이 또 한 번 기계에 대고 야유를 퍼부었다.

  <엉터리다. 목소리만 크면 다냐?>

  수자도 지지 않았다.

  <다다. 억울하면 너도 크게 불러라.>

  두 사람이 떠드는 동안에도 기계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화면이 바뀌고 내 예약곡 제목이 떠올랐다.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 나는 마이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목을 본 미경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또 팝송을이란 웃음일 수도 있고, ‘야유를 각오하라는 웃음일 수도 있다.

 

  발음도 좋지 않고 노래도 잘 못하면서 종종 팝송을 부르는 내게 수자와 소형이 비난의 탄성을 지르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귀에 익은 전주가 흘러나오자, 둘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하는 얼굴로 나를 본다.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못 본 체한다. 이젠 비난도 놀이의 일부가 된 마당이다. 그게 없으면 싱겁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나는 야유를 환성으로 즐기며 도도한 웃음을 입가에 띠고 열대의 숲에 부는 바람 같은 기타 소리에 내 청각을 몽땅 바치고 있었다. 그들의 애정 어린 야유는 이젠 칭찬보다 정겹고 즐거운 것일 뿐, 아무런 그늘을 지우지 못한다. 세월과 신뢰가 우리 사이를 그렇게 아름답게 만들었다.

  Let me take you far away

   You'd like a holiday

  ……

  노래가 시작되자 그들은 묵연히 음악을 들었다. 내 노래를 듣고 있는 게 아니라 순전히 멜로디를 즐긴다는 걸 안다. 아름다운 멜로디다. 가사 없이도 진한 감동을 준다. 내 매끄럽지 못한 발음과 불안한 음정에 상관없이 노래는 흘러간다.

  그들은 지금 스콜피언스의 청아한, 하늘로 쏘아진 불꽃같은 목소리를 상상으로 듣고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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