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은 절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담장 곁에 있는 커피 자판기로 갔다.
그녀는 차가 멈추어 서는 곳마다 자판기부터 찾는다.
소형이 때문에,
누가 뭘 먹을 때 빠지는 법이 없는 수자는 나날이 커피 실력이 늘고 미경도 제법 마시는 것 같았다.
커피에 관심이 없는 나는 연등이 죽 늘어선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예불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길 양 쪽엔 연등 불사를 받는 스님과 청년 신도들이 탁자 뒤에서 열심히 접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접수가 다 된 신도들에게 연등과 함께 비닐봉지에 든 떡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주말이나 일요일보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잠시 후 예불이 끝나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거의 돌아갈 것이다.
나는 복잡한 길을 지나 범종이 잘 보이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범종은 절 출입구 문 위에 있었다. 범종과 법고와 목어 위 기와지붕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담담히 앉아있다.
사람들을 뚫고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씩 내 쪽으로 오고 있다.
수많은 얼굴들 속에서 그녀들의 얼굴만 유달리 또렷하다. 사진 찍을 때, 찍고 싶은 대상만 선명하게 초점을 맞추고 배경은 흐리게 놔두는, 그들이 그런 사진 속의 초점 대상처럼 느껴졌다. 모습은 눈으로만 기억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망막 속에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을 위치에 있어도 가까운 사람은 온 몸으로 느껴지는 뭔가 있다.
여태 차를 같이 타고 왔으면서도 얼굴들을 보는 순간 무척 반가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보았다. 맨 먼저 다가온 미경이 뭘 보고 웃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옆에 있는 큰 돌을 가리켰다. 미경이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커피 든 손을 조심하며 넓적한 돌에 앉았다.
설명을 하기가 왠지 간지러웠다. 생각으로 있을 땐 그렇지 않은 내용도 말로 하면 유치해지거나 쑥스러워 지는 경우가 있다. 수자와 소형이 다가올 때까지 몇 번이나 설명을 하려 하다가 결국 그만둬 버리는 쪽을 택했다. 말로 해버리면 간지러울 게 분명했다.
수자가 커피를 들고 부들부들 떨며 미경이 옆에 앉고 소형이 내 옆에 앉았다. 수자는 절대로 차를 나르거나 하는 일은 못할 것이다. 손이 문제인지 걸음걸이가 문제인지 액체가 든 그릇을 옮길 땐 웃겨서 볼 수가 없다. 고양이 걸음을 하는데도 왜 그렇게 출렁거리는지. 오늘도 커피 한 잔에 어쭙잖은 색시가 되어 나를 웃긴다.
커피 향이 좋았다. 물론 향기만.
소형이 양 손에 든 컵 중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마실래?>
<아니.>
소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내밀었던 컵의 커피를 자기가 마시던 컵에 부었다. 다시 가득 채워진 커피를 내려다보며 흐뭇한 표정이 된 소형을 본 미경이가 웃는다.
나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걸 알고 있지만 묻지도 않고 커피는 항상 넉 잔이다. ‘너 안 마시면 소형이가 마신다’ 하는 게 우리들 사이의 말없는 약속이다. 아니 습관이다. 나는 마신다 하더라도 한 모금이면 충분하고 소형이 커피를 마다하는 법은 없으니까.
언젠가 식당에서 밥을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커피를 거절했다가 소형에게 타박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주문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에게 ‘저는 됐어요.’했고, 아주머니가 그럼 ‘세 잔만’하고 돌아섰다. 순간 소형이 무서운 얼굴로 목소리는 낮췄지만 악마 같은 속삭임으로 외쳤다.
‘받아서 나 주면 되잖아, 이 바보야.’
그 때 그 일이 두고두고 왜 그렇게 미안했던지.
세심하지 못 했다는, 배려가 부족했다는 자책감에 얼굴이 화끈 달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늘 밖에서 사 먹는 커피는 양에 안 찬다고 노래를 불렀고, 다 식어버린, 내가 남긴 커피도 마다 않고 달게 마셨던 게 어디 한 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잊을 걸 잊어야지 그걸 잊었으니, 소형의 핀잔에 죄책감이 드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소형은 그런 무심한 일을 절대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 날도 소형이 표현을 했기 때문에 나의 무신경을 알아챘던 것이고, 그것 말고도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죄가 많았을지 모른다.
그래도 변명을 좀 하자면, 내가 무신경해서 미안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많다기보다 도저히 소형의 배려심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같이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펴 그 원하는 걸 미리 해주고 있다는 뜻도 될 테니까. 그런 사람이 그리 흔할 리도 없고 난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짙어 가는 산에 둘러싸인 운문사.
스님 한 분이 북을 마주 하고 섰다.
키보다 큰 법고를 마주하고 선 스님과 그 위를 덮은 날아갈 듯한 기와. 햇살이 스러져간 차분한 하늘이 스님과 법고와 날아갈 듯한 기와를 그림 같은 정적으로 감쌌다. 웅성이던 사람들의 소리도 끊기고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순간.
두둥.
가슴을 울리는 북소리에 다시 세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영혼을 깨우고,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북을 두드리는 스님의 넓은 소맷자락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 속엔 그 장엄한 소리도 담겨 있을까. 소맷자락을 벗어난 북소리는 둘러선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 멀리 사라져갔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잠재우기도 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깨어나게도 했던,
고요하고도 설레던 시간.
이 세상 시간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범종 치는 소리와 함께 대웅전에선 예불이 시작되었다.
독경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두 패로 갈라졌다. 대웅전으로 바삐 향하는 행렬과 절을 천천히 빠져나가는 행렬로. 신도와 구경꾼은 그렇게 분명히 가는 길을 달리 했다.
우린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그냥 머물렀다.
그 자리에서, 절을 빠져나가고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길 기다렸다. 흩어지는 발길에 흙먼지가 조금 일었다. 햇빛은 힘을 잃었고 그 빛은 이제 땅에서 이는 먼지까지 보여주진 못했다. 코가 재채기를 하면서 먼지의 존재를 알렸다. 소형이 불평을 하면서 코를 풀었다. 마당 있는 전원주택을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하면서.
흙먼지가 가라앉을 즈음 절은 다시 정적에 싸였다.
해가 완전히 졌다
절 마당을 가득 채운 연등 사이를 돌며 스님들이 점등을 하기 시작했다. 북적이던 소리가 완전히 끊기고, 젊은 학승들이 연등 사이를 가만가만 돌며 계속 불을 붙였다. 속가에 속해있는 사람이나 승가에 속해있는 사람이나 마음은 같은지, 학승들은 몰려다니면서 불을 붙인다고 노스님께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 그렇게 몰려다니면서 언제 그 많은 불을 다 밝히겠냐고. 흩어져서 빨리빨리 점등을 하라고 재촉하셨다. 아무리 절제와 침묵의 단련을 받는 스님들이지만 젊음이 갖는 밝음과 들뜸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는지, 꾸중을 듣고도 웃으며 몰래몰래 모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