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어두워졌다.

  바람이 제법 일었다. 사방은 깜깜하고, 아기 숨결같이 여리고 은은한 연등 불빛만이 절 마당에 가득 흔들렸다. 간간이 들리는 학승들의 조용한 말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자꾸만 짙어 가는 어둠에 빨려 들어갈 듯 흔들리는 아득한 불빛이 시선을 한없이 끌어들였다.

  우리는 대웅전 앞 계단에 엉덩이가 시려올 때까지 앉아 있었다.

 

  갈 때가 되었다.

  나는 절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우리만 나가면 절에는 주인들과 연등만 남을 것이다. 내가 이 고적하고 아름다운 곳의 주인이 아니고 떠나야 할 손님이라는 게 섭섭했다. 섭섭함을 떨쳐내 버리기라도 하듯 나는 발딱 일어났다. 나는 우리 팀의 결정맨이다. 뭐든 결정하는 덴 선수다. 밥을 먹을 시간이든, 헤어질 시간이든. 아무튼 사소한 것까지도 이상하게 내가 결정을 하게 된다. 나는 결정맨답게 솔선수범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그만 가볼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라더니, 아무리 연등불빛이 예뻐도 몸은 춥네. 안 그래도 으슬으슬해서 일어나고 싶은 참이었다.>

  수자가 일어나며 털 고르는 개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고, 미경은 아함, 기지개를 켰다.

  <뭐 먹고 갈래? 저녁을 먹긴 먹어야 되겠지?>

  소형은 덩치에 어울리는 큰 가방을 어깨에 메며 물었다.

  <두 말 하면 잔소리지. 나는 칼국수 꼭 먹고 가야 된다.>

  수자가 벌써 상상 속에서 칼국수 한 뭉텅이를 후루룩 끌어넣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눈빛이 그렇다. 빛나고 있다.

 

  운문사엘 오면 꼭 들르는 음식점이 있다. 그 집을 드나든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간다. 소형이 커피 자판기 앞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듯이 수자가 점 찍어놓은 음식점을 그냥 지나치는 법도 없다. 소형이 그걸 알고 수자를 염두에 두고 한 소리였다.

  우린 한 사람이라도 원하면 원하는 쪽의 기호에 맞춰준다. 여러 명이 다니면서 의견의 통일을 봐서 행동을 한다는 게 무척 어렵다는 걸 알았다. 그건 오래 사귀다 터득한 매우 중요한 결론이다. 누군가 강력히 원하는 게 있을 땐 그의 소원에 따른다. 특별히 싫은 사람이 없을 땐 이 방법이 매우 적절하다. 어떤 일에 매우 즐거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으면 보기만 해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 통일을 본다는 건 어쩌면 누구도 즐겁지 않은 방법일 수도 있다. 우린 과감히 한 사람을 밀어주고 나머지 각자의 작은 소원들을 웃으면서 포기한다. 양보할 줄 모르는 권리 주장은 탄력을 잃은 고무줄과 같다. 쓰임새도 없고 모양새도 좋지 않다. 우리들의 야단스럽지 않으면서도 단단한 결속력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칼국수에 부추전까지 먹은 수자의 운전은 느긋했다.

  배가 비면 모든 일에 짜증이 나는 수자. 아무리 고고한 진리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진리 때문에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선택하는 일은 없단다. 위장이 있고 입이 있는 한, 자기의 선택은 망설일 것도 없이 배부른 돼지라고, 나는 먹기 위해 태어났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쏘는 불빛 속에 들어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깜깜이다.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나간 느낌이 이럴까. 자동차가 내는 소리조차 어둠 속에 까맣게 사라져가는 것 같다. 보이는 게 없을 땐 귀가 예민해진다.

  음악이나 들을까.

  조수석 앞의 서랍을 열었다. 어두워서 서랍에 얼굴을 들이대는 데 수자가 실내등을 켰다. 둔한 것 같다가도 이럴 땐 얼마나 예민한지 모른다. 씨름 선수에서 갑자기 연예계로 진출한 강호동이 생각난다. 강호동을 보이는 모습으로만 판단했다간 큰 코 다친다. 얼마나 순발력이 있고 빠른지 모른다. 머리 회전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한 눈에도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속에서 C.D첩을 꺼냈다. 조용필의 골든 디스크를 골랐다. 수자 차에 있는 조용필 음반은 물론 모두 소형이 하사한 것이다. 하나씩 늘어난 조용필 음반이 이제 대부분의 음반을 밀어내고 있는 중이다. 이젠 다른 걸 즐기고 싶어도 선택의 폭이 너무 빈약해졌다. 이러니 우리도 편식을 하게 되고 점점 마니아 아닌 마니아가 될 수밖에.

  달리는 차안이라든가 소음이 있는 곳에선 고전 음악은 어울리지 않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보다 작은 소리에서 천둥 치는 소리까지 섞여있는 고전은 아주 조용한 장소에서 듣지 않으면 제 맛을 즐길 수 없다. 소음 속에서 피아니시모로 연주되는 소리는 또 다른 소음일 뿐이다.

  경험상, 달리는 차 안에선 카랑한 목소리가 악기 소리까지 제압하는 조용필 노래가 으뜸이다. 믿기지 않는다면 시험해볼 일이다. 번지 점프를 하라는 것도 아니고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소형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처음에는 중얼거리듯이 부르다 차츰 신이 나는지 노래자랑 대회라도 나온 듯 도로지도를 말아 입에 대고 큰 소리로 감정을 잡는다. 물론 감정에 몰입해 박자를 놓치기도 하면서. 옆에 앉은 미경이가 소형을 보고 자꾸 웃었다. 자주 보는 모습인데도 볼 때마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미경은 노래방에 가서도 노래를 잘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너 곡씩 부르면 양념 삼아 부추김에 못 이겨 겨우 한 곡을 부르곤 했다. 그조차도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도 않는다. 옆에서 생으로 부르는 수자 목소리가 더 크다. 수자 별명이 마이크가 된 건 미경의 탓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소리로 겨우 한 곡을 때우곤 또 한없이 앉아서 듣고만 있다. 소형의 과장된 열창과 수자의 어설픈 춤 솜씨에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싶어 언젠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니, 난 듣는 게 더 좋아. 노래하는 거 보는 것도 재밌고.’

  순전히 인사치레의 대답은 아니었다고 확신한다. 느낌도 느낌이지만 대답이 바로 나왔고 강력하게 부정의 몸짓을 보였다. 준비된 거짓말이 아니라면 거짓말은 머뭇거림이 있다. 아무리 짧은 머뭇거림이라도 느낌이 전달되는 덴 충분한 시간이다. 적어도 우리가 미안해 할까봐 그렇게 대답해 준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때론 지루할 때도 있을 거라는 것도 배제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장피를 먹다보면 겨자 덩어리가 더러 코를 찌르기도 하는 법이니까. 나라고 모든 게 기꺼워서 하는 건 아니니까. 수자도 소형도 조금씩 불편함을 안고 나름대로 소화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렇지 않겠는가. 인간사에 완전이란 없는 거니까. 완전한 행복이니 완전한 기쁨이니 하는 건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게 아니던가. 아님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거나.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던 소형이 갑자기 노래를 멈추더니

  <우리 노래방 안 갈래?>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제안을 했다. 수자의 대답이 바로 나왔다.

  <그러지 뭐.>

  그러나 짧은 대답만으론 정말 그러자는 것인지 단순히 기분을 맞춰주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호쾌한 대답을 멋으로 아는 수자의 대답을 그대로 믿었다가 어색해진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수자의 호쾌한 듯한 어투 속에 그런 찜찜함이 들어있었다. 대답이 지나치게 빨리 나왔다. 그녀는 그렇게 빨리 판단하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다. 빠른 대답 중 어떤 건 생각 없이 나온 것이고 어떤 건 생각과 동시에 나온 것이다. 뒤에 설명이 따르지 않는 대답은 생각 없이 나온 거라고 보면 거의 맞다.

  오늘 같은 날은 욕을 좀 먹더라도 나서서 확실히 못을 박아야 한다. 영화가 재미있게 완성되려면 악역도 필요한 법이니까.

  <도착하면 열 시쯤 될 텐데, 너 그렇게 늦어도 괜찮아? 노래방을 가게 되면 열 두 시는 돼야 집에 들어갈 걸? 집에 전화해야 되잖아. 전화하는 거 싫어하면서.>

  어투가 딱딱했는지 미경이가 왜 그래?’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수자도 기분이 상했다.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전화 하면 되지. 그게 뭐 어렵다고.>

  돌아오는 대답이 부드럽지 않았다.

  ‘네가 평소에 분명했어봐. 내가 이런 말을 하나. 되는대로 내버려둘 걸 그랬나?’

  속으로 욕을 했다. 그 말을 내뱉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거니까. 그리고 어차피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기분 나빠질 각오도 돼 있었다. 악역을 자처했으니 욕을 먹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도 욕먹고 기분 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기로 했으니 참을 뿐이다. 참자. 애써 감정을 누르며 끝까지 밀고 나갔다.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알았어. 혹시 싶어서. 미경이는 괜찮니?>

  미경이가 어둠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는 걸로 하자.>

  나는 정면을 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